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방인지심(防人之心)

소요유 : 2011. 12. 2. 11:58


방위병으로 근무하다 제대한 처남 하나가 있다.
그가 말한다.

“나는 다시는 그들(방위 동료)과 술 먹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런 말을 하였는가?

“술자리에 가선 끝말엔 늘 싸움이 일어난다.
단순한 말의 씨 하나를 잡고 늘어져 티격태격 말싸움으로 번지다,
종내는 멱살잡이 주먹다짐으로 발전한다.”

방위라고 다 그러하겠는가?
다만 그가 근무하던 곳, 당시 만난 병(兵) 자원의 자질이 문제였겠지만,
어중이떠중이 본데없는 것들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으로,
말이 아니라 주먹으로,
경우, 이치가 아니라 억지, 고집으로,

사물을 재단하고,
제 욕심에 부역한다.

내가 2010년 농원을 개설하면서,
난생 처음, 노가다들을 많이 만났다.

저들은 약속 어기는 것을 여반장으로 하고,
아무데나 함부로 쓰레기 버리는 것을 예사로 여기고,
염치가 부재하고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해서 집으로 돌아와 집사람에게 이야기 했다.

“놀랍다.
저들은 절대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니다.
일상의 사람으로 알고 대하면 아니 된다.”

우물 굴정 공사를 할 때,
업자는 계약을 맺었으면서도,
굴정 개시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
서울에서 새벽을 가르며 달려온 내가 그에게 전화를 하니,
먼저 하던 공사 서류문제 때문에 오늘은 하지 못하겠단다.

내가 서울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는가?
저희들끼리 작당질하고 공사비 올려받자는 수작인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내가 물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이라면 연락을 주어야 하지 않는가?”

저 양아치의 대답이 걸작이다.

“그렇게 따지면 공사를 하지 못하겠다.”

이들을 어찌 정상적인 사람이라 이를 수 있겠음인가?

결국은 이자를 물리치고,
신실한 다른 분의 소개를 통해 업자를 새로 들였었다.

어찌 노가다라고 다 그러할까?
그럴 리가 없다.

내가 아파트를 하나 새로 분양 받아,
베란다 새시 공사를 인부 하나에게 맡긴 적이 있다.
공사가 다 끝나가자 그는 포대와 빗자루를 가져와,
어지럽히진 바닥의 조각 타일, 시멘트 따위를 티끌 하나 없이 깨끗이 쓸어 담았다.
그리고는 그것을 지고 나갔다.
자신이 처리한다고 한다.
더 이상 주인은 할 일이 없었다.
프로중의 프로를 만난 것이다.
이를 우리는 장인(匠人)이라 부른다.
장인은 단순히 기술만 가진 것이 아니라,
이리 예(禮)와 덕(德)을 갖추고,
제 명예심을 아우른다.

예전 내 어린 시절엔 김장철이 되면,
배추, 무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파는 장이 크게 선다.
상인과 흥정이 끝나 수백 통 배추며, 무를 사고 나면,
장바닥 한 귀퉁에서 뚜껑 딴 깡통 안에 나무를 태워 어한(禦寒)을 하며,
대기하고 있던 지게꾼이나 리어카 꾼에게 배달을 맡긴다.
이들이 배달이 끝나고 나선 돌아가질 않고는,
뭉그적거리거나 심지어는 생떼를 쓰곤 한다.
품삯 외에 행하(行下) 돈을 더 달라는 짓이다.
예전 우리 아버지는 별 투정없는 자에겐
우정 잡아 세우시곤 돈을 듬뿍 더 주셨지만,
그렇지 않은 자에겐 약소하니 면만 차리셨다.

저 베란다 공사를 한 이를 대하자,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이 났다.

노가다 중의 노가다,
진짜배기 노가다,
그 때의 베란다 공사 인부를 다시 기억해본다.

내 평생 친구들하고 술 먹다가 주먹다짐은커녕 멱살잡이 한번 해본 적이 없다.
망나니, 잡것들이 아닌 이상 그럴 까닭이 없지 않은가 말이다.
제 아무리 논쟁이 격해지고 의견이 다를지언정,
다들 멀쩡한 인격들인데 어찌 주먹다짐이 일어나겠음인가?
말로서 이기지 못하였으면 부끄러워 고개를 떨굴지언정,
어찌 주먹이 나올 것인가?

옛날 인도에선 사상논쟁이 일어났을 때 모가지를 걸었다.
상대의 목이 아니라 자신의 목을 건 것이다.
말로써 다투되 지면 자신의 목을 상대에게 내놓았다.
칼로 싸운 것이 아니라 혀로, 두뇌로 싸운 것이다.
언어를 증표(證票)로 그들은 명예를 겨룬다.
하지만 이게 꺾이면 목을 내놓아 제 자존심을 스스로 조상(弔喪)한다.
깨끗하게.

주먹을 내세우는 자는 어떠한 경우라도,
명예심도, 자존심도 없는 비루한 양아치일 뿐이다.

사무라이는 주군에 충성을 못하였다든가,
제 명예를 지키지 못하였을 때,
배를 갈라 제 창자를 땅에 뿌렸다.
이 아니 어찌 지는 벚꽃처럼 비장하니 아름답지 않으랴.

폭력으로, 행패로 세상을 재단하려는 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불한당(不汗黨), 불상것, 하천배라 불려야 한다.

여기 시골에 들어와 본데없는 녀석한테 행패를 당하고 나니,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고 사람이 아니면 사귀질 말라는 말이 여실하지 않은가 싶다.
나는 비록 생선을 꿴 새끼줄이었을지라도 신성한 금(禁)줄인 양 여겨 대하였다.
이게 인간의 도리가 아니겠음인가?
하지만 제 신분이 비린내 나는 하천배(下賤輩)라고 자청하여 우긴다면,
이 또한 어찌 말릴 수가 있으랴.
사람의 사귐에 있어선 향(香)종이 같은 이를 가려 삼는 절덕(節德)이 있어야 한다.
(※ 참고 글 : ☞ 2011/11/30 - [소요유] - 길 없는 길 - 분불(焚佛))

빌게이츠가 고등학생들에게 해준 충고 하나를 기억하고 있다.
이는 실인즉 우리 처가 어디서 주어 듣고는 내게 알려준 것이로되,
오늘 어제 겪은 일 가운데 서성이면서, 문득 이 이야기가 떠오른다.

“공부밖에 할 줄 모르는 '바보'한테 잘 보여라 .  
사회에 나온 다음에는 아마 '그 바보' 밑에서 일하게 될지도 모른다.”

말투 자체는 조금 거슬리지만,
그 본의만은 취할 수 있다.

공부가 인생사 다는 아니지만,
공부란 사물 이치를 궁구하고 앎을 닦아가는 과정이다.
(※ 이를 대학(大學)은 격물치지(格物致知])라 한다.)
한즉 공부만 패는 이가 설혹 바보처럼 보일런지 몰라도,
날로 늘어가는 실력과 안으로 익어가는 인격의 깊이가 어찌 녹록하랴?
(※ 배움, 공부에 대한 참고 글 : ☞ 2008/08/14 - [소요유] - 조쇠의 배움)

사람 사귐도 역시나 옳고 바르게 닦인 이,
즉 맑고 향기로운 이를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
양아치, 무지렁이를 어찌 벗할 수 있으랴?
이런 자들과의 교우(交友)는 번거로움과 번뇌만 더할 뿐인 것을.

악인 하나가 서면 씨 뿌려지듯 악인 백, 천이 천하에 흩뿌려진다.
악인으로부터 해를 당한 이는 문밖에 칼, 창을 세우고 마음을 닫는다.
이를 방인지심(防人之心)이라고 한다.
즉 남을 경계하여 미리 해악(害惡)을 막을 준비를 한다는 뜻이다.
이 얼마나 우중충하니 쓸쓸한 정경인가?
하지만 이 정도만 하여도 견딜만하다.
급기야는 갚아주겠다고 남에게 적극적으로 해를 가해겠다는 마음을 일으키게도 된다.
이를 해인지심(害人之心)이라고 한다.
이쯤 되면 너와 나는 적당(敵黨)이 되고 끝내 산하는 피로 물들게 된다.

악인이란,
그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온 천하의 문제인 것이다.

한즉,
천하를 태평케 하려면,
징악(懲惡), 징인(懲人)하길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천하인이 함께.
설령(設令) 남에게서 일어난 일일지라도 정녕코 그것은 내 일이 아님이 아니다.

계신(戒愼)이란 스스로의 마음가짐을 경계하고 삼가는 마음을 뜻한다.
며칠 간 작정하고 계신(戒愼)의 마음 빗장을 풀고,
거무틱틱 어둠에 젖은 늪숲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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