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황희-일리-삼리

소요유 : 2008. 2. 23. 15:14


황희정승 하면 청백리의 표상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그저 야사 수준에서 알려진 것에 불과하다.
‘조선왕조실록’ 등의 사료를 보면 세종의 총애 아래,
오래도록 관직생활을 유지하였을 따름이지,
실제는 부정부패를 적지 아니 저질렀음을 알게 된다.

사위가 저지른 살인 사건을 무마한다든가,
뇌물로 토지를 받고, 벼슬 내려주는 등,
간통, 부정 축재, 매관매직.
그가 연루된 비리는 한두가지가 아니다.
그저 일처리 유능한 관리라고 평한다면 모를까,
청렴, 강직하다고 우러를 까닭은 전혀 없다.

슈바이처, 링컨도 역사상 위인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으나,
그들이 실제로는 흑인, 노예 등을 인간적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세간의 평은 그리 신뢰할만 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역사를 대할 때, 늘 이를 조심할 일이다.

當代史도 두 눈 뻔히 뜬 앞에서도 왜곡하고 있는 마당인데,
수백년 전 얘기를 어찌 온전히 믿을 수 있겠는가 ?
노무현, 이명박만 하여도 그들을 신뢰하는 양 집단 간의 평가는
상호 극단으로 갈리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게다가 요즘엔,
“노명박”이라고 이들을 싸잡아 같은 통속으로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게 후대에 어찌 전해질 것인가 ?

현대라 조금 나을지 몰라도,
절대권력이 말을 하는 왕조시대의 역사기록물이란
적지 아니 분식되게 마련이다.

오늘 황희를 거론하며 이리 이야기를 꺼내고자 하는 뜻은,
그의 청렴을 기리고자 함도 아니오, 그의 부정함을 까발리고자 함도 아니다.

널리 알려진 그의 이야기 한 토막을 빌어 소론을 펴고자 함이다.
이야기인즉슨, 이러하니, 먼저 그를 되새겨보자.
 
어린 종 둘이 다투고 있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황희가 그들을 보게 되었다.
어색해진 그 중 하나가 상대방이 잘못해서 싸움이 벌어졌다고 일렀다.
어린 종들에게서 자초지종을 다 들은 황희는,
"그래, 네 말이 옳구나." 하고 다독거려 주었다.
그러자 다른 종은 주인이 상대의 편을 드는 줄 알고, 자신의 변명을 늘어놓았다.
황희는 그 말을 다 듣고 나서,
"그렇다면 네 말도 맞구나." 하고
둘을 모두를 이리 대했다.

이때 방 안에서 지켜보고 있던, 그의 부인이 타박하기를,
"아니, 대감께서는 이 놈도 옳다, 저 놈도 옳다 하시니 어찌 그러십니까 ?
옳고 그름을 확실히 밝혀 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
한 나라의 정승께서 그리도 사리가 분명치 않으시면 어떻게 합니까 ?" 하고 말했다.

그러자 황희는
"맞소. 부인 말씀도 참으로 맞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만 부인도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고 한다.

아주 진부한 얘기다.
혹자는 이를 두고 똘레랑스의 전형이라고 극찬한다.
하기사, 혹자 뿐이랴 대개는 이 이야기를 그런 코드로 풀어, 인용하며,
황희를 명승이라고 한껏 찬한다.

과연 그리만 보고 말 것인가 ?

***

삼인이 여기 있다.
분란의 양 당사자와 증인 이리 도합 3인이 있다.

나는 분란이 일어났을 때,
최소 3인 이상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는
함부로 평가해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한다.
대개의 경우, 양 당사자는 자기를 변호하기 바쁘다.
그러하니, 일인의 말 하나로서는 사실을 적실하니 살필 수 없다.
이 양 당사자외에 객관적 위치에 선 제3자의 증언이 있을 때라야,
비로서 최소한의 조건을 간추게 된다.
하여 나는 삼인의 진술을 일러, 진실 확인의 “최소 필요조건”이라 부른다.

이 때 비로서, 부족하나마, 얼추 사물의 이치를 따져 볼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이 때라 하여도 아직 드러나지 않은 정보가 있을 수 있다.
추적 가능한 정보라면 이를 찾아내야 할 것이며,
그렇지 않은 정보라도, 아직 드러나지 않은 정보가 있을 수 있다라는
겸허한 자세 역시 필요하다.

때문에, 내가 분쟁 현장에서 판단을 내리기 전에 갖추어야 할 기본 조건이라고
늘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 “삼인의 진술” 확보이다.

이 이전까지는 판단중지되어야 한다.
‘의심’은 아직 상대에게 실례가 된다.
그러하므로 판단이 중지된 상태라 이름하는 게 옳다.

***

황희는 일인지일리(一人之一理)를 거푸 3번 긍정했다.
황희는 삼리(三理)를 인정하였지만,
시비선악(是非善惡) 판단은 유보했다.

삼인삼색, 즉 십인십색인 게다.
삼리(三理)뿐이랴 십리(十理), 백리(百理), 천리(千理)도 가하다.

문제는 천인의 조각 이치가, 온전히 큰 하나의 그림을 그리는데,
모두 동가의 가치로, 동량의 무게로 기능할 수 있는냐 하는 것이다.

이 때에 이르러,
즉, 시비선악을 부득이 가려야 할 처지라면,
삼리(三理)의 경중을 각기 저울에 달지 않을 수 없음이다.

이 때, 일인지일비(一人之一非)내지는 일인지일과(一人之一過)가 드러난다.
삼인삼과(三人三過),
삼색 일리만 있을손가 ?
삼색 허물도 함께 드러난다.

나는 황희에게 묻는다.
그러면 삼인을 앞에 두고,
이젠 삼과를 들며 모두 나무라고만 말 노릇인가 ?

황희는 삼과를 덮고, 삼리를 대등하게 취급함으로서,
시비선악의 세계를 벗어나고자 했음이다.

그가 좌의정, 영의정까지 지냈다면,
정사를 펴는 것인즉, 곧 시비를 가리고, 선악을 분별하는 것이 책무였을 터.
그런 그가 삼리에 머무르고 만 까닭은 무엇인가 ?

그가 자신의 사위가 저지른 살인죄를 무마하기 위해,
맹사성까지 동원하며 사건을 덮어버리듯,
종들의 싸움도 그리 덮어버리고 만 것은,
그가 덮음으로서 세상의 시비를, 선악을 여의고자 하였음인가 ?
그는 유학자가 아니라 황로(黃老)를 따르는 무리라도 된단 말인가 ?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다.
간단한 것이다.
그에겐 덮는 게 더 남는 장사였기 때문이다.
두 경우 모두.

사위의 살인죄를 덮으므로서 덕을 펴고자 함이 아니었듯이,
종들의 다툼을 덮음으로서 그가 덕을 펴려고 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로서는 덮음이 득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문이 남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나는 위 일화를 황희의 똘레랑스로 새기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미당 서정주의 詩語가 아름답다한들,
그의 마음까지 아름답다고 새길 수만은 없지 않은가 말이다.

종놈 시비를 그리 덮는 게 얼핏 덕스럽게 보였다한들,
사위놈 살인죄를 덮는 것조차 덕스로움의 발로로 새길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황희 입장에서는 까짓 종놈들의 다툼까지 시비를 가릴만큼
한가하지 않은 것이다.
그저 넉살 좋게, 종놈들, 부인을 가지고 일시 희롱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혹시나, 이런 것은 아닐까 ?
그날 따라 아리따운 기생하고 질탕하니 놀고 집에 드니,
휘영청 달은 밝고,
오동 그림자가 뜨락을 소소하니 쓸고 있음에
한껏 마음이 너그러워졌던 것은 아닐까 ?

***

그런데, 말이다.
만약 종놈 중에 하나가 시비가 가려지지 않아,
공연히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었다면 어찌 할텐가 ?

황희야 후대까지 덕을 내리닫이로 훔쳐 받아먹었다 하지만,
구천에 든 그 때의 그 종 하나는 지금도
씨근덕 거리고 있지 않는다고 그 누가 보장하리.

시비진위가 덮여지는 순간,
그 그늘 밑에 억울한 일은 없을손가 ?
나는 이 점을 돌보는 것을 소홀히 해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한다.

황희의 위 일화는
한마디로 권위에 의해 시비선악이 일시에 덮였던 게라.
권세가 작동할 때,
그게 권세가의 덕이 될 수도 있지만,
억울함이 울고,
비리가 웃을 수도 있음을 경계하고 싶다.

세상 사람들은 제 일이 아닌 한,
권세에 기꺼이 엎어지고, 아부한다.
게다가 그게 덕을 칭송하는 마당이니,
제게 일전일푼도 손해날 일이 아니다.

제 놈이 덕을 베푼 것도 아니면서,
남이 덕 푼 것 칭송하는 순간,
제 놈이 덕스런 인간이 되기라도 한 것인 양,
어깨까지 으쓱거리며 우쭐댄다.
빈대같이 곁다리에 묻어 생색내고자 하는
이들이 세상엔 적지 않다.

게다가,
굳이 제 손에 피를 묻히기를 꺼리는즉,
남의 흉사엔 시비여하간에 꺼리며 내치길
벌레 털듯 바삐 서두른다.
당사자로선 사뭇 억울한 노릇이다.

이 점에 이르자 나는 도리없이 상앙, 손무가 생각난다.
다소 번거로운 노릇이지만,
생각 난 김에 남겨둔다.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손무는 원래 제나라 사람이다.
널리 인재를 구하던 오왕(吳王) 합려(闔閭)는 오자서의 청으로 손무를 초빙한다.
손무는 합려 앞에서 병법의 대의를 장강처럼 풀어내었다.
감탄하는 합려에게 손무는 병법을 잘 쓰면,
비록 안방에 있는 부녀자(婦女子)들일지라도 군사로 부릴 수 있다고 말한다.
이에 합려는 껄껄 웃으며 반신반의한다.
손무는 이에 합려의 허락을 얻어 부녀자를 상대로 직접 시범을 보이기로 한다.
궁중의 미녀 180명을 뽑았다.
그들을 2개 편대로 나누고, 합려의 애첩 둘을 뽑아 편대장으로 삼았다.
그들 모두에게 창을 들고 장대(將臺)올라 큰소리로 명령했다.
하지만 궁중의 미녀들과 애첩들은 깔깔거리며 웃어대기만 했다.

그 모습을 본 손자가 말하기를
“약속이 분명하지 못하고 명령 전달이 충분치 못한 것은 우두머리 된 사람의 죄이다.”
라고 하고, 다시 세 번 군령을 들려주고 다섯 번 설명을 한 다음에 큰 북을 울리며
호령했으나 여자들은 다시 웃어대기만 하였다.

손자가 말하기를
“군령이 분명치 못하고 전달이 불충분한 것은 우두머리의 죄인데,
이미 약속이 분명히 전달되었는데도 병졸들이 규정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곧 우두머리 된 자의 죄이다.”
라며 군령대로 대장 즉 총희를 참수하려 했다.

오왕 합려가 사열대에서 내려다보니 자신의 총희(寵姬) 두 사람이
손자의 손에 참수되려는 찰나였다.
이에 합려는 크게 놀라 황급히 손무에게 말하길
“과인은 이미 장군의 용병이 뛰어난 줄 잘 알았소.
과인에게 그 두 여자가 없다면 밥을 먹어도 맛을 알 수 없을 정도이니,
부디 용서해주기를 바라오.”라고 했다.

손자는 말하기를
“신은 이미 임금의 명을 받아 장수가 되었습니다.
장재군 군명유소불수(將在軍 君命有所不受)인즉,
장수가 군에 있음에 임금의 명령을 받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라고 하며
마침내 두 애첩의 목을 베고 군법을 시행했던 것이다.

진나라 위앙(후에 상앙으로 불리운다)은 또 어떠한가 ?
잠깐 여기서 여담이지만,
삼진이라 일컫는 위(魏), 조(趙), 한(韓)의 세 나라는 비교적 약소국이다.
이 삼국을 일러 삼진(三晋,한위조)이라고 한다.
원래 진(晋)으로부터 이들 삼국으로 분할되었기 때문이다.
이 삼국에서는 예로부터 유세자(遊說者), 재능꾼이 많았다.
약소국이지만,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자기 나라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여기 저기 천하에 뿔뿔히 흩어져 공을 이룬 자가 많았다.

위앙은 본래는 위(衛)나라 출신이다.
이 나라는 날로 쇠약해 갔다.
이에 위앙은 재주와 뜻을 펴기 위해 위(魏)로 떠난다.
삼진(三晋,한위조)에서 인재가 많이 배출되기도 하였지만,
이처럼 인재가 흘러들기도 하였으니,
진(晋)나라가 쪼개져 삼국으로 나뉜 배경하에,
저들 유세자들의 기회 또한 적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위혜왕은 위앙을 제대로 감식하지 못하고, 그를 쓰지 않았다.
그후 위앙은 진효공(秦孝公) 이 널리 천하의 인재를 구한다는 소문을 듣는다.
마침내 위앙은 위를 버리고 진(秦)으로 가서 크게 중용된다.
 
그는 진효공의 절대적인 신임하에,
진나라 뿌리부터 뒤집는 개혁책을 편다.
신분제도, 토지소유제도 등을 혁파하였다.
당연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크게 산다.
개혁의 과실은 국민들이 나누게 될 터이지만,
문제는 이미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자들이
의사결정권을 가진 위치에 있기에 개혁은 늘
거센 저항을 만나게 된다.

그 역시 개혁을 걸어 진나라를 부국강병의 나라로 만드는 데, 일응 성공하였다.
하지만, 자신은 끝내 기득권 세력에 의해 몸을 망친다.
활동 당시의 왕인 효공(孝公)의 태자와 갈등이 있었다.
(후에 효공이 죽자 이어 그 태자가 등극하니 그가 혜공(惠公)이었다.)

한번은 태자가 개혁법령을 위반했다.
상앙이 말했다.

“법이 준수되지 않는 원인은 상류계층이 이를 무시하고도 무사하여,
법 자체가 경시되는 데 있다.”

상앙은 태자를 처벌하고 싶었으나 군주의 후계자를 손댈 수는 없었다.
대신 그 측근인 공자건을 처형했고, 또 사부인 공손가를 묵형(먹 뜨기)으로 벌했다.
소문이 퍼지자, 백성들은 두려워 하며 개혁법령을 준수했다.
그러나, 태자는 분노와 원한을 가까스로 달래고는 집권 후에 보복키로 작심한다.

***

옛말에 “흥정은 붙이고 싸움은 말리라고” 했다.

싸움질 좋아 하는 인간이 어디에 있겠으며,
화합처럼 아름다운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

하지만, 싸움박질, 이게 남의 일이니까 이리 한가로운 양,
제 흥에 겨워 후하지,
막상 제 일이라도 그러할까 ?
제 손톱 밑에 든 까시가 얼마나 아픈 데,
남의 눈에 든 대들보도 대수롭지 않게 보이는 게,
세상 인심이다.

시비선악을 가리자고 하는 뜻은
상앙, 한비자 같은 법가들이 잔혹무비 냉혈한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저들의 차가운 헌책으로 결국 진(秦)은 부국강병을 이루고,
천하를 통일하는 초석을 닦았음이다.
비록 저들 개혁가는 몸을 망치고 말았지만.

시비석명(是非釋明)없이,
개혁은 없다.
황희의 양시론(兩是論)내지는
양비론은 국외자의 한가로운 변명이거나,
꾀하고자 하는 뜻이 숨어 있곤 한다.
나는 이를 경계한다.

***

나는 싸움을 막고 싶지 않다.
오히려, 적극 자리를 마련하고,
편리를 주선하고 싶다.

억울한 사정이 있다면,
북도 치고, 꽹과리라도 동원하라,
나라에서 신문고를 걸어 둔 까닭이 무엇이랴 ?

너른마당이든,
스포츠뜨락이든,
자리 가리지 않고
멍석 펴고 맞이함이 마땅하다.

밤낮, 용비어천가 부르고,
밑 닦아주는 것만이 능사인가 ?

ooo같은 분들도 제 주장을 펴고,
aaa도 이리 분수 모르고 나댈 수 있는 세상.
이 아니 아름답지 않은가 ?

나는 믿지도 않지만,
늘 부르짖는 게 소통, 소통이 아니든가 ?
하니, 어느 누구에게도 언로를 제한하지 말았으면 싶은 게다.

단,
이 멍석 위에서 서면,
누구나 추상같은 책임을 지게 되는 것.

객이 너무 넘치는 참견인가 ?
지나는 객이니까 마음껏
이리 나댈 수 있음이 아닌가 ?
바람을 벗하는 나그네는 그래서 자유로이 떳떳하다.

***

앞에서 이야기가 길어 줄였음이라,
잠깐 그 사연 끝자락을 덧붙인다.

실인즉 시비진위를 가리기 위해서는 삼리(三理)만
거량(擧揚)해서는 부족하다.

시간, 공간 제약적 존재가 인간이다.
삼리(三理)는 공간적 차원에서 따져본 것에 불과하다.

삼세(三世)라고 있다.
과거, 현재, 미래.
이 시간축을 따라 흝어야 제대로 시비곡절이 꿰어져
가지런히 진실이 밝혀진다.

(※ 이에 대하여는 별도의 글을 바로 올려 두고자 한다.)
☞ 2008/02/23 - [소요유] -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

황희의 저 일화는
이 시간축에 대한 이해가 없다.
해서 이 부분에 대한 소론을 별도의 글로 올려볼까 한다.

이리 논하다본즉,
진위분별을 위해서는
삼인(三人), 삼리(三理), 삼세(三世) 이 세가지를 아울러야 한다.
나는 이제 이를 구법(九法)이라 이름하고자 한다.

***

애초 길 고삐를 잡아채 나설 때,
반말로 짓거리며 나서다 보니,
글이 공손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깨닫고 뒤를 돌아다 보니,
제법 아득하군요.
되밟아 수습하고자, 말꼬리를 높여 고쳐잡자니
그리 수월한 노릇이 아니군요.
하여 내쳐 두자니 작폐가 되고 말았습니다.
꾸짖지 마시고 널리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소요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용한 점쟁이는 세상에 왜 존재하는가 ?  (0) 2008.02.25
호떡과 동물  (4) 2008.02.23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  (0) 2008.02.23
private distance(個人距離)  (2) 2008.02.22
디카는 총구다.  (0) 2008.02.22
두수(頭須) - 후기  (0) 2008.02.21
Bongta LicenseBongta Stock License bottomtop
이 저작물은 봉타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3.0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행위에 제한을 받습니다.
소요유 : 2008. 2. 23. 15: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