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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혜와 경허

소요유 : 2014.02.25 13:55


노나라에 한 남자가 홀로 살고 있었다. 
이웃에 과부가 있었는데, 간밤에 비가 내려 집이 무너졌다. 
부인이 보살펴 줄 것을 청했다.
남자는 문을 닫아걸고 받아주질 않았다.

그러자 과부가 이리 말했다.

‘당신은 유하혜(柳下惠)를 어찌 배우지 못했소?’

홀아비가 이리 답한다.

‘유하혜는 가하나, 나는 그렇지 못하오,
나의 불가함으로써 유하혜의 가함을 배운다오.’
(※ 유하혜는 그리 할 수는 있으나, 나는 모자라 감히 그리 할 수가 없는 위인이다.
이를 스스로 잘 알고 있으니 삼갈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공자가 이를 듣고는 찬탄하며 이리 말했다.

‘유하혜를 배운 자로서 이 자를 따를 자가 없고뇨.’

구방고(九方皋)는 말을 잘 보는 자인데, 
거죽 피부라든가, 암수 따위에 연연하지 않았다.

중국의 선철들은 고인을 모범으로 삼았다.

이는 겉을 버리고 정신을 취함이라(遺貌取神),
이는 중국학술의 큰 특징이다.

화가나 작가나 이와 같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이와 같은 정신을 본으로 하여, 
서양문화를 취사선택할 수 있다.
그러면 이익 됨만 있을 뿐, 해가 될 바 없다.

魯國有個男子獨處,鄰家有一寡婦獨處,夜雨室壞,婦人來求託庇,男子閉戶不納。人說:「你何不學柳下惠呢?」男子說「柳下惠則可,我則不可,我將以我之不可,學柳下惠之可。」這事被孔子聽見了,就贊嘆道:「喜學柳下惠者,莫如魯男子!」還有九方皋相馬,並不取其皮相,是在牝牡驪黃之外。吾國先哲,師法古人,也是遺貌取神,為我學術界最大特色。畫家書家,無不如此,我們本此精神,去取用西洋文化,就有利無害了。

유하혜는 그럼 어떠한 사람인가?

“有一次柳下惠遠行夜歸,住於城門外,那時天寒地凍,有一無處可去的孤身弱女子前來投靠。柳下惠怕她凍死了,便讓她坐在自己懷中,用自己的大衣裹著她,到第二日天亮都沒有越禮的行為。”

“유하혜가 원행을 떠났다가 야밤에 돌아올 때다.
성문 밖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 때 날씨는 춥고 땅은 얼어붙어 있었다.
갈 곳 없는 약한 여인네가 홀몸을 의탁하더라.
유하혜는 그 여인네가 얼어 죽을까 봐,
자기 품에 앉혀서는 자기 겉옷으로 싸안았다.
그 이튿날이 되어도 예를 벗어나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두고,
사람들은 좌회불란(坐懷不亂)이라고 이른다.

***

내 이를 두고 가만히 생각한다.

처음 노나라 홀아비를 두고,
공자는 ‘유하혜를 배운 자로서 이 자를 따를 자가 없고뇨.’ 이리 말씀하신다.

그런데,
기실 저 홀아비를 그렇게 봐줄 수도 있는가?

가령 홀아비가 실인즉 그 과부를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 내치면서 슬쩍 유하혜를 들며 핑계를 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또는 품고도 싶으나, 
위인이 소심하여 감히 그런 기회를 받아드릴 배짱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사정은 구구각각(區區各各),
감히 함부로 그 실상을 국외인이 말할 수 없다.
다만 공자가 저리 말씀하시니 그런가 할 뿐이 아닌가?

그러함이니,
기실은 저 홀아비 면모가 뛰어난 것이 아니라, 
저리 평을 내릴 수 있는 평자야말로 훌륭한 이가 아닐까?

환언하면,
저 사태에서 주목을 받을 이는 홀아비가 아니라, 
정작은 평자(評者)라야 된다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홀아비 말에 홀려서는 아니된다.
다만 저를 두고 제대로 사태의 실상을 알아 꿰찰 수 있느냐가 중요할 뿐이란 말씀이다. 

한편 유하혜를 두고 성무능력자였을 뿐이라는 이도 있다.
과연 그러한가?

맹자는 유하혜를 두고 화성(和聖)이라 불렀다.
도가 바르고, 사람을 잘 섬기는 사람이라 평하였다.

(http://paper.wenweipo.com/)

역사상 보면 유하혜는 강씨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29세에 장남을 얻고, 37세에 차자(次子)를 낳았다.
만약 유하혜가 성무능력자라면 어찌 자식을 낳을 수 있었으랴?

유하혜의 생몰연대는 기원전 720~621이다.
仁者多壽라,
자고로 어진이는 명이 길다 하였다.
백세까지 살았으니, 유하혜는 가히 인자라 할 만하다.
보통 색을 밝히는 이는 명이 짧다.
(※ 참고 글 : ☞ 2014/10/02 - [소요유] - 비료와 인자수(仁者壽))

이런 자료는 사실 직접적인 증거로서 충분치 않다.
다만 믿음을 생산하려 할 때는 유익할 수는 있겠다.

알 수 없는 것을 두고 논쟁하는 것은,
별로 보탬이 되는 일이 아니다.

다만 이때에 경허(鏡虛) 선사가 떠오른다.
경허가 오갈 곳 없는 문둥이 여자를 거둬, 
한 달간 한 방에서 함께 한다.
피고름 흐르는 여인과 잠자리를 같이 하던, 
경허는 지금 짚신 하나 남겨 두고 돌아오지 않을 길을 떠났다. 

하지만, 그 이름은 우리 앞에 남겨져 있다.

140여 년 전 잠깐 경허(鏡虛)란 이름 빌려, 
문둥이 여인과 잠자고, 술 먹고, 개고기 먹던,
그 가사장삼 걸친 사대육신이 아니라, 
피고름 흐르는 여인과 함께 잠자리하는 이를 부르는,
범칭(汎稱)으로서의 ‘경허’. 

그 경허를 현대에 뵐 수는 없을지언정,
2700여 년 전 거슬러 올라가 유하혜를 통해,
뵙는다는데 그 누가 있어 이를 허물있다 탓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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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성의 전당 2018.08.24 16:55 신고 PERM. MOD/DEL REPLY

    안녕하세요.
    저는 지성의 전당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경허선사에 대한 글이 있어서 댓글을 남겨 보았습니다.

    인문학 도서인데,
    저자 진경님의 '불멸의 자각' 책을 추천해 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와 죽음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
    아래는 책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제 블로그에 더 많은 내용이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

    인식할 수가 있는 ‘태어난 존재’에 대한 구성요소에는, 물질 육체와 그 육체를 생동감 있게 유지시키는 생명력과 이를 도구화해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의식과 정신으로 나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태어난 존재’ 즉 물질 육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역할을 다한 도구처럼 분해되고 소멸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유지시키던 생명력은 마치 외부 대기에 섞이듯이 근본 생명에 합일 과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와의 동일시와 비동일시 사이의 연결고리인 ‘의식’ 또한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충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단절작용을 ‘죽음’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존재의 일부로서, 물질적인 부분은 결단코 동일한 육체로 환생할 수가 없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의식’ 또한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모든 물질을 이루는 근간이자 전제조건으로서, 물질로서의 근본적 정체성, 즉 나타나고 사라짐의 작용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타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으며,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불멸성으로서, 모든 환생의 영역 너머에 있으므로 어떠한 환생의 영향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에 대한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자 실체로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체에 의한 작용과정으로써 모든 창조와 소멸이 일어나는데,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다는 것입니까?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을 하고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윤회를 합니까?

    정신은 물질을 이루는 근간으로서의 의식조차 너머의 ‘본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윤회의 영역 내에 있는 원인과 결과, 카르마, 운명이라는 개념 즉 모든 작용을 ‘본체’로부터 발현되고 비추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태어난 ‘한 사람’, 즉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로 여기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 사람’은 스스로 자율의지를 갖고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어지고 고통 받고 죽어지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책임을 외면하기 위해 카르마라는 거짓된 원인과 결과를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거짓된 환생을 받아들이며,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거짓된 속박, 즉 번뇌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환영 속의 해탈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거짓된 자기견해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려면 반드시 비교 대상이 남아 있어야 하며, 대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자율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꿈속의 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뚜렷하고 명백하다 할지라도 ‘나뉨과 분리’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나’에 대한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만을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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