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나변(哪邊)?

소요유 : 2013. 3. 7. 16:10


법정의 책 무소유가 유지에 따라 절판이 되려 하자,
사람들이 이를 구하려고 법석을 떤 적이 있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실상사 도법은 법정의 무소유를 비판하였다.

우리 집엔 무소유가 두 권이 있다.
처가 가지고 온 것 하나, 그리고 내게 있던 하나.
법정이 돌아가시자 나는 무소유를 다시 꺼내 읽었다.
갑자기 두 겹으로 울 두른 부자가 된 느낌이었으나 나는 불경스럽게도
이 책을 뒷간에서 다 읽어내었고나.
그 인연 따라 요즘에 일기일회(一期一會)란 그의 책을 읽고 있었다.
아직 다 읽지는 못하고 조금 남겨두었는데 아마도 내년이나 되어야 마칠 수 있겠다.
서울 집에 놔두고 어제부로 시골로 내려와 있으니 말이다.

도법과 법정은 가는 길이 달랐던 것이다.

세상은 온갖 추하고 더러운 것으로 일용할 양식의 본을 삼는다.
연꽃이 더러운 진흙에서 꽃을 피우듯,
오탁악세(五濁惡世)의 예토(穢土)를 살아가면서,
어찌 진흙을 외면할 수 있으랴?
아니 진흙의 더러움이 있기에 곧 연꽃을 피울 수 있는 것.
연꽃을 못 속 진흙에서 떠서 지상의 고운 흙에다 심으면 이내 죽고 만다.
도법은 한 때 선에 일로매진하여 단박에 부처가 되길 꿈꾸었다.
하지만 이 길을 마다하고 뛰쳐나와 온 몸을 더러운 진흙 밭에 부렸다.

하지만, 이 분도 최근 자승을 대하는 태도를 보니 상당히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다.
오늘은 다른 이야기에 집중하여야 하니 이는 잠시 접어 두기로 한다. 

법정은 무소유란 책을 남겼지만 사실 그처럼 부자도 없다.
애써 부를 일구려 노력한 바도 없으시면서 ‘무소유’ 인세만으로도 거만금을 거둬들였다.
물론 그 인세는 장학 자금 등으로 사회에 모두 환원 되었지만 말이다.
그 뿐인가?
기백억 대원각 요정도 온전히 접수하여 지금은 길상사로 변신하였다.
따지자면 법정처럼 부승(富僧)도 없다.
그는 지금 한 올 연기가 되어 하늘가로 사라져버리고 없지만,
그가 주창한 무소유 그 본뜻은 여하간에,
그의 주위에 세간의 영화와 부를 불러들이지 않았던가?
이게 그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리 된 셈이다.

그런데 말이다.
만약 일개 필부가 하나 있어 ,
법정의 뜻을 본받아 그리 무소유를 주창하고 살았다면,
과연 그처럼 부를 일굴 수 있었으랴?
아마 지금쯤 삼시 세끼 밥을 고이 먹기도 힘들지 않았으랴?

맹자는 왕과 맞대면 하고 꾸짖으며, 천하를 거칠 것 없는 대장부로 살았다.
벼슬자리도 마다하고 마음껏 제 할 말을 다하고 살았음이다.
하지만, 그는 제법 그럴 듯하니 살림살이가 차고 넘쳤다.

만약, 여기 장삼이사 하나가 있어,
맹자처럼 호기롭게 세상을 거칠 것 없이 살았다면,
지금쯤 아마도 어느 누군가에게  맞아 죽어,
개골창에 해골을 누이며 썩어가고 있을 것이다.

장자가 복수가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었는데, 초왕이 대부 두 사람을 먼저 보내 이리 말한다.

“바라건대 나라 일을 보아주십시오”
장자는 낚싯대를 잡은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한다.
“내 듣건대 초나라에 신령스런 거북이 있어 죽은 지 이미 삼천년이라,
비단 상자에 넣어 묘당에 모셨다 하더이다.
이 거북은 차라리 죽음으로써 뼈다귀가 귀히 되길 바라겠소?
차라리 살아서 진흙탕에서 꼬리를 끄는 게 낫겠소?”
두 대부가 말한다.
“차라리 살아 진흙탕물에서 꼬리를 끄는 편이 낫지요.”
장자가 말한다.
“돌아가시오.
나는 장차 진흙에서 꼬리를 끌겠소이다.”

莊子釣於濮水,楚王使大夫二人往先焉,曰:「願以境內累矣!」莊子持竿不顧,曰:「吾聞楚有神龜,死已三千歲矣,王巾笥而藏之廟堂之上。此龜者,寧其死為留骨而貴乎,寧其生而曳尾於塗中乎?」二大夫曰:「寧生而曳尾塗中。」莊子曰:「往矣!吾將曳尾於塗中。」

장자는 법정이나 맹자 또는 도법과는 또 다른 경지를 노래하고 있다.

법정이나 맹자류는 세상에 벗어나 세상을 한껏 나무라고 경계하고 있음으로써,
그의 맑은 뜻을 지키며 애오라지 법답고, 실다운 삶을 살아간다.
도법은 그 진흙탕물에 들어가 함께 뒹굴고 아파하며 고락을 함께 한다.
하지만, 장자는 세상일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아, 무위자연 여유롭게 소요유하고 있는 장자라니.
얼핏 이 장면에 이르면 양주(楊朱)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옛사람은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을지라도,
내 터럭 하나인들 덜어내 주지 않는다.
(또한) 온 천하를 맡긴다 하여도 취하지 않는다.
사람 하나하나가 제 털 하나를 덜어내지 않고,
천하를 이롭게 하려 하지 않는다면,
천하는 (절로) 다스려 진다.

古之人,損一毫利天下,不與也,悉天下奉一身,不取也。人人不損一毫,人人不利天下,天下治矣。

세상 사람들 중엔 가끔 맑고 향기로운 듯 세상을 걱정하지만,
양주는 외려 자신에 철저함으로써 세상을 화평하게 한다.

양주를 무단히 이기주의란 혐의를 덮어씌우기엔 온당하지 않은 구석이 보이지 않는가?
그러하기에 양주는 도가(道家)로 보아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많다.

왜 아니 양주만 생각하고 말리,
저 장자의 말씀 앞에 서면 의당 허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세이어영수지빈(洗耳於潁水之濱)의 고사에 등장하는 허유 말이다.
요(堯)가 천자의 위(位)를 은자(隱者)인 허유(許由)에게 물려주겠다고 하자,
허유는 귀를 더럽혔다고 영수(潁水)가에서 귀를 씻었다. 
이 때 소부(巢父)가 소를 앞세우고 지나고 있었는데,
그는 허유가 귀를 씻은 더러운 물로 소에게 물을 먹일 수 없다며,
강물 상류로 소를 끌고 올라가 물을 먹였다.

이제 여기에 이르러서는 마지막으로 유마를 등장시켜야 한다.
애초, 도법은 불도를 닦는 이이니 당연 유마를 그려 사모하지 않았으리오?

난, 도법에 귀의한다.
南無道法.
 
유마는 어떠한 분인가?
 
유마가 아프자 부처는 아난을 불러 그를 문병하도록 분부한다.
그러자 아난은 예전의 일을 상기하며 극구 사양한다.

예전에 부처가 아프실 때,
잡숫고 기운을 차리시라 아난은 우유를 얻으려 탁발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유마가 그 광경을  보고 아난에게 이리 타이른다.
“부처는 금강석 같은 몸으로 악을 끊고 선을 빠짐없이 지니셨는데 어떤 병이 있겠는가?
아난아, 부처를 비방하지 말라, 만약 외도가 이 말을 들었다면 어떻게 스승이라 여기겠는가?
제 병도 고칠 수 없는데 남의 병을 고칠 수 있겠는가?”
이 말을 듣자 너무 부끄럽고 죄송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공중에서 이런 말이 들렸습니다.

阿難。如居士言。但為佛出五濁惡世。
現行斯法。度脫眾生。行矣。阿難。取乳勿慚。
世尊。維摩詰。智慧辯才。為若此也。
是故不任詣彼問疾。

"아난아, (유마) 거사의 말과 같다. 
다만 부처는 이 오탁악세에 나오셔서 실제 이법을 행함으로써 중생을 건져내기 위해서 행하고 계심이라.
아난아, 부끄러워하지 말고 우유를 가져가거라."
세존이시여, 유마힐은 지혜와 변재가 이처럼 대단합니다.
그러므로 그를  찾아 문병하는 것을 맡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러하던 유마이건데,
그는 중생이 아프기 때문에 자신도 아프다고 이르셨다.

일체 중생이 병에 드니, 이런 고로 나도 병이 들고,
일체 중생이 병에서 나으면, 내 병도 멸하리.

以一切眾生病。是故我病。若一切眾生得不病者。則我病滅

도대체가,
세상에 이보다 더 절절 가슴 아픈 말씀을 나는 더는 들어보지 못했다.
南無維摩. 

유마는 비록 위격이 佛이 아니어나 佛과 다름이 없다.
대승불교는 보살의 삶으로써 여법(如法)하니 부처가 된다.
아니 중생을 여윈 부처란 애시당초 상정이 아니 된다.

이 더럽고 욕된 세상 외에 별 것, 별 다른 세상이 따로 있음이 아니라,
피고름 적나라한 이곳에서 당신도 아프다고 말씀하시고 계시다.

법정, 성철이 감히 따라올 수 없는 경지가 여기 있다.
도법이 제법 흉내를 내려하셨음이나,
지금 그는 진흙 구덩이에 빠져 겨우 콧구멍만 빠끔히 내고는 숨을 헐떡이고 있고뇨.

유마는 일체 중생이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병의 구덩이에서 건져내려고,
불신이 되고자 하였음이다.

欲得佛身斷一切眾生病者。

미륵이여, 천자들로 하여금 보리를 분별하는 마음을 버리게 하여야 합니다.
왜인고 하니, 
보리는 몸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며, 마음으로도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彌勒。當令此諸天子。捨於分別菩提之見。
所以者何。菩提者。不可以身得。不可以心得。

그러하기에 몸으로 아프지 않고, 마음으로 병이 들지 않으면,
부처는 거짓이다.

도법의 다음 말씀을 다시 새기며,
그를 용서하기로 한다.
아니 내가 감히 용서를 할 자격이나 있나?
나는 다만 내 몸 가축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음이 아니더냐?
정작은 그를 애달피 사랑하고 있다 일러야 하리.
그의 세상을 향한 멱살잡이를 뜨겁게 응원한다.

아무렴,
아래 인용하는 말씀은 내가 늘 하던 말이기도 하다.
이 말씀의 진의를 깨닫지 못하면 억겁의 불사를 드려도 청맹과니 당달봉사를 면치 못한다.
그의 성불을 빈다.

도법 스님은 법정 스님이 대중과 부대끼지 않고 멀찌막이 떨어져 살면서 당신이 본 세상이나 생각을 아름다운 글로 풀어냈기 때문에, 수행자 삶은 마치 똥오줌은 없고 아름다운 꽃과 향기만 있어야 한다는 막연한 기대를 대중들에게 품게 만들었다고 말씀을 잇는다. “대중들은 수행자란 추한 똥도 역한 똥냄새도 없이 아름답고 향기롭기를 바랍니다. 법정 스님은 그렇게 사셨어요. 글에 드러나는 모습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법정 스님만이 진짜 스님이야. 고결하고 향기로워. 스님은 그래야 해’라는 환상이 만들어졌죠. 그 틀에 맞추면 다른 스님들은 너무 아닌 거죠. 그래서 실망하고 불만을 갖고 화를 내잖아요. 성철 스님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저는 오년 동안 해인사 강원과 선방에서 살았는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성철 스님은 별로 매력 있지 않습니다. 물론 그 어른이 불교를 보는 안목은 저보다 훌륭하다고 할 수 있지만, 어떤 논리로도 수긍이 가지 않는 불합리한 점이 많아요. 다만 그 분이 깨달은 어른이고 선지식이니까 비록 제 이성과 사유로 이해되거나 수긍이 가지 않는다하더라도 제 능력으로 볼 수 없는 더 심오한 뜻이 있겠지 하는 차원에서는 모르겠지만, 승복되지 않는 점이 많아요. 그렇지만 그 분은 신화가 되셨잖아요. 세속을 멀리하고 은둔했기 때문에 세상에 오염되지 않아 청정하다는 환상이 만들어졌고, 그 어른이 검정고무신과 누더기로 상징되어지는 무소유도 본의가 어찌되었던 대중들한테 비쳐질 때는 법정 스님처럼 고결하고 담백한 꽃으로서 출가수행자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환상을 떠올리게 했죠. 그렇지만 실제 삶에서 과연 그게 가능할까 하는 문제입니다. 어쨌든 그 어른들도 밥도 먹고 옷도 입고 불도 때고 사셨잖아요. 성철 스님은 해인사, 백련암에 사셨고 법정 스님은 송광사, 불일암에 사시다가 길상사에도 계셨는데, 해인사, 송광사, 길상사 이 절들이 돌아가니까 성철 스님이나 법정 스님 삶이 가능했죠. 그러면 백련암이나 불일암이 돌아가도록 하는 힘은 뭐겠어요? 들여다보면 돈 백 원 벌려고 땡볕에서 땀 흘리고 추위에 떨고, 이른 새벽에서 늦은 저녁까지 사하촌(寺下村) 거리에서 나무 팔고 감자 판돈이 들어와서 절이 운영된다는 말이에요. 또 절을 운영하려고 기복(祈福)이나 상업 수완을 끌어들이잖아요. 이곳을 저는 혼탁한 연못이라고 봅니다. 이 바탕에서 길상사도 돌아가고 불일암도 돌아가고 해인사도 돌아가고 백련암도 돌아가잖아요. 과연 그 분들 고결함과 향기로움이 혼탁함을 떠나서 존재할 수 있었겠어요? 그런데 현실은 모든 영광은 성철 스님이나 법정 스님한테 가고 모든 비난은 상업화되고 기복으로 몰고 가는 절을 운영하는 사람들한테만 쏟아지잖아요.” 침대에 사람을 맞춘답시고 팔다리를 잘라내는 테세우스 침대처럼, 누구라도 환상으로 만들어낸 기준에 맞지 않으면 멋대로 재단하고 도리질을 치는 세태를 꼬집는다. 똥냄새 없이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나고 향기가 풍겨날 수 없는데, 똥냄새 없이도 꽃이 피고 향내가 날 수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지면 결국 실제 삶이 왜곡되고 많은 사람들이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비판 없는 존경은 맹종일 수밖에 없고, 또 존경 없는 비판은 비난과 매도가 될 위험성이 높아 냉철한 비판과 진지한 존경이 늘 함께 가야만이 바람직하다는 말씀이다.

(출처: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2978 )

저 두터운 글체의 내용을 대하자면 이제 또 다시 경허의 맏상좌인 수월(水月) 스님 일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은 연환쇄(連環鎖)일런가?
앞잡이가 뒤잡이를 연달아 꾀어 불러내고 있고뇨.

경허의 맏상좌 수월(水月)이 절 밑의 자갈밭을 일구어서는 헐값에 팔곤 했다.
그 때 대중이 나서 물었다.
“스님 왜 손해나는 장사를 하십니까?” 
그러자 수월은 이리 말했다.
“밭을 산 사람은 헐값에 밭이 생겨서 좋고,
 나는 그 돈으로 또 밭을 하나 더 일구니 이득이 아닌가!”

절 살림이든, 세간 살림이든 이리 삼년 아냐 단 이태만 지내도,
당장 가솔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배를 곯아야 하리라.

하지만 절 살림이 아무런 어려움 없이 굴러가는 까닭은,
대중들의 불사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수월은 저로 인해 천고의 영화를 얻었으되,
갖은 노역은 대중들에게 떠넘겼음이고뇨. 

법정의 무소유처럼, 그는 마음으로 무소유를 주창하셨지만,
현실에선 그 덕에 낙양의 지가를 높였다.
또한 도법의 따가운 주장처럼,
절 살림을 받쳐주는 수많은 신도들의 보시가 한 몫을 하지 않았음인가?

만약 이것을 사악하게 되 뒤집어 들기로 한다면,
우리는 병가(兵家)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저를 노려 의도적으로 고상한 척, 착한 척 위장하고,
인심을 사고, 돈을 끌어들여 취하고는 제 허갈진 배를 채운다.

내가 보기엔 당금의 절집들은 하나 같이,
이로써 떡을 빌고, 돈을 얻어다 쓰고 있다.

그럼 과연,
그대가 가는 길은 어느 나변(哪邊)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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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 : 2013. 3. 7. 1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