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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피로감

소요유 : 2014. 8. 16. 10:26


죽음과 피로감

가을 하늘처럼,
창백하니 맑은 어느 날,
누군가는 죽겠다고 선언한다.

‘저는 특별법이 제정되지 않는다면 광화문 광장에서 죽을 것입니다.’

33일째 단식중인 '유민 아빠' 김영오씨의 말이다.

또 한편에선 이리 말하고 있다.

‘경제가 엉망인데, 이제 그만 하자, 피로감을 느낀다.’

피로(疲勞)란,
몸이나 마음의 괴로움이 누적되어 지쳐가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후자 역시 자신도 괴롭단 말이렷다.

각자는 자신의 처지에서,
사물을 바라보고 대하니,
동일한 사안에 대해 입장이 갈릴 수 있다.

龍生九子,各有所好

용이 아홉 마리 새끼를 낳았지만,
각기 다 다른 법.

허나, 세월호에 내가 탔을 수도 있으나,
다만 그 날 내가 그 자리에 없었을 뿐이다.
이리 그 자리에 나를 다시 환치해보면,
저 일은 그저 남의 일이 아니다.

사실 이리 생각해보는 것마저도 염치없는 짓이다.
굳이 내가 그 자리에 들어가 보아야,
사물의 이치를 알 수 있으랴?
사람이라면 이 참사 앞에,
단박에 아픔이 밀려오고 분노가 인다.

이는 보상금을 좀 몇 푼 더 챙겼다고 잦아들지 않는다.
원인을 밝히고, 책임을 따지고, 죄를 묻고 나서야,
이제 겨우 아픔을 추스리고, 분노를 다독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하니,
이게 아니 이뤄지는 한,
슬픔도, 분노도 멈출 수 없다.
이는 시간에 매어 있지 않다.
결코 시간의 함수가 아니란 말이다.

그러함인데,
단지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이유 때문에 피로감을 느낀다는,
저들의 물리적 해석능(解析能)은 얼마나 천박한가 말이다.
진정 상대하지 못할 비열한 족속들이다. 

그래,
이젠 저들 비인(非人)에게 이런 주문을 하지는 않겠다.
허나, 자신이 피로감을 느낀다한들,
이를 밖으로 내어 저 아픔의 당사자를 두 번 아프게 하는 게,
사람의 바른 도리라 할 수 있는가?

그저 단순한 교통사고일 뿐이라든가,
보상금을 노리고 떼를 쓰며 연출을 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는가?
정녕 인간이라면 말이다.

단순 교통사고라도 정권이 훼방하며, 진실을 가리고 은폐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설마하니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보상금을 더 노리고자 일을 꾸미랴?

피로감을 느끼면,
그냥 물러나 관심을 끄면 된다.
이게 최소한의 인간적 예의가 아니랴?

생명을 걸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있는 사람을,
앞에 두고 욕보이는 짓을 차마 할 수 있음인가?
정녕 사람이라면 말이다.

그런데 기실 가만히 헤아려 보면,
피로하다는 말은 그가 진짜로 피로하다는 말이 아니다.
피로하기 때문에 이젠 그만 두자는 말이 아니란 말이다.
이는 그가 이 사태를 달리 보고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는 언젠가,
홀로 광야에 내버려진 채 통곡을 하리라.

다른 사람 역시 그의 통곡에 피로감을 느낀들,
그의 슬픔은 뒤늦게 남을 원망할 형편이 되지 못하리라.

出門如見大賓,使民如承大祭。己所不欲,勿施於人。在邦無怨,在家無怨。

문을 나서면 큰 손님을 대하듯 하며,
사람을 부릴 때에는 큰 제사를 받들 듯 한다.
자기가 바라지 않는 일은 남에게 베풀지 마라.
나라에 원망이 없고, 집안에서도 원망이 없으리라.

난 기실 이 말씀이 좀 수준에 못 미친다고 본다.
왜 굳이 자신에게 비추어야 비로소 이치를 깨닫게 되는가?
사람의 마음 속엔 자신에게 의지하지 않고도 의당 알 수 있는 단초가 있다.
그가 진짜배기 사람이라면,
절로 부끄러움도 일고, 염치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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