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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선(農仙)

농사 : 2014. 10. 9. 18:43


내가 소싯적 공부를 하는데,
철학 교수가 이리 말씀하셨다.

원래 시험을 치게 하여 등급을 매기는 일은 탐탁지 않은 노릇이다.
허나 여기 학교 교육 당국이 성적표를 내라 하니 도리 없이 시험을 아니 볼 수 없다.
그리고는 시험을 치긴 하였는데,
한 두 문제 내놓고는 쓰려면 쓰고 말려면 말라는 식이었다.

대저, 현상계를 거닐다 보면,
평가를 하여 순위를 매기고,
이에 의지하여 공부를 점검하고,
공적을 따지게 됨이니라.

예컨대,
바둑 기사의 품계는 대개 9가지로 나눈다.

夫圍棋之品有九。一曰入神,二曰坐照,三曰具體,四曰通幽,五曰用智,六曰
小巧,七曰斗力,八曰若愚,九曰守拙。九品之外不可勝計,未能入格,今不複云
。《傳》曰﹕“生而知之者,上也;學而知之者,次也;困而學之又其次也。”
(棋經)

入神,坐照,具體,通幽,用智,小巧,斗力,若愚,守拙。
(입신, 좌조, 구체, 통유, 용지, 소교, 투력, 약우, 수졸)

세속 놀음이니 이리 단계를 두어,
차별함은 예사가 아니겠는가?

그래도 입신이니 좌조니 하며,
잔뜩 그럴싸하니 꾸며 위엄을 차리려 애썼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탈속(脫俗)하여 자운(紫雲) 속을 노니는 이들조차,
순위, 계차(階次)를 논하는데 등한히 하질 않는다.

가령, 장자(莊子)를 보면 이런 장면과 마주친다.

不離於宗,謂之天人。不離於精,謂之神人。不離於真,謂之至人。以天為宗,以德為本,以道為門,兆於變化,謂之聖人。以仁為恩,以義為理,以禮為行,以樂為和,薰然慈仁,謂之君子。以法為分,以名為表,以參為驗,以稽為決,其數一二三四是也。百官以此相齒,以事為常,以衣食為主,蕃息畜藏,老弱孤寡為意,皆有以養,民之理也。

여기 보면 天人, 神人, 至人, 聖人, 君子의 구별이 있다.
법으로 나누고, 이름으로 드러내고, 행으로 시험하고, 조사하여 결정을 내린다.
이 정도면 유가나 법가의 정밀함을 방불하고 있다 하겠다.

운급칠첨(雲笈七籤)엔 신선조차 차제(次第)로 구별을 짓고 있다.

其九仙者,第一上仙,二高仙,三大仙,四玄仙,五天仙,六真仙,七神仙,八灵仙,九至仙。

용성집선록(墉城集仙錄) 역시 비슷한 차별을 두고 있다.

第一上仙,號九天真王;第二次仙,號三天真皇;第三號太上真人;第四號飛天真人;第五號靈仙;第六號真人;第七號靈人;第八號飛仙;第九號仙人。

신선도 이리 계차가 많으니,
과시 그 번쇄(煩瑣)함이 속가의 셈법 형용을 능가하고 있다 하겠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선인(仙人)은 9등급 말단이다.
1등급 상선(上仙)으로 오르려면 선인도 땀깨나 흘려야 하리라.

불교로 들어가면,
여긴 속가의 셈법보다 사뭇 복잡하고, 아득하니 멀고도, 놀랍도록 크다.
가령 보살의 수행 단계만 하여도 52단계로 나눠져 있다.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 등각(等覺), 묘각(妙覺)

군대에 들어가면 신병은 외울 것이 엄청 많다.
머리가 나쁘면 제대로 외우지 못하여 저녁 점호 시간마다 곤욕을 치러야 한다.
이것만 하여도 군대 문화라는 것이,
개인의 인격을 얼마나 허투루 다루는지 알 수 있다.
내가 사회 초년병 시절 한창 유행하는 해병대 교관이 주도하는,
단체 집식 훈련에 차출되어 들어간 적이 있다.
이 녀석들이 종일 산을 넘고, 물 건너는 훈련으로 뺑뺑이를 돌리는데,
그도 모자라 긴 문장을 외우는 시험을 치르게 하였다.
제대로 못 외우면 박박 몰아세우며 닦달을 하였다.
이런 우라질 녀석들 같으니라고,
헐히 대우 받으며 석삼년 긴 세월을 군대에서 부역 당한 것도 부아가 나는데,
사회도 병이 들어 여기서도 군대문화가 여전하였다.
난 병법은 즐겨 공부를 하지만,
개인을 억압하는 군대 문화만큼은 절대 인용(忍容)하지 못하겠다.

그런데 여기 보살 수행 단계만 보아도 역시,
각 단계별 내용은커녕 이름만 외우려 하여도 이게 녹록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물론 외우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닦고 행하는 실천행이 요긴한 일이리라.
수행을 하다보면 이름 따위는 외우지 않아도 절로 알게 된다.
하여간 탈세간 불교 안의 법식이라는 것도,
이리 계차 차려 세상을 분절하고 있질 않은가 말이다.

내가 농사를 짓게 되면서,
난 이제 농선(農仙)이니라 이리 하였음이라,
하여 속가의 셈 놀음에선 좀 벗어나겠구나 하였음인데,
웬걸, 여기 농가(農家)의 법도도 유가(儒家)는 물론 도가(道家) 못지않다.

우선은 관에서 더 극성이다.
농업기술센터 교육을 받아보니,
1억 소득 농가 운운해대고,
사장님이라 부르며 은근히 경쟁을 부추긴다.
또한 농업경영체 등록을 하라 하여 응하긴 하였음인데,
별반 도움을 받은 것도 없는데,
조사한다고 성가시게 한다.
밭이 몇 평이며,
소득이 얼마며,
무엇을 재배하느냐,
연신 묻고 따지며 줄을 세운다.

발바닥이 갈라지고,
손목이 저리도록 농사를 짓지만,
영농비도 건지기 어려울 정도로 농산품은 값이 헐하다.

그러함인데,
SNS를 잘 해야 한다고 꾀고,
인터넷으로 판매를 잘 하여 억대 농부가 된 이가 있다며 부추긴다.
촌부가 비료 처넣고, 농약 치기도 바쁜데,
트윗질로 밤을 세우고, 페이스북에 코를 들이박고 종일 시간을 허비하랴?

내,
그저 소박한 농선(農仙)이 되려 하였음인데,
바깥에서 불어드는 바람은 하수상쩍어,
농심을 다치게 하고, 급기야는 산천초목을 태우려는 듯 자못 기세가 등등하다.

원래 신선이란 도를 이뤄 신통(神通) 즉 신과 맞잡이 할 경지에 이른 인간을 말한다.
(得道而有神通的人)
내가 농선(農仙)이 되고자 함은,
신과 너나들이 맘먹자고 함이 아니라,
그저 사람 노릇이나 잘 하고자 함이었음이다.

헌데,
이 동네도 여느 다른 곳과 다르지 않게,
계차 놀음이 한참이다.

농장 앞 도로를 오가는 차량.
대개 트럭을 몰고 오가는 이들은,
얼굴이 누렇다 못해 거무죽죽하니 변색이 되어 있다.
거의 표정이 굳어져 있어 나무토막들 같다.
신색(身色)만으로도 저들의 고단한 처지가 물씬 느껴진다.
농군들 아니면, 노가다 일꾼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승용차로 출퇴근 하는 이들은,
대개 공공기관에 근무하는 이들이다.
지방엔 관아(官衙)도 많고,
여기 적을 둔 벼슬아치, 아전들이 눈에 띄게 많다.

낯색이 모두 해반지르르 맑고 곱다.

군청, 읍사무소를 가보면,
군에서 제일 큰 건물은 대개 이들임을 알 수 있다.

至人無己,神人無功,聖人無名。

지인은 자기를 여의고,
신인은 공적을 무시하고,
성인은 명예를 떠난다 하였음인가?

그러함인데,
내가 시골에 들어와 가만히 관찰해보니,
농부야말로 제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이룬 공을 도시민에게 다 빼앗기고,
제 이름을 잃어버린 이가 아닌가 한다.

田夫無己,農夫無功,農民無名。

내가 그저 소박한 농선(農仙)이 되고자 하였음인데,
이리 애오라지 밭만 사랑하고, 욕심을 버리고, 분수를 지키고도,
과연 지고의 상선(上仙)인 상농(上農)이 될 수 있을런가?

보살 수행 단계 중 등각(等覺)이란,
곧 부처의 깨달음, 그 경지를 말한다.
예서 등(等)이란 영어로 하자면 equal쯤 된다.
상당(相當)하다, 같다란 뜻이다.

내 기왕 농선(農仙)이라 자처할 때,
이미 등선(等仙)일지니,
새삼 상선(上仙)을 별도로 구할 일이 있으랴?

밭 언덕에 오르면,
묘(妙)한 바람이 불어온다.
풀잎에 부서지는 달빛 따라,
온 세상은 은빛으로 제몸을 잦힌다.
이 밭에 서있음인데,
묘선(妙仙)을 어찌 달리 구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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