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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선무불선(無善無不善)

소요유 : 2009. 2. 1. 21:29


神秀 偈  唐 神秀大師 (당나라 신수대사의 게송)

身是菩提樹    몸은 보리의 나무요
心如明鏡臺    마음은 밝은 거울 같나니
時時勤拂拭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莫使有塵埃    티끌과 먼지 끼지 않게 하라.

慧能 偈  唐 六祖慧能大師 (당나라 육조혜능대사의 게송)

菩提本無樹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明鏡亦無臺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 없네.
佛性常淸淨     부처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거니
何處有塵埃     어느 곳에 티끌 먼지 있으리오.

육조 혜능이야말로 선종이 천하에 널리 흩뿌려지게 된 실질적 종주다.
오조 홍인(弘忍)에게 법을 받은 혜능의 전법설화는 여느 종교 이야기가 아니라,
차라리 향기 그득한 문학적 뜨락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뒤늦게 입문한 일자무식 혜능이 법기(法器)임을 알아본 홍인은
당시 수석제자인 신수를 제치고 혜능에게 법을 전하면 대중이
납득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지나 않았을까 싶다.

해서, 홍인은 짐짓 대중에게 이르길 이제껏 공부한 바를 게송으로 지어오라고 명한다.

신수는 게송을 지어 회랑 벽에 붙인다.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莫使有塵埃

글을 모르는 혜능은 다른 스님의 도움을 받아,
이 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을 붙여 건다.

菩提本無樹
明鏡亦無臺
佛性常淸淨
何處有塵埃

이에,
오조 홍인은 대중들의 질시를 염려하여,
혜능을 삼경에 조사당으로 은밀히 인견한 후,
그에게 법을 인가한다.
 
나는 예전에 이 양 게송을 처음 대하고 나서,
그 뜻은 그러하다하되,
언어구조상 한 가지 의문을 갖은 적이 있다.

즉, 혜능의 게송이 여법(如法)하다한들,
신수의 게송을 치닫고 나서야 혜능의 게송이 선 것이 아닌가?
만약 신수의 게송이 앞서서 게시되지 않았다면,
혜능의 게송은 어찌 자신을 드러낼 수 있음인가 말이다.

내용은 차치하고, 언어 형식 구조상으로는 분명,
앞을 부정함으로서 자신이 설 자리가 마련되었다.
부정의 근거와 더불어 존립이 성립되는 게송이란,
따지고 보면 그 상대에게 대단히 신세를 지고 있음이 아니겠는가?

만약 상대를 구하지 않고는 독립적으로 성립될 형편이 아닌 게송이라면,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한결 마땅한 태도가 아니겠는가?
그러하기에 언어도단(言語道斷)이요,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저들도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만약, 어쩔 도리 없이 말을 해야 했더라도, 전치부정(前置否定)의 형식이 아니라,
외통으로 스스로 독립된 게송으로 올올(兀兀)히 외쳐야 할 것이라.

게다가, 신수의 게송이 과연 깨달음의 경지를 빗겨난 것인가?
身是菩提樹라는 것인즉 몸이 즉 보리라고 이르고 있음이니,
부처의 가르침과 다를 게 무엇인가?
다만 티끌을 부지런히 닦아내어 청정심을 기르라는 것이 덧붙여진 것이다.
12연기설의 무명(無明) - 노사(老死)이란 것이 어느 날 깨우쳤다고 바로 벗기어지는가?
그것은 아니다.
그 잘난 부처, 그 역시 죽지(老死) 않았는가 말이다.
여기 신수는 점수(漸修)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반면 혜능은 신수의 게송을 도움닫기 식으로 밟고 올라,
신수의 게송을 짐짓 기롱하고 있는 것이다.
신수가 말한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를 혜능은 파헤쳤을 뿐,
신수가 말한 깨달음의 본질에선 차이가 없다.
다만, 깨달음이후 닦음이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것만이 신수와 다를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신수야말로 성실한 인간이 아닐까?
공연히 더 이상의 수행은 필요 없다고 거들먹거리고 말 위인들에게
신수는 곡진한 경책의 말씀으로 외려 음미할 만한 것이 아닌가 말이다.
기실 같지 않은 선객(禪客)들이 깨우쳤네 어쩌니 하며 우쭐거리며,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다.
이들 도배들은 외려 혜능을 따르는 이들에게서 더 많이 배출되었으리라.
물론 그들은 위승(僞僧)들이겠지만.

당시 나는 이런 따위의 소견들이 마음 속에서 일었던 것이다.

그러다, 근일 청말(淸末) 이종오(李宗吾) 선생의 글을 읽다가 흥미로운 대목을 만났다.
해서 이리 적기(摘記)해둔다.

전서산(錢緖山)은 이리 일렀다.

“선도 없고, 악도 없는 것이 마음의 본체이고,
선, 악이 모두 있는 것이 의지의 움직임이며,
선, 악을 아는 것이 양지(良知)이고,
선을 위해 악을 제거하는 것이 사물의 이치에 들어맞는다.”

“無善無惡心之體,有善有惡意之動,知善知惡是良知,爲善去惡是格物”

이것이 양명학(陽明學)의 본이 되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왕용계(王龍溪)는 이리 말했다.

“만약 깨우치게 되면 마음은 무선무악의 마음이요,
의지도 무선무악의 의지요,
앎 역시 무선무악의 앎이며,
사물 또한 무선무악의 사물이 된다.”

“若悟得心是無善無惡之心,意即是無善無惡之意,知即是無善無惡之知,物即是無善無惡之物”

이는 마치 전덕홍(=전서산)이 오조 문하의 신수와 유사하며, 왕용계는 혜능과 엇비길 만하다.
덕홍이 말한 바는 신수의 “때때로 먼지를 닦는다. 時時勤拂拭”라는 말과 유사하며,
용계의 설한 바는 혜능의 “본래 하나의 물건이 아니다. 本來無一物”라는 말과 같다.
소위 돈오를 이르는 것인데, 왕양명은 이리 말했다.

“여중(汝中=왕용계)은 모름지기 덕홍의 공부를 써야 하며, 덕홍은 여중의 본뜻을 꿰뚫어야 한다.
두 사람의 견해는 다만 서로 취할 만하지,
서로 해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말한다.
‘용계어록(龍溪語錄)’에서 말하고 있는 이치는 육조단경과 별로 다를 바 없다.
길은 달라도 종국에 이르르는 곳은 같지 않은가 말이다.
우주진리란 다만 연구가 철저하면 피차 소견이 서로 같은 것이다.

이 논의를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에 대입하면,
고자(告子)의 성무선무부선지설(性無善無不善之説)에 이르게 되니,
이는 성선설과 성악설이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하나로 지양되고 만다.

맹자와 순자 그리고 순자의 제자인 한비자의 법가,
양자, 묵자들은 모두 천하의 의사들인 것이다.
세상에 편급된 고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양의(良醫)인 것이다.

저들을 과연 누가 분열시켰는가?
실인즉 미망(迷妄)들이라 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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