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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異端)

소요유 : 2014. 8. 9. 17:52


이단(異端)

子曰:「攻乎異端,斯害也已!」

이단의 출처로 흔히 인용되는 공자의 말씀이다.

여기서 공(攻)의 해석이 어려운데,
흔히 주희의 논어집주(論語集注)에 나오는 전치(專治)로 새기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럴 경우 위 말씀은 다음과 같이 새길 수 있다.

‘이단을 애오라지 다스리면(닦으면), 그 해가 있을 뿐이다.’

공(攻)을 이처럼 치(治)로 새길 수 있음은,
다음의 용례를 보면 확연해진다.

他山之石,可以攻玉

옥이란 본디 곱고 매끄러운 것인 바라,
이로써 서로 연마한다면 아름다운 옥을 만들 수 없다.
그러하니 거칠고 단단한 돌이라야 옥을 잘 다듬을 수 있고,
이로서 아름다운 옥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대개 공(攻)이라 하면,
공격(攻擊)을 떠올리는 바,
이러 할 때는 남을 친다든가, 비난함을 뜻하게 된다.

그렇다면,

攻乎異端,斯害也已!

이 해석은 이리 달라진다.

이단을 공격하면,
그 해가 그친다.

여기서는 已를 지(止)로 새긴다.

그러니까,
전자의 경우에 해(害)가 이단에 있는 것이요.
후자엔 해가 공격하는 측에게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전자의 해석을 따르면,
(해가 있는) 이단에 빠지면 해가 생기는 것이요.
후자를 따르면,
해가 지금 있는 바,
이단을 침으로써 이 해가 해소된다.

그런데 전자의 태도는 해악이 남에게 있는 것이요.
후자에선 해악이 자신에게 있으니 이는 완연히 다른 모습이다.
다만 이 문장 해석 선상에선 후자조차 이를 남을 공격함으로써 해소하려 하였으니,
결과적으로는 전후는 모두 다 남을 탓하고 있다 하겠다.

정녕코 위해(危害)가 이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단을 공격하는 것으로써 해를 없애는 것을 으뜸으로 삼을손가?
이리 남을 탓함을 능사로 하다간 정작 제 본성을 잃게 되고,
큰 해를 자초할 우려도 있다.

여기서 잠깐 의론을 멈추고,
정작 언급하지도 않고 무단히 사용한 이단(異端)이 무엇인가 생각해본다.

‘다른 끝’

다리 가운데 서 있으면,
공간은 왼편 끝과 오른 편 끝으로 나누어 보인다.
그러함이니 이제 다시,
좌단(左端)에 서면 우단(右端)이 다른 끝(異端)이요,
우단(右端)에 서면 좌단(左端)이 다른 끝(異端)이 되고 만다.

이렇듯 밖을 기준으로 나누면,
내 밖의 남은 모두 이단(異端)이 되고 만다.

隱惡而揚善,執其兩端 ...

악은 감추고,
선은 드러내어,
그 양단을 잡고 ...

중용(中庸)에선 양단을 버리고 그 가운데를 취한다.
윤집궐중(允執厥中)
이는 물리적인 가운데가 아니라,
최적해(最適解)를 말한다.

그럼 이 최적해는 어찌 구할 수 있는가?

唯仁者能好人,能惡人。

오로지 인자라야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다.

유가라면 인(仁)에 처하여 좌우를 능히 좋아할 수도 미워할 수도 있다.
법가라면 법(法)에 거하여 좌우를 상(賞)줄 수도 있고, 벌(罰)을 줄 수도 있다.

불가(佛家)에선 담판한(擔板漢)이란 말을 가끔 쓴다.
어깨에 판자를 올려놓고 세상을 보면 한쪽 편만 보인다.

밖(外)을 기준으로 삼으면 나 외의 것은 모두 이단(異端)이다.
하지만 안(內)으로 들어오면 이단이 문제가 아니라,
정작은 자신이 밝으냐 어두우냐가 문제가 될 뿐이다.

子曰 君子求諸己,小人求諸人。

군자는 모든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으나,
소인은 남에게서 찾는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면,
남의 일은 문제가 아니 된다.

전형적인 유가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법가는 이와는 완연히 다르다.
잘못이 남에게 있을 수도 있으니,
법으로 심평하여야 한다.
잘한 이에겐 상을 주고,
그릇된 이에겐 벌을 준다.

이 경우 이단이라 하면,
나와 다르기 때문에 이리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잘못이 있기 때문이다.

유가는 인(仁)을 추구하니,
남을 탓하기보다는 곧잘 서(恕)할 줄 안다.

법가는 그릇된 것은 엄히 벌하여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시골에 들어와 보니 대명천지 밝디 밝은 세상에,
이리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자들이 많은 줄 미처 몰랐다.
이해 타산을 몹시도 밝히는 이들이라,
저들을 과연 서(恕)로서 이끌 수 있을까?
난 자신이 없다.
아니 인간성에 대한 가치 판단,
그에 대한 깨달음을 시골에 들어와 확실히 얻었다.

법가는 어차피 세상은 이해관계로 돌아들 가는 것.
상과 벌로서 규율하여야 천하를 바르게 세울 수 있다고 보았다.
헌즉 그들에게 물으면 이단은 나로부터 반성적인 성찰로 찾을 것이 아니라,
남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답할 것이다.

인(仁)과 법(法)

어디에 의지하느냐에 따라,
이단의 소재가 달라진다.

天下大亂,賢聖不明,道德不一,天下多得一察焉以自好。譬如耳目鼻口,皆有所明,不能相通。猶百家眾技也,皆有所長,時有所用。雖然,不該不遍,一曲之士也。判天地之美,析萬物之理,察古人之全,寡能備於天地之美,稱神明之容。是故內聖外王之道,闇而不明,鬱而不發,天下之人各為其所欲焉以自為方。悲夫!百家往而不反,必不合矣。後世之學者,不幸不見天地之純,古人之大體,道術將為天下裂。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현성(賢聖)이 불명하고, 도덕이 하나가 아니니,
천하 사람은 일부분만을 얻고는 스스로 옳다 하였다.
비유컨대 이목구비가 각기 자기만이 옳다 하며 서로 통하지 않는 것과 같다.
백가(百家)의 재주는 모두 장점이 있어, 쓸데가 있으나,
두루 쓰지 못하니 필경 일곡지사(一曲之士)가 되고 만다.
이들은 천지의 미(美)를 판별하고, 만물의 이치를 분석하며, 옛 사람의 완전함을 살피며,
자신이 천지의 미(美)을 구비하고, 신명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른다.
그런고로 내성외왕의 도는 어둠에 가려 밝지 못하고,
막히어 드러나지 않는다.
천하인은 각기 욕심을 위하여 방술을 펴니,
아, 슬프다.

백가(百家)는 가고 돌아오지 않으니,
반드시 불합(不合)할 것이다.
후세의 학자는 불행히도,
천지의 순수함과 고인의 대체(大體)를 보지 못한다.
도술(道術)은 정차 천하에 크게 분열하리라.

장자(莊子)의 마지막 편인 천하(天下) 편을 내가 잠시 상기해보는 것이다.

어떤 자가 하나 있어, 비료를 사용하여 블루베리를 키운는데,
2년 만에 그 키를 삽자루 길이 이상으로 키웠다고 기염을 토하였던 적이 있다.
계집들도 작은 키를 늘리겠다고 멀쩡한 다리를 부러뜨린 후에 잡아 늘리거나,
양 턱을 톱으로 자르고, 도끼로 잘라 뾰족한 쐐기 턱을 만들고서는,
천하의 미인이 되었다고 뻐기지 않던가?
저것이 도장(徒長) 즉 헛자라기 한 것이지 어찌 정상이라 하리오.
저 계집이 본디 박덕하고 추한 년이오되,
거짓 탈을 쓰고 세상을 속인 것이지 어찌 미인이라 하리오.

헌데 더 흉한 문제는 이게 아니다.
저 블루베리 열매를 먹으면 과연 건강을 담보할 수 있겠음인가?
저 계집 몸에서 까흘려낸 아이도 미인이 될 수 있겠음인가?
거죽은 반지르르 꾸밈으로써 세상 사람의 눈을 속일 수는 있겠음이나,
인자(仁者)는 경(敬), 성(誠)을 여의고는 결코 될 수 없다.
톱이나, 도끼 또는 비료로선 거기 이르를 수 없음이다.

그가 보기엔 나처럼 비료를 사용하지 않는 이가 이단(異端)으로 보였을 터인가?
각자는 자신의 욕심에 부역하는 바,
그가 가진 재주로서 도술을 부리며 천하를 어지럽힌다.
욕심에 눈이 가려 어둠의 장막이 내리면,
天地之純,古人之大體
천지 블루베리의 순결함과,
고인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게 된다.
슬픈 일이다.

비료야말로 인지(人智)의 결정체, 그 소산이다.
하지만 이 또한 교지(巧智)인 바라,
百家眾技(백가의 재주, 기예)에 불과하다.
한 때 크게 작물을 키우는데 장처가 있을 터이나,
天地之美,萬物之理
천지의 진선미, 만물의 이치에 가닿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과잉 축적 아질산염이 발암 작용을 일으키고,
허우대만 멀쩡하지 약하여 각종 병충해를 감당치 못한다.
이에 따라 농약 없이는 블루베리를 키우지 못하겠다고 아우성이다.
병충해에 강한 블루베리이지만,
하우스 안에 밀식하고,
비료를 처넣고 키우자니,
블루베리 꼴이 말이 아니다.

아는가?
우리 밭 블루베리엔 병이나 충 자체가 아예 없다.
병충해는 기실 비료나 농약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건강한 성체엔 애저녁에 병이나 충이 달라 붙지 못한다.

저들은 입을 삐죽거리며,
변명하여 말하곤 한다.
화학 농약이 아니라,
천연 농약을 조제하였다고 하지만,
이게 눈 가리고 아웅이라,
품은 곱절로 들고,
효과는 절반인 바라.

하지만 더욱 문제인 것은,
천연 농약이라는 것도,
독성(毒性)을 가진 것이라,
인간에게 마냥 좋다고 안심할 수 없다.
위태로울사.

저들은,
소출이 기천(幾千), 기만(幾萬)이라며,
稱神明之容
자신이 신이라, 미인이라 뽐내지만,
이게 다 거죽 헛자랑이라,
안으론 작물도, 농부도, 그리고 소비자도 앓는다.

무창계사 안에 병아리를 평당 수십 마리씩,
종이처럼 구겨놓고는 이로써 재주를 부리고 도술을 편다고 우쭐거리지만,
병아리는 이 생에 왔다가 포악스런 인간 때문에 지옥 구경만 하고 스러진다.
소비자 역시 각종 항생제, 성장제 따위에 노출되어 앓는다.

이 땅의 천하 술사라는 자들은,
동물들을 향하든,
식물들을 향하든,
모두 아귀가 되어,
저들을 괴롭힘으로써,
자신의 욕심을 끝 간 데 없이 채우려 든다.

夫不累於俗,不飾於物,不苟於人,不忮於眾,願天下之安寧以活民命,人我之養畢足而止,以此白心,古之道術有在於是者。

무릇 세속에 누되지 않고,
물건을 꾸미지 않으며,
사람에 대하여 구차하지 않으며,
여러 사람을 해치지 않아,

천하를 안녕케 하고,
사람 목숨을 살리고,
나와 너 모두를 기르는 것을 마치면,
더 나아가지 않고 멈추길 원한다.
이로써 그 마음을 맑게 함이니,
옛 도술은 여기에 터하고 있음이라.

이러함인데,
작금의 세상은 어떠한가?
천하인은 모두 색주가 계집들이 되어 거죽 분단장하기에 여념이 없고,
농부들은 하나 같이 장사꾼으로 나서,
비료 처넣고, 농약 듬뿍 발라,
크게, 많이 소출내기에 급급하다.

천하인은 모두 구차하게, 남을 해침으로써,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바쁘다.
이게 요즘 흉도 아닌 세상이다.
관(官)도 앞장 서서 사람들을 부추긴다.
농업기술센터를 가보아도,
농부들을 모두 사장이라 부른다.
누렇게 부황든 몰골들은 그 말에 취해,
가을 바람에 우쭐거리는 들판에 홀로 선 허재비가 된다.
공화(空華)로새,
빈 항아리 곁으로 바람이 지나자,
우우 울음 소리가 하늘가로 퍼지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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