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자연농법 유감(遺憾)

농사 : 2012. 1. 28. 22:40


나는 2007년부터 3년간 주말농사를 지었다.
말이 주말농사지 따지고 보면 거의 선머슴생활에 불과했다.
처가 시키는 대로 삽질하느라 세세하니 작물의 생리를 연구할 틈이 없었다.
욕심껏 너른 밭에 작물을 심고는 미처 관리가 따르지 못해 소출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일쑤였다.
뭣도 모르고 2년 차에는 욕심을 부려 전 밭에 파종기로 콩을 심었는데,
풀에 치어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고 말하자면 심은 양의 반에 반도 못 건졌다.
주말에만 시골에 들러 유기농으로 짓자고 덤빈 것이니,
이야말로 당랑거철, 어림없는 짓이었다.

게다가 뜻은 높고, 가슴은 부풀어, 유기농으로 짓는다고 농약 치지 않고 버텼다.
하지만 땅이 척박한 일부 지역은 화학 비료만큼은 조금 넣기는 했다.
우선은 퇴비를 만들 여유가 없었으니,
도리 없이 일부 화학비료나 농협에서 제공하는 퇴비를 사서 이용했다.

지금 나는 주말농사 3년을 마치고 2010년부터는 과원을 일구고 있다.
세칭 유기농을 지향하고 있으나 아직 일천하여 고군분투하고 있을 뿐이다.

그동안 얼핏 귀로 ‘자연농업’이라는 것이 있다는 말을 들었으나,
이게 유기농업의 한 가지 분류(分流)가 아닌가 하는 정도로 그치고 흘려들었다.
홀로 과원을 개원한다는 것이 생각과 달리 여간 공고(功苦)스러운 것이 아니라,
미처 공부할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이번 겨울 짬에 ‘자연농업’에 대해 쓴 글을 접하고는 흥미가 일어,
닥치는 대로 관련 자료를 챙기고 탐독을 해나가고 있다.

보통 유기농이라 하면 ‘무농약’, ‘무비료’를 기본으로 하여,
‘무제초’, ‘무경운’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자연농업’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무투입’이니,
가령 일부의 경우 관수까지도 하지 않는다 한다.

그런데 무관수를 하자니 비가림 재배를 하여야 하고 개중엔 비닐멀칭을 하기도 한다.
이것을 두고 비가림, 비닐멀칭을 하면서 그게 무슨 ‘자연농업’이냐고 비난하는 이도 있다.
나 역시도 표방하는 기치와 내용이 배치되는 이런 모습이 그리 탐탁지는 않다.
하지만 그 농법의 기본 철학이,
외부 자원을 차단하고 식물이 가진 생명력을 최대한 끌어내는데 있다고 하니,
그런대로 양해하여 줄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지엽적인 것이 아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바에 몇 가지 납득되지 않는 점도 있고,
차후 지적하겠거니와 본원적으로 자연스럽지 않은 그들의 태도를 목격하고는,
이들의 한계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우선 석연치 않은 점 몇 가지를 지적해보자.

자연농업으로 농사짓는 이의 주장 하나,

“뿌리에 물이 닿으면 뿌리(근모)가 끊어진다.
이는 ‘토극수’이듯 흙과 물은 상극이기 때문이다.”

토극수(土克水)이긴 하지만 그렇다면 수생목(水生木)은 어찌 이를 터인가?
물이 목을 생하는 이치야말로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이치가 아닌가 말이다.

물이 닿으면 뿌리가 다친다는 말은 물론 적은 양의 물을 말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물에 오랫동안 뿌리가 잠기면 심각한 장애가 생길 것은 자명한 노릇이다.
저들이 무관수를 하는 이유인즉 토극수이기 때문이 아니라,
식물의 자생력을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 물 공급을 제한하는 것일 터이니,
이는 토극수로 논할 것이 아니라 수생목의 원리를 역으로 취하고자 함이 아닐까?

나를 補하려면 母를 補하고 나를 瀉하려면 子를 瀉하라 했음이다.
木의 입장에서 보면 母는 水이니 木을 補하려면 水를 補해야 하나,
역수로 외려 母인 水를 瀉하여 木이 가지고 있는 자생력을 한껏 고양시키려 함이 아니겠는가?
이는 마치 사자가 새끼를 절벽 아래로 던져 넣고,
스스로 기어올라 살아나는 녀석만 취하는 것과 매한가지라.

혹은 이리 설명할 수도 있었으리라.

단식(斷食)이란 것이 역수를 취하자는 수작 아닌가?
곡기를 끊어 이제껏 잠자던 생명의 원기를,
마치 천길 깊은 우물로부터 길어 올리듯 그리 깨내보자는 것이다.
급기야 썩은 혈(血)은 밀려나고,
굳었던 맥(脈)이 뚫리며,
새벽 아침을 맞는다.

차라리 이런 식으로 설명하였더라면 일응 이치에 닿아 수긍할 수도 있었으련만 아쉽다.

또 하나의 의문,

자연농업을 짓고 있는 이에게 어떤 이가 묻는다.

“자연재배인데 왜 하우스를 사용하는가?”

“슈퍼내츄럴(Supernatural,초자연)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자연 위에 자연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문답을 듣고는 나는 생각한다.

세상에나, 자연 위에 또 위로 층위를 이루고 있는 것이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당연 자연농업이란 말을 쓸 것이 아니라,
그저 초자연농업이라 칭해야 옳지 않겠는가?
자연이란 말을 빙자, 즉 의지하여 자신들의 농법을 규정짓지 말고,
바로 초자연농업이든 Supernatural agriculture라 불러야 옳을 것이다.
내가 보기엔 자연과 슈퍼내추럴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말이 아름다운 자연을 행여라도 욕보이는 것을 나는 경계한다.

자연농업에도 농민에 따라 조금씩 다른 여러 유형이 있어 일률적으로 말하기 어려우나,
대체로 그들은 무투입을 강조한다.

물론 지금의 유기농은 분명 문제가 있다.
나 역시 고민하는 것이긴 한데,
유기농 짓네 하면서 폼을 잔뜩 잡고 있지만,
기실 농토에 투입되는 것들 가령 비료만 하여도 다 외부로부터 가져온다.
외부로부터 가져온 것의 성분이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문제는 자신의 농토는 설혹 비옥해진다고 하여도,
상대편 쪽은 수탈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가령 산에서 낙엽을 긁어온다든가,
목초, 사료용 곡물 등을 먹고 자란 가축의 축분 따위 역시 그곳의 지력 증진에 기여를 하지 않고,
다른 곳에 보내질 것이 기약된다면,
자체 한계 능력을 넘는 무엇인가 무리한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진정한 유기농이라면 남의 밭, 산을 해하지 않고,
내 밭에서 나온 것만으로 리사이클링 할 정도라야 면목이 서지 않겠는가 말이다.

남의 밭의 지력을 빼앗고,
산에 덮힌 낙엽을, 나무 파쇄목을 애써 갈아 넣는 등,
외부 자원에 크게 기대고 있는 한 유기농도 일부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나 역시 이로부터 예외가 아니다.
사뭇 미안한 노릇이지만 나는 과수 밑에 멀칭용으로 우드칩을 깔아주었다.
현재로선 마땅한 대안이 없어 이리 했으나 차후 적절한 방법을 찾을 것이며,
그리 되길 鶴의 목으로써 고대한다.)
온 농토가 유기농을 시행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면,
종국엔 그 한계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생각해보면,
이럴 양이면 차라리 화학비료 투입하는 관행농이 더 생명, 자연친화적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최소한 남의 밭, 산으로부터 착취는 하지 않는가 말이다.
내가 애정을 많이 기우리는 유기농법이 이런 문제를 잘 극복해주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농업에서 내세우고 있는 무투입 정신은,
내가 지향하고 있는 농사철학과 일응 맥을 닿고 있어 상당히 고무적이다.
하지만,
그래, 이것까지는 제법 긍정적이었는데,
그들이 한껏 자랑하고 있는 모습들을 접하다 보면 이내 실망하게 된다.

가령, 이파리도 별로 없는데 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열매가 무수히 달린 토마토, 고추들.
이들 앞에서 저들은 멋지게 포즈를 잡고 득의만만하다.
이를 둘러서서 보고 있는 이들도 하나같이 입을 벌리고 놀라고 만다.

나는 이런 모습들을 보면 하나도 달갑지 않다.
외려 저런 정경 속에 서서 놀라고 있는 인물들의 면면을 보고 안타까움을 느낀다.

닭, 소, 돼지.
현대식 축산에서 이들은 좁은 우리에 갇혀 평생을 지낸다.
게다가 부리가 잘리우고, 발톱이 뽑히고, 꼬리가 짤리우고,
밤에도 전등을 켜놓고 잠을 못 자게 하며 증체, 증산하도록 쥐어짜내어진다.
이리 갖은 고문, 학대 속에서 한 많은 생을 살다가,
기어코 죽음에 이르러서야 풀려난다.

나는 저 현장에서 이런 장면을 오버랩 시킨다.
식물에 물을 주지 않는다고?
이게 어찌 자연스럽단 말인가?
양계업자는 닭장 안에 밤에도 전등을 켜놓아 산란율을 높인다.
움직이면 살 빠진다고 꼼짝도 할 없는 좁은 우리에 가둬넣고 돼지를 키운다.
이를 두고 어찌 '자연목축업'이라 이름할 수 있음인가?

식물에 물을 주지 않으니 기를 쓰고 뿌리를 아래로 내려 뻗어나갈 터.
이도 정도가 있지 이파리도 별로 없이,
저리 가지가 휘도록 열매가 달리도록 얼마나 식물이 힘들었을까?
이게 양계장에서 잠도 못자는 닭과 무엇이 다른가?
이를 두고 어찌 '자연농업'이라 부를 수 있음인가?

자연농업을 짓는 이 하나가 있어,
이리 말하며 기염을 토한다.

“결과를 능가하는 이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양분도 없이,수분도 없이,작물이 잘 자라주면은 이게 결과물입니다.이런 결과물에 이론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말 그대로 개소리에 불과합니다.지식인들이 특히 농업에...”

나는 이 화법에 숨은 양계업자의 결과지상주의의 셈법, 생명을 향한 폭력을 또 다시 목격한다.
무작정 소출이 많이 나면 최고지 무슨 이론이 철학이 대수겠는가 하는 이 무대뽀 정신.
나는 이게 상당히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가 악의를 갖고 저런 일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외려 열정을 가지고 진행한 일이 어느 덧 자신도 모르게 저리로 흘러들었지 않았는가 싶다.
나는 우정(友情)어린 충정으로 그가 이런 문제에 대해 바른 깨달음을 갖게 되길 바란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쥐어짜며 몰아치면 당연 산출량이 늘 수는 있는 것.
하지만 저들 육신과 영혼은 모진 인간들에 의해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저것을 어찌 자연농업이라 이를 수 있는가?
이는 자연이란 이름을 빙자한 ‘자연공장’ 아니 ‘공장농업’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아니 차라리 ‘학대농업’이라 불러야 옳을 터이다.

게다가 이로 인해 축산현장에선 구제역, 조류독감, 광우병 따위의 각종 병들이 창궐하고 있다.
농업현장에선 농부들의 욕심이 저지른 죄악의 가검물,
즉 비독으로 땅이 몸살을 앓고, 각종 병충해가 들끓는다.
이렇듯 도를 넘은 인간의 짓거리가 각종 재난을 야기하고 있음이다.

반면 유기농업을 합네 하는 일부 농민은 실은 ‘과잉보호농업’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있는 대로 좋다는 것은 다 처넣고는 폭식을 시키고 있다.
마치 아이들 일등 인간 만든다고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학원 순례로 파김치를 만들고 있듯.

그러고 보니 우리는 양단(兩端) 끝에 놓여 오락가락하고 있음이다.
한쪽에서는 있는 대로 퍼 넣으며 생산량을 높이려고 기를 쓰고,
한편에서는 모질게 학대하며 쥐어짜내는데 몰두하고 ...

유기농, 자연농.
그 자체는 분명 관행농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하였지만,
어느 덧 관행농에서 찌든 습벽(習癖)이 다시 부활하고 있는 게 아닐까?

무릇 바른 정신을 놓치게 되면,
욕심이 등천하여 거죽으로만 그럴 듯한 이름을 뒤집어쓰고 호가호위(狐假虎威)하게 된다.

그대가 유기농이든 자연농을 지향하고 있다면,
그게 무엇 때문인가?

늦은 밤 밭둑에 서서,
이리 타이르듯 조용히 되물어야 한다.
거기, 그대 들리는가?
바람이 뺨을 스쳐지나는가?

그게 작물 소출량을 높이려 함인가?
그게 결국은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욕심 때문이 아닌가?
그러려면 굳이 농민이 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그대가 설 자리는 밭이 아니라 공장이, 장터가 아닌가 말이다.
최소 저 자리에 서면 직접적으로 생명에 해를 가하지는 않는다.
(아닌가?
외려 더한가?)

집 떠나고 30여년이 흘러 다시 돌아온,
동구(洞口)밖 순이하고 나눈 언약의 길.
거기 서 있는 느티나무 결에 새긴 순정이얼랑,
아직도 창백하니 곱고 깨끗하다.
이 마음으로,
유기농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자,
자연농의 본의를 스스로 망가뜨리지 말았으면 한다.

농민이 철학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뜻을 잃으면 스스로에게 부끄러울 뿐인 것을.

노자가 말한 천지불인(天地不仁)은 천지가 그저 불인하다는 데 뜻이 미치는 것이 아니라,
무위(無爲)한 자연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 한 인간이 있어,
자연에 개입하게 되면 한 찰나 간에도 애증(愛憎)이 오만번 전변(轉變)하며,
꾸미고, 가꾸고 ... 끝내는 욕심을 부려 온갖 술수를 마다하지 않게된다.
모름지기 자연농업이라 이를진대,
인간의 작의적인 유위(有爲)를 경계하여야 한다.
나는 이를 조작질(manipulation)이라 부르곤 한다.
이것을 한 때는, 아니 지금도 여전히 신지식, 벤처 따위의 꼬갈 모자를 씌우며,
거국적으로, 거세적으로 사람을 꾀고 있다.
거죽으로는 자연을 빙자하고 있으나 실인즉 최대한 식물 자원,
아니 생명을 쥐어 짜내자는 데 목표가 있다면,
참으로 면목 없는 짓이라 할 것이다.

이는 식물의 본성을 일깨우는 것이 아니라,
그를 악용하여 제 이익에 부역시키는 행위라 할 것이다.
마치 현대의 악질적인 축산업자들처럼 말이다.
본질적으로 이들과 저 농부가 다른 것이 하나도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저들이 지어내는 있는 업(業)은 농업 또는 축산업으로 부를 것이 아니라,
그저 공업 또는 상업으로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자연'이란 말을 앞세울 때는 명실(名實)이 아우러져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설혹 그게 축산공업이든, 조작농업이든, 어떤 것으로 이름 불리우든,
나로선 무력하게 참아낼 도리밖에 없겠지만,
이리 거죽 말을 앞세운 위장은 또한 내겐 생소함을 넘어 대단히 불편한 것으로 다가온다.

화언교어(花言巧語)라,
꽃같이 아름답고 교묘한 말인즉슨,
거기엔 인애지심(仁愛之心)이 적다하였다.

'자연농업'이란 말을 듣잡자니,
이는 과시 떠나버린 애첩이 다시 집에 돌아온듯 현대인에겐 짜릿한 로망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거기 인애지심(仁愛之心)이 없다면,
내 이를 어찌 화언교어(花言巧語)라 이르지 않을 도리가 있겠음이며,
그들에게 허물을 짓는 바가 되랴.

언필칭 후쿠오카 마사노부(福岡正信)를 필두로 가와구치 요시카즈(川口由一)나 기무라 아키노리(木村秋則)
이들이라면 ‘자연농업’을 짓고 있다고 한들 하나도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하지만 요즘 일각에서 ‘자연농업’ 이란 간판을 들고 등장하고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자하면,
그 참람스러움이 참으로 염려스럽다.

이런 소이(所以)인즉,
혹여 유기농 또는 자연농업의 바른 길을 가시고 계신 선배 제현께,
주제넘게 공연한 걱정을 끼쳐드린 것이 아닌가 하여 조심스럽다.
널리 해량하여 주시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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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 : 2012. 1. 28. 22: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