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야반출도(夜半出逃)

소요유 : 2014. 1. 25. 16:51


어느 댓글을 보고,
한 생각이 떠올라 글 하나를 써보았습니다.
그러한데 주책없이 길어져 이리 본글로 내달아 봅니다.

***

철학 없는 농법은 맹목이고,
농법 없는 철학은 공허하다.

철학 없는 농법은 욕심 사납고,
농법 없는 철학은 위태롭다.

제가 이리 생각을 정리해놓고 보니,
이미 이런 말씀은 성인들이 먼저 다 해주셨음으니,
제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 지나친 흔적이 튀어 나온 것이리라.

나는 하찮은 오동나무인 바라,
바람이 뚫린 구멍으로 지나시자,
이내 소리 하나가 흘러나오다.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이는 공자의 말씀이로되,

간단히 급히 말로만 새기면 이러하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이 없으면 罔하고,
생각만 하고 배우질 않으면 위태롭다.

그런데 여기서 罔을 우리말로 바꾸자니,
한 마디로 표현할 마땅한 말을 찾기 어렵다.

罔無也

罔은 여러 뜻으로 새겨지는데,
곧 없다라는 뜻이 대표적이다.

그 외 속인다, 해가 된다, 필요치 않다 ....
등등 여러 뜻을 갖고 있다.

나는 저 문장에선,
罔은 이런 뜻들을 모두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을 하지 않으면,
배울수록 바보가 된다.

학해(學海)임이라,
배움의 바다에 빠져 익사해버리고 말 것이다.

바다가 있음으로써 헤엄을 칠 수 있는 것이로되,
헤엄칠 생각을 하지 않고 바다물만 취하니 언제 헤엄을 칠 수 있으런가?

여기 oo 카페에 정말 많은 정보가 흘러넘친다.
하지만 지 아무리 정보가 차고 넘치면 무엇하는가?
저것 중에 제 몸에 맞는 것이 과연 어떠한 것인가?
이는 제가 스스로 나서 찾아내야 한다.

어느 날,
내 농법/농철학을 보고는 이를 취하겠다는 분이 계셨다.
나는 그 분께 이리 말씀드렸다.

“제 농법은 제 것이기에,
남이 제 것을 따라하시거나 흉내 내실 필요는 없습니다.
우선은 농철학이 다르면 난(亂)이 일어납니다.
작법이 먼저가 아니라 생각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제 농장마다,
토질도 다르고, 
지형도 다를 것이며,
목표도 다를 것인데,
어찌 함부로 거죽, 외형만 보고 따라나설 수 있음인가?

남의 것은 나에겐 罔인 것임이라.
자기 주관도 없이 남의 것을 따라하다가는,
바로 망(亡)하고 만다.
그러함이니 없는 것과 다름이 없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이 없음을 경계한 말이다.
 
學而不思則罔

그러함이니 罔이란 없음에 다름 아니다.
한참 남의 것을 따라 하다가,
영 실적이 나타나지 않으면 ‘속았다’라고 말한다.
큰 해를 입게 된 것이다.
이런 안타까운 정경을 일컬어 罔民이라 부른다.

맹자에 나오는 말씀이다. 

無恆產而有恆心者,惟士為能。若民,則無恆產,因無恆心。苟無恆心,放辟,邪侈,無不為已。及陷於罪,然後從而刑之,是罔民也。

... 백성이 무항산하면 방탕, 편벽, 삿되고 허황되어 ... 죄를 짓고,
결국 형벌로 다스리게 되는데,
이는 (나라가) 곧 백성을 그물질 하는 것과 같다.

원래 罔은 그물을 형상한 글자인데,
여기서 맹자는 罔民이라 하였음이니,
民이 罔의 목적격이 되어 수동적으로 (그물질) 당한다고 표현했다.

그런데 나는 요즘 같이 개명한 세상에서는,
그 책임을 관청에 두지 않고 실천의지의 주체인 개개인에게 두고자 한다.

즉 자신의 어리석음 또는 욕심에 의해 그물질을 당했다는 것이고,
이를 속았다라며,
남을 탓하게 된다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罔은 誣자와도 통하는데,
이는 거짓 비난을 당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실상은 아닌데 억울하게 속임을 당해 누명을 쓴 상태를 말한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세상에도 곧잘 관이 민을 기망하고 하는데,
그 시절은 오죽하였을까나?

하지만 誣도 역시 남으로 인해 억울함을 당하였다는 하소연이 있을 뿐,
자기 책임이라는 각성은 부재하다.

자,
이제 정리하자.

學而不思則罔

배우기만 하고 생각을 하지 않으면,
수박 겉핥기가 되어 아무런 실익이 없다.
외려 까딱하다가는 망하고 만다.

思而不學則殆

그럼 이 말은 무엇인가?

생각만 하고 배움이 없으면 위태하다.

사람이란 제 아무리 능력이 빼어나도 한계가 있는 법,
남의 말씀으로부터 배우지 않으면 내 생각이 견실해질 수가 없다.
그러하니 제 생각을 고집하면 독단에 빠져 허물을 짓고 종내 위태로워진다.

내가 소싯적에 바둑에 한참 탐닉했던 적이 있다.
당시 청계천변엔 헌 책방이 많았다.
거기를 뒤져 바둑에 관한 책을 있는 대로 수집을 했다.
구한 책 중에서 읽었던 것인데 지금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어느 날 프로 기사가 운영하고 있는 기원으로 한 사람이 찾아왔다.
그자가 말하길 나는 수십 년 계룡산에서 도를 닦았다.
특히 바둑의 기리(棋理)를 깊이 탐구하여 이젠 큰 도를 일구었다.
원장은 어서 나와라,
너와 겨루길 청하노라.

몇 차 실랑이질이 있었고,
결국 그자가 몇 점 깔고 두게 되었는데,
그자는 연전연패 판판이 깨지고 말았다.

홀로 지 아무리 잘난 척 기고만장하였지만,
쟁쟁한 기사끼리 현장에서 갈고 닦은 프로의 기량을 어찌 당하랴?


이 글자의 뜻은 흔히는 위태롭다 정도로 새기지만,
사실 그 정도라면 危가 적당하다.
殆는 危를 넘어 亡하고 종내는 死에 이르는 사정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젊은 중 하나가 산 중에 들어와 십여 년 도를 닦았다.
어느 날 큰 빛이 몸을 범하더라,
마음은 수 십장 허공중으로 떠오르고,
몸도 덩달아 날아갈 듯 가볍다.
그 길로 ‘나는 이제 깨우침을 얻었다.’
이리 기고만장하더라.

이 동네 풍속은,
절대 제 홀로 깨우침은 인정을 하지 않는다.
증명법사(證明法師)가 인가(認可)를 해주어야 한다.
워낙 이 세계는 별별 현상이 다 벌어지기 때문에,
날림, 가짜가 많다.
(그런데 이게 다 인가?)

백 놈이 모두 지 혼자 깨우쳤다고 날뛰면,
이제 법사는 무엇을 팔아먹고 살 것이며,
본사(本師)는 어디에 기대어 위엄을 찾을 것인가?
시장통 치킨집만 영업을 잘해야 되는 것이 아니다,
실로 따지자면 절집도 급한 것이 영업인 것이다.

승속(僧俗) 안팎이 하나도 다름이 없다.
불가(佛家)만 그런 것도 아니오,
속가(俗家)만 그런 것이 아니다.

내가 최근 어디선가 선~~ㅇ ㅗ ㄱ ~~균, 악~~ㅇ ㅗ ㄱ ~~균에 대한 글 한 자락을 읽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가?
나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우선은 저게 글자가 한자로 어떻게 쓰는가가 더 궁금했다.
한자어로 된 것은 한자만 읽어도 얼추 그 실상이 짐작이 되기 때문이다.
조어(造語)라는 것이 그리 주먹구구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어쨌건, 
해서 우리나라 인터넷을 검색했는데 이것은 도통 한자어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 외국 사이트를 검색해보았더니 거기엔 헤아릴 수 없는 글이 쏟아져 나온다.
일본의 경우엔 이미 저 말은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는 말이고,
중국 사이트에선 이 말이 일본에서 유래했다는 글도 내가 목격하였다.

그래 내가 이를 잘 정리해서 글 하나를 지어, 내 블로그에 올렸다.
그런데 며칠 있다가 내게 전화 한통이 왔다.
저것을 자기네가 브랜드화 하여 등록을 하였기 때문에 함부로 쓰지 말라고 한다.
일본에선 거의 보통명사화 되어 대수롭지 않게들 쓰는 형편인데,
한국에선 저들이 선등록을 하였은즉,
곧 내 것이니 함부로 손질하지 말란 말이렷다.
속가는 진실보다, 누가 먼저 나랏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내 이에 대하여는 그 진실을 이미 나름 파악하고 있으나,
이 자리에선 성가시니 더 이상 거론하는 것을 참기로 한다.

그런데 기실 불가도 이런 전통이 있다.
달마(達磨)로부터 내린 법통은 이제 5대 홍인(弘忍)에 이르렀다.
홍인이 혜능(慧能)에게 법통을 전하였는데,
그전까지 맏상제로서 법통을 이으리라 기대가 되었던,
신수(神秀)는 끈 떨어진 연이라, 영 신세가 처량해졌다.
혜능은 밤을 타고 도망가듯 남으로 나아가 법통을 잇지만,
신수는 북으로 가서 나름 북종선을 일군다.

공식적으로 의발을 받고 종통을 이었으면 좋으련만,
그게 아니면 스스로 종지를 내세우고,
법왕이 되면 되는 것.
검버섯 핀 늙은 노인네가 쓰던,
고약한 냄새나는 의발이 대수랴?

앞에서 들은 젊은 중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
(픽션임.)
인가를 받지 못하자 속에서 천불이 다 일어난다.

이게 도시 가당치 않으면,
산문을 깨뜨리고 뛰쳐나와야 된다.
까짓 의발 전수가 대수랴?
이러고는 평소부터 눈짓을 주고받았던 보살 하나를 꼬셔,
조그마한 암자를 접수하고는,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앉아 일을 벌인다.

우주에 법왕(法王) 하나가 새로 탄생한 것이다.
바로 이 때라서야,
하늘에서 만다라화가 비처럼 쏟아진다.

王侯將相寧有種乎
"왕후장상에 어찌 씨가 (따로) 있으리오!“

사기에 보면 진시황이 죽자 2세인 호해가 뒤를 잇는다.
무능한 호해 밑에서 환관 조고는 국정을 마음껏 농단한다.
당시 진승과 오광은 부역꾼이든가 죄인 무리이든가를(기억이 좀 가물가물하네요),
호송하는 책임을 맡게 된다.
호송중 비가 많이 내려 제 기한 내에 도착지에 도달할 형편이 못되었다.
그런데 당시의 법에 의하면 기한 내 임무를 완성하지 못하면,
무작정 참수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다.
진나라는 법가가 국정을 장악하여 신법을 편 연고가 있다.
따라서 법이 곧고 엄하였다.
이러니 도망을 가도 죽을 판이요, 늦게 가도 죽을 딱한 형편에 처하게 된다.
이에 그 무리들을 주축으로 모의하고 나중 농민을 규합하여 반란을 꾀한다.
이 때 내건 격문(檄文) - 캐치프레이즈(catch phrase)가 유명한 
"왕후장상 영유종호(王侯將相寧有種乎)"이다.

彼丈夫也,我丈夫也,吾何畏彼哉?

네가 장부면, 나도 장부다.
내 어찌 너를 두려워하랴?

자, 말해보라,
보살 꾀어 떡하니, 암자 하나 꿰차고,
또아리를 틀고 있는 저 녀석이 법왕이냐?
아니면 천하에 몹쓸 사기꾼인가?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이 말씀은 기실 공자 자신을 두고 한 말이 아니다.
몽매하고 우둔한 이들을 두고 경계의 말씀을 내리신 것에 불과함을 알아야 한다.

여기 천인이 있고, 만인이 있으면,
천만인 모두는 하나 같이 옆집 순이 꾀어,
야반출도(夜半出逃)하여야 한다.

여기 천만 중이 있다면,
모두는 하나 같이 보살을 꾀어 달아나야 한다.
이러고서야 법왕이 되는 것이라.
마호멧도 메카에서 메디아로 도망가서야 도를 펼 수 있었다.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여기 이 구절에서 罔이나 殆에 주목하는 이는 다 졸장부인 게라.
법왕은커녕 법졸(法卒) 즉 법의 졸개나 되면 크게 성공한 축이리라.

농법이 수천 개, 수 만개 있지만,
다 배울 수도 다 배워도 아니 된다.
박람강기(博覽强記)는 수재라야 능히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수재는 법왕이 될 수도 없다.

내 진실로 이르거니와,
법왕이 되려면,
學을 만나면 만나는 족족 까부셔야 되며,
思를 만나면 만나는 족족 무찔러버려야 한다.
연탄재 밟아 깨부시듯.

見神殺神 遇佛殺佛 逢祖殺祖

'귀신을 만나면 귀신을 잡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

이게 그저 폼 잡고 거드름 피우려고 쓰는 말이 아닌 게다.
원래 실상이 그러함이다.

千人千學 萬人萬學
千人千思 萬人萬思

그래 세상엔,
천인이 있으면 천 가지 學이 있고,
만인이 있으면 만 가지 學이 있으며,
천인이 있으면 천 가지 思가 있고,
만인이 있으면 만 가지 思가 있다.

그런즉,
애오라지 一學一思만 (내게) 있는 것이다.

부처가 말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은 바로 이 경지에 가닿고 있다.

이 때라서야,
가히 천하가 태평할지니리.

천하엔 이미,
千學萬思가 있으나,
一學一思는커녕,
기껏 반 푼도 담기 어려울 형편인데,
당체 무슨 꿈을 꾸랴?

그러함이니,
내 권하길,
반반한 계집 하나 구해,
야반출도(夜半出逃)하라 함이라.

법왕이
깨알처럼 온누리에 쏟아지길 바라며.

***

이 글은 다음 글을 그 짝으로 삼겠다.

☞ 2016/01/09 - [소요유] - 진승과 오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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