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진선미(眞善美) ↔ 이친호(利親好)

소요유/묵은 글 : 2008. 2. 21. 09:34


저는 화투놀이, 카드놀이니 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들은 풍월이건데,
비 내리시는 꾸리꾸리한 날 화투 패 맞추어가며
아슴아슴 저려오는 마음을 달랜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떠난 님 그리며, 자개문갑장 앞에 방석 깔고 이메조 패를 맞춘다든가,
지난 봉평 장날에 밑깐 손해를, 다음 대화, 진부장에서 벌충하기 위해
똥패를 기약하며, 시금털털한 막걸리로 꺼칠한 목구멍을 적시곤 합니다.
이 때 뒤곁 마방에 매어둔 허생원 나귀는 꼬리를 휘저으며
늙고 지친 저녁 이내(嵐氣)를 게워냅니다.  
그 날 노란 달은 처마에 내려 메마른 나귀 등을 쓰다듬습니다.

저 역시 오늘 비가 오니 마음이 적적하군요.
해서, 모르는 화투 대신 말 조각을 가지고 놀아보고자 합니다.

우선 진선미란 말의 짝을 한번 맞춰 보고자 합니다.

진선미(眞善美)
진(眞) ↔ 위(僞)
선(善) ↔ 악(惡)
미(美) ↔ 추(醜)

진선미 이게 이리 패짝을 맞추어 꾸려 볼 수 있습니다.

삼천리 방방곡곡 어느 점방에서나 파는 이런 기계 말고
다른 여벌짝도 준비해 보았습니다.

이(利) ↔ 해(害)
친(親) ↔ 소(疎)
호(好) ↔ 오(惡)

이것은 제가 私製로 만들어본 벌짝입니다.
어색하지만, 임시로 이를 이친호(利親好)라고 불러봅니다.

진선미(眞善美) ↔ 이친호(利親好)

진위(眞僞) ↔ 이해(利害)
선악(善惡) ↔ 친소(親疎)
미추(美醜) ↔ 호오(好惡)

군자는 진선미의 세계에 거하나,
소인은 이친호의 세계에 엉덩이 걸치고 삶을 꾸려 갑니다.

견리사의(見利思義), 견금여석(見金如石)이라 할 때,
이는 이해(利害)의 세계를 떠나 의리(義理)의 세계에 뜻을 두어라고 가르치고 있음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 이는 이해가 의리보다 더 쉽고, 급하게 우리의 삶을 가로 막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기도 합니다.

공자는 견리사의하면 성인(成人) - 곧 “이룬 자”라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해만 밝히면 아직은 미성년자라고 이를 수 있 수 있겠는지요 ?
오늘 한국 땅에서는 경제가 최고라고 모두들 말하고 있습니다.
하오면, 한국인은 지금 공자의 이 말 앞에서 모두 미성년자가 되는가요 ?

지역주의라는 것,
이게 친소(親疎)에 따라 편을 갈라 먹자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
선악(善惡)이 아니라, 친분에 따라, 연고에 따라, 출신학교에 따라,
부귀귀천에 따라, 남녀에 따라...
편을 갈라 먹자고 하는 것 아닙니까 ?
서프, 미래파, 보나세파 이게 편먹자고 이 짓하는 것입니까 ?

나는 냉면이 좋아,
나는 보라색이 좋아,
나는 땡땡이 무늬가 좋아....
나는 키 작은 남자는 싫어,
나는 짧은 치마는 싫어,
나는 미국이 싫어....

한창 자랄 나이도 훨씬 지난 성인이
사물 앞에 서서
좋다, 나쁘다 이리 好惡의 감정 표현을 잘 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like ↔ love는 다릅니다.
개를 like하는 사람은 개고기를 먹기도 합니다만,
개를 love하는 사람은 개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love의 대상은 아름다움입니다.
like의 대상은 기호(嗜好)입니다.
저는 그러하기에 아름다운 것이라면 남녀불문, 무정물까지 사랑합니다.
사랑은 좋은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 가을,
아름다운 이를 만나고 싶다.
아니, 아름다운 사람이 먼저 되고 싶다.
아름다운 이 앞에 서서, 우리가 얼굴이 흔히 붉어지는 것은 수줍기 때문만일까?
자신이 미처 아름답지 못한 까닭에 우리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아닐까?
단풍잎은 이런 비밀을 알기에 그리 붉은 것이리라.
하기에 단풍잎은 못내 슬퍼서 아름답다."

like 대상을 언젠가 내가 배반하기는 쉬워도,
love의 대상은 아무리 궁처(窮處)에 이르러도
나를 희생하면서도 지켜내야 할 소중한 것입니다.
역으로, 이 때라야 비로서 우리는 그게 like가 아니라 love인줄 뒤늦게 깨닫기도 합니다.

주변에서 잘 관찰해 보십시오.
좋다, 싫다라는 말을 남발하는 사람은 조금 경계하여야 합니다.
이게 얼핏 감정 표현이 선명하여, 시원하게 보일 때도 있습니다만,
like의 세계인 이상 언젠가 누군가에게 “배반의 상처”를 남길 우려가 있지 않은가 살펴야 합니다.
아 언젠가 제가 쓴 “배반의 장미(☞ 2008/02/15 - [소요유/묵은 글] - 배반의 장미)”에서 저는 이리 말했지요.
“슬프게도, 배반은 존재의 끝에 나타납니다.”
호오(好惡)는 종국에 깊은 상처를 내고 사라지곤 합니다.

제가 소시적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름다운 여자를 나는 사랑할 테지만,
이쁜 여자는 나의 관심의 的이 아니야 ...”
이리 호기를 부렸던 적이 있습니다. ㅎㅎ

이쁜 여자는 好의 대상에 불과할 뿐이란 말이지요.

다 큰 성인은 그래 쉽게, 좋다 나쁘다 말하지 않습니다.
아니, 호오를 남발하면 아직 성인이 아닐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 저는 어린 친구들에게 이리 가르치곤 합니다.

“네가 어쩔 수 없이 ‘좋다/나쁘다’라는 말을 하고 싶을 땐,
의식적이라도 그 대신 ‘아름답다/추하다’라고 바꾸어 말해보라.”

아름다운 것은 한 때, 추해지더라도
내가 챙겨주고 북돋우어, 일으켜 줄 소중한 것이지만,
좋아하던 것은 어느 순간 싫어질 때,
미련 없이 헤진 걸레짝처럼 버리게 됩니다.

몇 해 호미질을 하다보면 끝이 부러지거나 깨지기도 합니다.
이 때에 이르러 차마 버리지 못하고 추녀 밑, 비 들이치지 않는 곳에
호미를 고이 걸어 모셔둡니다.
우리네 옛날 농부는 이리도 심성이 고았습니다.
지금은 까짓 것 내팽겨쳐 버리고 맙니다.
중국제 지천이라 자주 망가지기도 하지만,
이제는 모아 두었다가 엿도 바꿔 먹을 시절이 아니거든요.
참으로 엿같은 세상입니다.

유씨부인 역시 바늘이 부러지자,
조침문을 지어 그를 조상하며 아파합니다.
이것이 美의 세계입니다.

달면 햝고
쓰면 뱉는
경제(經濟)가 으뜸 가치인 세상은
好의 세계입니다.

( ※
앞 선 글 ☞ 2008/02/16 - [소요유] - 숭례문 애도는 신화가 아니다
여기에서 저는 바로 이런 그림자 한자락을 보았었습니다.
저들 기능 일변도의 마음보들,
감성의 어머니, 그 자애로운 손길을 느껴보지 못한 영혼의 고아들.
심형래의 '디워'에 퍼부어지던 디까들의 열정,
그 백분지일도 못되는 숭례문 애도에 대하여,
저리 차갑게 대하는 그들을 앞서 조상해 보냅니다.
)

한편, 그게 원래부터 진짜 추한 것이라면,
아무리 이해가 구부러지고,
선악이 곤두질 쳐도
추한 것이기에 아름다움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싫어 하던 것일지라도
그게 어느 날, 내 이해(利害)에 복무하고,
내 고장 사람이고, 짧은 치마 입고 교태 부리며 나타나면,
거짓(僞)이고, 악(惡)하며, 추(醜)한 것이라도
이내 나의 좋아 할 목록 맨 앞에 치부(置簿)되기도 합니다.

때문에 저는
진선미(眞善美)는 군자의 세계,
이친호(利親好)는 소인의 세계라 이리 패를 한번 맞추어 본 것입니다.

만약 이명박을 내가 지지하는 것이
내 사적 이해에 복무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인가 ?
나와 지역 연고가 있기 때문인가 ?
가느다란 눈이 佛眼처럼 자비로와서 인가 ?

(* ref: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img_pg.aspx?cntn_cd=IE000819961 

(c) ohmynews.com
'부처 눈'이 나하고 닮았다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가 18일 오후 서울 정동 유관순기념관에서 열린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주최 전국여성대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이 후보는 자신의 작은 눈에 관한 얘기를 하면서 '사찰에 가면 친근감을 느끼는 것이 하나 있다. 딱 반을 뜨고 있는 부처의 눈이 나하고 닮았다'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

또는,
그가 진위시비(眞僞是非), 선악(善惡), 미추(美醜)란
체(篩,filter)에 걸러진 알곡이기 때문인가 ?

이명박 뿐이 아니고, 다른 후보들도
이런 이중 domain에 차례로 눕혀
깝데기 벗겨놓고 내리 훑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하기사, 정작은 유권자 자신을 스스로 먼저 눕히는 게 순서겠군요.

다 쓰고 나니,
비는 그치고,
바람이 제법 부는군요.

바람이 일자
낙엽이 계곡 안쪽으로 우우 소리내며 몰려 갑니다.
아름다운 세상은 저리 늘 그 안쪽에 숨겨져 있습니다.

***

댓글 모음

  [1/6] qhsktp IP xx.2x0.10x.xx    작성일 2007년10월19일 19시21분03초 
조선시대는 유교의 정신이 최대로 발휘된, 군자의 시대였지요.
양반들 한테는 지상낙원이었지만,경제는 천대를 받았고요.
그런데,평민들은 땅을 가져봐야 고작 몇마지기에 불과한데,양반들은 보통 수백마지기씩을 가지면서,경제적 호사를 누렸습니다.대대 자자손손 경제적 풍요을 누리면서 경제를 천시했으니,어이가 없습니다.
양반계급에 속했던 사람들은 옛날 조선시대를 그리워하갰지요.
  [2/6] bongta IP 2xx.2xx.1xx.xx    작성일 2007년10월19일 21시12분31초 
경제(經濟)를 두고
문국현은 진짜 경제라며 앞에 수식어를 하나 더 붙입니다.
이 때, 이명박의 경제는 최소한 문국현 앞에서는 가짜 경제가 됩니다.
원래 경제(經濟)라는 말은 장자에 나오는 말로서 경세제민 (經世濟民)의 약어라고 알고 있습니다.
물론 경제라는 것이 economy의 역어이지만,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경제란 말은 글자 뜻을 새기자면
세상을 경영하고 국민을 구제해낸다는 뜻이겠지요.
지날경, 건널제(구제할 제)...
이게 모두 지경을 지나고, 강을 건너는 것을 추상하니 참으로
제대로 조어가 된 말들이라고 생각됩니다.

경세제민에서의 민을 저는 국민이라고 번역했는데,
흔히들 백성(百姓)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게 관의 대척점에 위치하여, 관리의 대상으로 취급되는 측면이 있기에
저는 오늘 날에는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jjj님의 글 “개혁진영의 총체적 몰락을 바라보면서”의 댓글로 제가
노무현 정권의 가장 큰 과오의 한가지로 지적한 것이 부동산 문제였습니다.
저야말로 하고 많은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경제를 꼽았던 것입니다.

전들 왜 아니 경제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겠습니까 ?
하지만, 잘 사는 사람들이 더 잘 살고,
못 사는 사람들이 더 못사는 경제라면 그것을 경제라고 할 바 없지 않겠습니까 ?

판을 아무리 크게 벌린다 한들,
국토를 파헤쳐 돈을 트럭으로 주워낸다한들,
그게 종국엔 토건마피아, 정치모리배들, 재벌 뱃구레에 다 쳐넣어진다면,
그도 경제라 할 수 있겠습니까 ?

하니, 만약 이런 결과를 초래할 것을 기도하며 경제란 말을 선양하는 정치세력이 존재하고,
행여 국민들이 앞뒤 재지 않고 무조건 못 살겠다고 경제가 최고라고 외치며 달겨든다면,
필경은 이들에 다시 한번 동원되고 말 것이 아니겠는지요.

실제 저는 이명박후보의 경제관을 그리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걱정이 큽니다.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것 보면,
그가 50% 이상의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모두들 경제가 제일이라고 하며,
무작정 나서고 있는 것입니다.
진선미(眞善美)가 아닌 이친호(利親好)의 본의는 바로 이를 지적하고 있기도 합니다.
혹여 利란 글자가 들어가 이를 경제라고 외연을 넓혀 오독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가 있습니다.

조금 좁혀, 구체적인 예를 하나든다면
利란 사적 이익쯤에 해당됩니다.
이명박을 지지하는 사람들중에 사적 이익을 탐하여,
즉 국가경제가 어찌되던 나만 우선 살고 보자는 기대가 있지 않은가 싶은 것입니다.
이 때의 利는 경세제민의 적입니다.

이 利를 밝히는 이를 저는 소인배라고 부릅니다.
경제라는 엄숙한 말의 외투를 걸치고 실인즉 자신만의 사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들을
저는 소인배라고 내뱉어 말하길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투표하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이명박이 후보로 정해졌기에
만부득 투표장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가 아니라면,
눈 감고 누구를 찍어도 저의 수고가 충분히 하루의 값어치가 있으리란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 군자는 말씀하신대로 유유자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선 제가 생각하기에는 다산 정약용이 군자의 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지금 약속이 생겨서 급히 외출하여야 합니다.
해서 군자에 대하여는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다시 말씀드리지요.
하지만, 소인배의 대척점에 서 있는 군자란
국민의 고통을 외면하는 그런 위치로 표상될 정도의
한가로운 위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3/6] jjj IP xx.6x.1xx.x7    작성일 2007년10월21일 10시54분50초  
bongta님
자신의 이해관계를 넘어 선다는 것,,,,쉬운 일이 아닌것 같습니다.
이해관계에 얽매일때,,,인간은 포로가 되고, 자유를 상실합니다.
이해와의 싸움에서 이겨본 적은 없지만,,,지지는 않으려고,,,항상 그러한 대결을 도피하면서 살아온 느낌이 듭니다.
아.,,, 오히려 남자답게 까놓고 이해를 추구하는 편이 낳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수 없이 해 보았습니다.
이해의 문제는,,,,항상,,,,제로썸 게임이라는 측면이 존재합니다.
내가 이길려면,,,남을 다소 희생 시켜야 하는데...
내가 희생시킬 수 있는 사람은 항상 나보다 약한 사람들 뿐 입니다.
커다란 모순이지요.
개체의 운명을 타고난 이상 이 약육강식의 세계를 부정할 길은 없습니다.
아무리,,,win-win 논리로, 혹은 허구적인 자유시장이론으로 무장한다 하여도,,,
그 배후에는 차가운 개체간의 경쟁과 제로 썸 게임의 면모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겨도 곤란하고, 또 질수는 더더욱 없는 모순속에서....
항상,,,뒷전에서 숨어서,,,,,조용히, 조심스럽게,,,,피해서 비겁하게 살아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4/6] bongta IP 2xx.2xx.1xx.xx    작성일 2007년10월22일 14시18분53초 
진선미라는 말을 끌어들이며(引用) 그 대척점에 이친호란 자작의 어줍지 않은 말을 배치한 이상,
利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한정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해를 불러 일으켜, 몇마디 보탰습니다.
실은 이게 제 설명이 불충분했을 수 있겠지만,
저로서는 추가로 설명하는데 별로 흥이 나질 않습니다.
제 글이기에 책임을 져야하겠기에 성실히 임하기는 합니다만.

설명을 하다보면, 본글로 의도했던 초점을 벗어나
스스로 주석까지 달아야 하는 게, 조금 수고롭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게 예전에 제 글에 등장하는 여러 사례들이 인용이냐 동원이냐의 문제를 일으켰었고,
등장하는 한자를 두고도 친절하게 토씨까지 받쳐 service를 하여도
타박을 하시는 분들이 있었지요.
이러한 일들이 제 글쓰기의 한계이겠지만,
저는 이제 인터넷에 주석인지, 변명인지 덧대어 누덕누덕
글쓰는 짓에 흥미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부족한대로 이제 저 혼자 만족하고 싶은 갈등이 있기도 합니다.
더욱이 예전부터, 글쓰는 일이 욕됨을 더하고,
번뇌를 더하는 일이 아닌가 여겨져 문득 두려워질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제겐 글쓰는 것은 業을 짓는 일이며,
三毒을 분분히 허공중에 뿜는 일이란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

jjj님,

사적이익을 구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저 단순이 사적이익이라 말해버리고 말았습니다만,
말하고 싶었던 것을 더 좁혀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사적이익의 충돌, 갈등에 임하여 보이는 개인의 태도쯤 될 것입니다.

사적이라 할 때, 그게 개인對 개인에 한정되는 게 아닙니다.
인간對 동물, 인간對 자연... 등의 관계도 저는 함께 염두에 두었었습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멀쩡한 새만금 갯벌을 아작내며 내세운 것이 농토확보였습니다.
그런던 것이 이제는 첨단 운운하며 금융, 기업, 위락도시를 건설하자고 난리를 쳐댑니다.
게다가 골프장 100개를 건설하겠다며 기염을 토하는 작자도 있습니다.

참고로, 제가 골프장을 염오하는 것은 한국처럼 국토가 협소한 곳에서,
환경파괴가 심한 그런 시설이 마땅치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노정권 들어와서 이미 딱 곱절로 골프장이 늘었습니다.
그 밑에서 총리, 장관하던 사람들은 틈만나면 말하길,
한 사람은 300개, 또 한 사람은 100개씩 더 늘려야 한다고 외칩니다.
저는 다른 것은 몰라도 이런 외침을 용서하지 못하겠습니다.
요즘은 농토, 농업을 다 버릴 태세입니다.
(※ 참고 글 : ☞ 2008/02/26 - [소요유] - 골프유감)

어떤 작자는 멀쩡한 전국토를 배 갈라, 썩은 물 가두고, 배 띄어,
돈을 삼태기로 건져내자고 난리를 쳐댑니다.
인간이 자연을 막무가내로 유린하는 이 현장에 서서,
저는 인간이란 種의 자연을 향한 사적이익 추구의 추악함에 분노합니다.

동물들은 또 어떠합니까 ?
동물농장도 넘어 이제는 동물공장이라고 불리우는 현생지옥안에서 동물들이 철저하게
공산품처럼 유린 당하고 있습니다.
생명에 대한 物化,
동물들을 사물과 다름없이 여기는 메마른 영혼들의 달뜬 행진.
광우병, 조류독감은 동물들의 인간에 대한 단말마의 비명에 다름아니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인간이란 種의 동물을 향한 사적이익 추구의 악랄함에 분노하며, 슬퍼합니다.

제가 다니는 국립공원 등산 길,
쓰레기, 흡연, 라디오 소음...
저는 가을 바람을 듣고, 계곡 물소리를 느끼며, 낙엽이 깔린 길을 호젓하니 걷고 싶습니다.
라디오를 커다랗게 켠 채 올라오는 사람을 보면 참으로 울화가 납니다.
지적하였더니, 되돌아오는 대답이 “나는 라디오 소리 듣기를 좋아한다, 간섭 말라”
이 수준을 넘은 반응을 대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좁아터진 곳, 오골거리는 사람들이 오가는 등산 길목에서
제 사적 이익만을 취하는 저들에 저는 분노합니다.

지금 이명박이 내세우는 경제만능주의라는 것,
그리고 이에 경도된 사람들 역시
국립공원 안에서 흡연하고, 쓰레기 버리고, 소음공해 일으키며,
제 사적 만족만을 추구하는 천박한 사람들이 아닐런가 의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날 비오는 날,
화투짝 대신 제가 맞춘 패들은 실은 그 의심의 골패짝들입니다.

***

사적 이해들의 충돌과 갈등이 있을 때,
이를 조정하기 위해 룰이, 도덕률이 요청되지요.

우리가 흔히 싸울 때, “경우가 없는 것 같으니라고...”라고 말할 때,
동원하는 “경우”, “도리” 라는 것
이런 울타리 안에서 싸운다면,
jjj님의 지적하시듯 game을 zerosum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
즉, 자원의 합리적 조정 내지는 분배라고 불러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때 그 조정자로서 공권력, 법규, 도덕률, 게임의 규칙 등이 제대로 작동하여야겠지요.
그 안에서는 얼마든지 발가벗고 사내새끼들이 싸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
엎어지고, 깨진 놈은 일으켜 세우고, 다시 한번 씨름판위에 설 기회를 줄 수도 있고..
진,선.미에 대한 推考가 없는 한,
승자독식의 기대와 희망에 자신을 불지르는 욕망이 들불처럼 타들어갈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 경각심을 환기한 것이었습니다.
온 산하를 덮는 경제만능을 향해서 말입니다.

jjj님,
물론 저 역시 승자독식에 대한 기대란 달콤한 욕망과
패자불행에 대한 연민 사이를 오가며,
적절히 자기위안을 구하며
무력하게 할딱거리며 살고 있지 않다는 보증이 없습니다.

jaybid님의
“항상,,,뒷전에서 숨어서,,,,,조용히, 조심스럽게,,,,피해서 비겁하게 살아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말씀을 듣고 저는 jjj님이야말로 군자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氷心玉壺같은 정결한 마음을 뵈오니 덩달아 마음이 화해집니다.

저는 “경우없이”, “도리에 어긋나게”
인간이 자연, 동물을 착취하고. 타자를 억압하는 것을
뭉뚱거려 제나름대로 소박하니 “사적 이익”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진선미를 앞세우고 본글을 지은 이상 별다른 설명이 없어도
이리 이해되기를 예상한 것인데,
군자가 음풍놀월하는 사람의 상징이 되다시피한 독해에 당황스러워졌던 것이지요.
군자를 욕뵈인 것은 실은 저의 필력의 서투른 所以이기도 하니,
곧, 글쓰기의 욕됨 이러하지 않은가 말입니다.
하니 모두에 말씀드렸듯이 失德을 반성하며,
삼가는 도리를 찾아 올 겨울엔 養德에 힘쓸 계획입니다.
  [5/6] kkk IP 5x.1xx.2xx.1xx    작성일 2007년10월22일 22시51분11초  
저는 위 짝패를 흩뜨려 다시 선호와 손익의 짝패를 만들어봅니다.

예전에 증권회사 다니는 선배 형과 무교동에서 낙지볶음에 소주 한 잔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제가 뜬금 없이 선배 형에게 물었습니다.

"형은 귀신(영혼)이 있다고 생각해?"

"얀마! 그거야 뭐, 돈이 되면 있는 거고, 아니면 없는 거지"

그래서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난 사람들이 개인적 선호에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하는데, 형은 어때?"

"돈만 되면 다 움직이게 돼있언마"

"그럼 형은 사람들이 손익에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거네"

"일테면, 그렇지"

.......

선호냐, 손익이냐.

돌이켜 보면, 그날은 술에 취했던게 아니라, 서로 자기의 주장에 취했던 것같습니다.

선배 형의 말로는 증권회사에 있다 보면, 별별 돈에 미친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고 합니다. 임직원들도 돈에 미치기는 매 한 가지라고 합니다. 그런 선배 형의 입장에서라면, 손익이 사람을 움직이게 만든다고 쉬 결론내리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도 한 때는 10억 이상의 이득이 확보되는 불법, 비리라면, 변호사 비용 1억(+알파) 을 주고도 9억은 남는 장사이니, 만일 그런 기회가 온다면, 주저 없이 해치우리라 하고 맘먹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럭하고도 내가 과연, 여생을 맘 편히, 적어도 내 자신의 삶에 떳떳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면, 또 해치우기가 쉽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는 선배 형에게, 자신에게 선택의 전권이 주어졌을 때, 삶의 기회가 여전히 남아있음에도, 그 삶을 돌아보지 않고 죽음의 길로 나아가 그 뜻을 세우고, 또 널리 알리고자 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 데, 이런 사람들은 과연 손익에 따라 움직이느냐고 물었었고, 선배 형은 그런 사람들은 의(義)을 꼿꼿이 펴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다시 묻기를, 그럼 형이 말하는 손익은 개인적 손익이 아닌 거네 하니까, 형이 대답하길, 얀마! 그거야 지 개인이 그렇게 판단했으니까 개인적인 게 맞지 라고 하길래, 내가 다시 말하길, 판단과정은 개인 내에서 이루어졌지만, 그 판단을 내리는데 고려한 내용은, 즉 그가 고려한 의(義)는 그가 죽고나서야 온전히 이루어지는 거니까 그 이득(결실)은 더이상 그 개인이 누릴 수 없는 건데, 과연 이 경우에도 개인은 손익에 따라 움직인다고 할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그런 경우에도 개인의 선호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가능하지 않느냐고, 그는 자기자신을 위해 그걸 더 선호했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

인도의 거지들은 그에게 동전을 던져주는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뭐 이런저런 설명이 따르는 데요. 제가 확실히 아는 바가 없으니 그냥 제 생각만 말하면, 그들은 그때 적선자가 그냥 동전을 던져주기를 더 선호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은 아닐까 하고 짐작해 볼 뿐입니다. 그 적선자는 그때 그 거지의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외면하고 발길을 돌리면 몸은 돌아서 갈 지 몰라도 마음은 내내 그 거지의 눈동자에 박혀 쉬 빠져나올 수 없다고 생각한 건 아닐까요. 그래서 그 눈동자에 박힌 자기의 마음을 뽑아오기 위해 그 댓가로 동전을 던져주는 것은 아닐까요.

별것도 아닌 짝패에 해설이 너무 길어졌네요.

고맙습니다. bongta님
이런 재밌는 짝패놀이!
진작 좀 가르쳐주시지.
덕분에 심심파적은 했습니다.
  [6/6] bongta IP 20xx.2xx.1xx.xx    작성일 2007년10월23일 20시15분42초 
kkk님/

정치의 세계를 놓고보면,
과거엔 무력, 반란 등을 통해 정권을 잡지만, 후엔 국민들을 향해 예의도덕과 정의를 외치며 흩트러진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습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서는 도덕, 정의를 선전하며 집권하지만, 종국엔 이익, 권병을 지키기 위해 곧잘 변절하곤 합니다.

선호, 손익을 말씀하시니, risk lover로서의 인간형이 떠오릅니다.
위험을 무릅쓰므로서 자신의 선호를 끝까지 추구해 나가는 인간형,
보통 역사에서는 그 과업이 성공한 이들은 영웅호걸, 실패한 이들은 난신적자라고 부르지요.
그리고 역사는 시비를 떠나 대개 이런 사람들에 의해 이끌려왔습니다.
특히 역사가 한 구비 돌아가는 길목에선
결코 도덕률에 의해서 새 길이 열려지지는 않았던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risk aborter들이라고 하지만,
실제 이들이 利害의 아귀다툼엔 더 민감하기도 합니다.
그게 쪼잘해서 걱정이지...
적어도 나라를 통째로 먹자는 게 아니라,
기껏 제 집 울로 넘어온 옆 집 밤나무 가지에 달린 홍시가 내것이냐 네것이냐로 다투는데 더 진지합니다.
하기사, 이런 것은 자신의 모가지를 거는 게 아니니까, 사뭇 재미있기도 합니다.
risk aborter들은 실인즉,
요런 잔 재미 때문에 세상을 아까와하며, 이승의 자리를 쉬 떠나지 못하는 양 싶습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당태종쯤 되던가요.
화려한 깃발을 휘날리며 수많은 배들이 강위에 떠 있었습니다.
그 왕이 참 배도 많다고 감탄합니다.
이 때 곁에서 시종하던 어떤 중이 말하길,
“소승 눈에는 단 세가지 이름의 배만 보입니다.”
“그게 무엇인고 ?”
“명예, 재물, 권세란 깃발을 단 배, 오로지 그 셋만 보이옵니다.”
(* 취의는 비슷하나, 내용이 정확치 않습니다. 나중 제대로 알게되면 고지없이 바로 잡겠습니다.)

선배라는 분은 대단한 분인 것 같습니다.
돈이란 코드 하나로 세상을 그리 찰찰히 거량하는 것 보니,
더불어 술자리로 모셔 청할 법한 양반 같군요.

그 분이 증권회사 다니신다고 하니,
생각난 김에 제가 연구한
주식투자 기술적분석이론 중 하나를 조만간 본 글로 올려보겠습니다.
저 역시 利를 완전히 여의고 사는 군자는 못되는 즉,
자락 끝을 짐짓 제 발로 밟아, 自服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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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묵은 글 : 2008. 2. 21. 09:3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