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링컨의 얼굴

소요유/묵은 글 : 2008. 2. 27. 10:02



거미 꽁무니에 실 달고 미끄러지듯
인연의 말들 바람개비 삼아,
고샅길을 씽하니 달려가고자 합니다.

링컨의 말중에 “40대의 얼굴은 자신이 책임 져야한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이 대단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말도, 글도, 얼굴도 그 사람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당나라 때, 인재 등용의 기준이었다는 신언서판(身言書判)에서
신언서는 모두 겉으로 드러난 것들입니다.
하지만, 판(判)에 이르러 조금 그 사람의 본바탕에 다가가긴 합니다.
이게 당나라 때 실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판(判)을 저는 文心, 文理 정도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작자가 동일한 글들이 여기 있다 해봅시다.
하나의 글을 보면 제법 그럴 듯합니다.
하지만, 글 두 개를 보면 글들이 상호 제 존재를 배신하는 것을 목도할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개별 글 하나 하나의 文理라는 게 얼마나 미덥지 못한 척도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한 사람의 인격은,
그의 글, 말이 아무리 미려하고, 뜻이 바르게 서있다한들 그 글, 말로서
온전히 파악되지 않습니다.
나아가, 당장 현재는 글들이 일이관지 통일된 文心을 길어내고 있다 하여도,
어느 날, 전격 뒤집혀져 다른 모습으로 불쑥 나타나기도 합니다.

전문 글꾼도 아니 그런 것은 아니지만,
특히 일반 사람이 쓴 글인 경우,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글들을 역사적으로 시리즈로 읽다보면
이와 유사한 사례가 적지 않게 목격됩니다.
아주 재미있는 구경거리입니다.

그러하니, 글로 소통한다라는 말을 저는 믿지 않습니다.
그것이 부득이한 현실제약조건이라 할지라도, 아니 그러하기 때문에 더욱더
저는 글과 말을 믿지 않습니다.

때문에 저는 늘 말하듯이,
글로서 소일할 따름입니다.

제 글에 등장하는 혹간의 분노니 슬픔이라는 것은 저의 글쓰기 장치에 불과합니다.
이를 현실세계에서, 제가 실제 악마구리로 화내고,
울부짖는 것으로 독해하는 어리석은 이도 있을 것입니다.
제 사술(詐術)에 코가 꿰인 그들이 있다면, 못내 가엽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글이나, 말은 허울에 불과합니다.
저는 이들을 빌어,
그저 어슬렁 소요유(逍遙遊)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당 서정주는
한 때 시인의 자리를 꿰차고 맘껏 세상을 휘저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글로 친일하고, 일신의 안일을 도모하였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저자와 텍스트'를 분리하라고 세상을 향해 주문합니다.
저자없는 텍스트가 없겠지만,
시는 시로서만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저들의 스승을 한껏 변호하고 있습니다.

시와 시인은 별개라는 저들 무리와,
저의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

미당의 무리들은 텍스트에 책임이 없다고 하였지만,
그 텍스트를 빌어 나라를 능욕하고, 동포를 유린하였습니다.
또한, 그로서 제 자신의 영달과 안일을 구하였습니다.
백번 양보하여,
시와 시인이 별개라한들,
지조를 버리고, 시를 빌어 제 사적 이익을 꾀한 책임은 져야하지 않겠습니까 ?

저는 제 자신의 텍스트에 책임을 집니다.
하지만, 남의 글에 큰 기대를 걸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기대가 무용이라는 것을
미당이 바로 증거하고 있지 않습니까 ?

남의 글을 대함에,
제 글과 마찬가지로 더불어 소일할 따름입니다.
기대가 없는만큼 오히려,
텍스트를 밑바닥까지 투명하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저의 소일이라는 것을 혹 독해할 때,
무책임하게 놀아나겠다라고 여길까 저어되는군요.
이는 남의 글에 기대어,
자신의 소망을 길어올리거나,
커다란 기대를 하지 않겠다라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방식대로 평가하고, 소비하고,
씹고, 뱉어 버리고 할 따름인 것입니다.
남의 글은 시비, 미추, 선악을 떠나,
저 강을 건너가기 위한 그저 나룻배같은 것입니다.
이러저러한 수많은 배가 있습니다.
옮겨 타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고, 취하기도 하며...
그 개개에 집착하지 않겠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즉 저는 소요유(逍遙遊)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사, 어떤 사람의 글에서 본 것처럼,
인터넷상의 익명의 글이나 말을 가면이라고 하면서도,
이게 외려 더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어떤 이가 있다면,
그럼 소신대로 거기에 충실하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가면을 쓰고서,
상대를 배려하고, 다른 이에게 힘을 보태야 한다고 기대를 하고 있다면...
그가 선량한 것만은 인정하겠지만,
저라면, 차라리 가면을 시원스레 벗어던지고 현장을 떠나라고 권하고 싶군요.
가면 무도회에 참석해서 너의 진면목을 내놓아라고 주문한다든가,
자비와 자선, 평화를 구하는 따위의 행위는
사뭇 어처구니 없어 보이는군요.

아니 그렇습니까 ?
맨 얼굴도 신뢰를 하지 못하는 형편인데,
가면씩이나 쓰고 나타난 사람들에게 도대체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단 말입니까 ?
가면 무도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공덕은 각기 그 탈바가지 역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작년에 강령탈춤 공연을 본 적이 있습니다.
미얄이면 미얄, 취발이면 취발이 그 역에 충실한 것이 한결 재미있는 노릇이 아닐까요 ?
언제고 놀이마당이 바뀌어,
미얄이가 취발이가 되고, 취발이가 미얄이 역으로 될 수도 있지요.
그렇다면 그 땐 그대로 즐기면 될 것입니다.
그 탈 안에 나인 나, 그 양심이 변탈(變脫)되지 않는 한,
바뀐 역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
말, 글이란 게 어차피 가면이요 허울인 한,
거기서 기대할 바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고 구하는 것은
연목구어인즉 자기 강박이 아닐까요 ?
次에 각주구검도 아니요,
망망대해에 부표 던져 두고 돌아와서는 그게 한곳에 그대로 있기를 기대하겠습니까 ?

저처럼 그저 노는 것이 남는 것입니다.
때로는 흉한 놈한테 주먹감자도 멕이고,
위선 떠는 놈에게 심술도 부리고,
고상한 척 조빼는 인사에게 똥물도 뒤집어 씌우고 말입니다.

기꺼우면 헌화도 하고,
상찬도 해가며, 얼쑤 부추기며 농하며,
한바탕 걸지게 노닐기도 하면 이 또한 좋은 하루입니다.

게다가 사실이라 부르는 것도 허망한 노릇임에랴.
Heisenberg의 불확정성 원리(The Uncertainty Principle)은 과학의 이름을 빌어
반과학적(?)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하였지요.
마찬가지로, 괴델Godel의 불완전성 정리(The Incompleteness Theorem) 역시 수학의 힘을 빌어
불완전한 수학을 수학적으로 증명했습니다.
이 둘은 인식론적으로 어떠한 사유 체계도 완벽할 수 없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실이니 관점이니' 이리 나누어 사물을 대하는 것이야말로,
실로 허랑되고 우스운 노릇입니다.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관점입니까 ?
솔직히 말한다면,
자신이 말한 것은 사실이고,
남이 말한 것은 관점이길 희망하는 것 아닐런지요 ?

되돌아와,
다시 추려 환언하면,
저는 얼굴, 글, 말들에 깊은 신뢰를 두지 않습니다.
제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때문에, 저는 낯데기나, 글, 말로 짓는 인연에 얽매이고 싶지 않습니다.
한 때, 분노하고 슬퍼하였다한들,
그 때는 그 때일 뿐,
당시 그가 그이고, 저가 저일 뿐,
이에 깊은 의미를 길어올리고자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는 제가 성실하지 않게 인연을 대한다라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제가 지은 인연을 먼저 배반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 양심에는 충실하지만,
타자의 양심엔 의지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

다른 사람의 어깨까지 밖에 오지 않는 난장이 순우곤이었지만,
제나라에서 삼대를 봉사하며, 천하를 쥐락펴락하였습니다.
그러하니 身이란 그리 충분한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황인경 저 목민심서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士庶人이 相法을 믿으면 그 業을 잃게 되고,
卿大夫가 상법을 믿으면 그 벗을 잃게 되고,
임금이 상법을 믿으면 그 신하를 잃게 된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얼굴로써 사람을 취했더라면 子羽 같은 사람을 잃었을 것이다.'
하였으니 과연 성인이로다."

이 자우에 대하여, 한비자(韓非子) 현학편(顯學篇)에서는
용모가 오히려 바뀌어 그려지고 있습니다.

“담대자우(澹臺子羽)는 군자다운 용모라 공자가 그를 취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함께 있어 보니, 행이 그 용모를 감당치(어울리지) 못했다.
재여는 언사(言辭)가 우아하고 문채(文采)로웠다.
공자가 이를 보고 그를 취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함께 지내다 보니 지혜가 그 언변을 채우지(충당치) 못했다.
그러므로 공자왈,
"용모로써 사람을 취할까 ?"
"자우(子羽)에게서 그르쳤다."
"언변으로써 사람을 취할까 ?"
"재여에게서 그르쳤다."

《韩非子·顯學篇》曰:澹臺子羽,君子之容也,仲尼几而取之,与处久而行之不称其貌。宰予之辞雅而文也,仲尼几而取之,与处而智不充其辩。故孔子曰:“以容取人乎?失之子羽;以言取人乎?失之宰予。”

공자와 같은 성인일지라도 사람을 잘못 볼 수 있으니,
이로 미루어보아도 사람의 얼굴, 말주변 등으로 사람의 됨됨이를 평가한다는 것이
실로 가당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비자는 술(術)로서 인재를 시험하고, 조정하여야 한다며, 
그 구체적인 방법을 책 한비자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 그런데, 사기나 소학 등에서는 자우는 못 생긴 이로 칭찬을 받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한비자의 이 글과는 정반대인데, 그렇다하여도 전하고자 하는 뜻은 양자 변함이 없다.
재여의 경우에는 논어의 후목분장(朽木糞牆)의 고사에서 보듯이,
나태한 인물로 그려져 공자에게 꾸지람을 받는다.)

비록 소설이지만, 박씨부인전에 나오는 박씨도 천하 박색이지만
남편을 출세시키고, 나라를 구합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링컨이 말하는 얼굴 책임론 따위는
감히 말하건데 얼마나 경박한 노릇입니까 ?

흔히들 말인즉슨 의젓하니 소통을 기한다고 하지만,
그게 소통이란 증거도 그리 명확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소통이란 이름을 빌어 소란을 꾀하거나,
아니면 곡지통 터뜨리며 하소연을 풀어놓기도 합니다.
실인즉 제 이해에 복무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 의심하곤 합니다.

옛말에 "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습니다.
항차, 글로서, 얼굴로서 무엇을 알 수 있겠으며,
나아가 소통을 바라고자 합니까 ?

밤에 북풍 불고,
낮에 한설 내리는 현장에서
명주실로 조동부리 칭칭 동여맨 듯 일언반구 토해내지도 않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삼동 지난 명년 해토머리 봄녘이 되어서야,
섬섬옥수 내어 이맛전 짚으며 눈살 고이 찌푸리고,
봄 아지랑이가 어찔거리는 것이 흉하다고 탓합니다.

(※ 어떤 사람이 문제의 현장에선 제 몸 사리며, 일언반구도 없다가,
뒤늦게 나타나 시비를 가르는 사람한테 도리어 탓을 하는 경우. )

이런 경우,
상갓집에서 한참 신나게 울다가 누가 죽었는냐고 묻는 사람은
차라리 예민하다고 일러야 할 것입니다.
늦었지만, 최소한 제 체면은 챙기려고 애쓰고 있지 않은가 말입니다.

저는 소통을 믿지 않습니다.
때문에 소통이 아니라 그저 소일하고자 할 따름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묵묵히 계시는 다수의 여러 분들을 저는 기억합니다.
그분들에게 사랑과 행운이 있기를 빕니다.

소통-소란-소일
한 때, 三笑同樂이었을지라도,
나이 먹어가며 진작에 깨달았듯이,
이미 외나무 다리에서 나비베(蝶布:이혼의 증물) 찢어 그날을 새겼음이니,
이제사, 어찌 옛 결연(結緣)에 다시 연연(戀戀)하겠는지요 ?

저는 그저 외톨인 채, 소일, 소요유하고자 합니다.

***

여기 미당의 시를 소개한다.


국화 옆에서


서정주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다음은 전두환 예찬시입니다.


처음으로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새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잘 사는 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물가부터 바로 잡으시어
1986년을 흑자원년으로 만드셨나니
안으로는 한결 더 국방을 튼튼히 하시고
밖으로는 외교와 교역의 순치를 온 세계에 넓히어
이 나라의 국위를 모든 나라에 드날리셨나니
이 나라 젊은이들의 체력을 길러서는
86아세안 게임을 열어 일본도 이기게 하고
또 88서울올림픽을 향해 늘 꾸준히 달리게 하시고
우리 좋은 문화능력은 옛것이건 새것이건
이 나라와 세계에 떨치게 하시어
이 겨레와 인류의 박수를 받고 있나니
이렇게 두루두루 나타나는 힘이여
이 힘으로 남북대결에서 우리는 주도권을 가지고
자유 민주 통일의 앞날을 믿게 되었고
1986년 가을 남북을 두루 살리기 위한
평화의 댐 건설을 발의하시어서는
통일을 염원하는 남북 육천만 동포의 지지를 받고 있나니
이 나라가 통일하여 홍기할 발판을 이루시고
쥐임없이 진취하여 세계에 웅비하는
이 민족기상의 모범이 되신 분이여!
이 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

-서정주(1987. 1) /


 

다음은 친일시 입니다.

오장 마쓰이 송가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印)씨의 둘째 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
정성껏 만들어 보낸 비행기 한 대에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
소리 있이 벌이는 고흔 꽃처럼
오히려 기쁜 몸짓하며 내리는 곳,
쪼각 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
수백척의 비행기와 대포와 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같은 병정을 싣고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어러 온
원수 英米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리쳐서 깨졌는가......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 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한결 더 짙푸르런 우리의 하늘이여


- 서정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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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묵은 글 : 2008. 2. 27. 1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