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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장 농법

농사 : 2014. 11. 22. 13:49


뜬장 농법

내가 며칠 전 일찍 잠을 청하고 있는데,
집사람이 깨운다.

지금 TV에서 농업 관련 프로그램이 진행되니 일어나 보란다.

귀찮지만 얼치기 농부인지라,
한 수라도 더 배워두려 일어나 앉았다.

‘농업의 미래 1부’

그들이 일컫길 농업 선진국이란 곳을 찾아다니며,
열심히 취재를 한 것이로되 내 눈엔 괴이쩍기 짝이 없어 보인다.
국내 농가도 몇몇 소개되고 있는데,
조만간 욕심 많은 우리네도 저 짓을 따라하고 말겠구나 싶다.

저들은 온실을 크게 짓고,
양액 시설을 거창하게 채비를 하였다.
베드 위에 도열하듯 심어져 있는 식물들은,
자동제어 장치에 의해 공급되는 양액을 흡수해서 커간다.
저들 사이를 자동 수레가 굴러가면서 열매를 수확해낸다.

그러니깐 식물들은 일생을 양액만 먹고 자란다.
흙 한번 만나지 못하고 인간이 처방한 물속에서,
뿌리를 헐벗긴 채 정처 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 뿐인가 때론 빛도 인공적으로 공급받는다.

난, 순간적으로 뜬장을 생각한다.
개장수들은 좁은 울안에 개들을 가둬두고 사육한다.
바닥은 구멍이 숭숭 뚫린 철망이다.
저들은 평생 흙 한번 밟아보지 못하고 살아간다.
발바닥은 갈라지고, 발가락은 구멍에 빠져 다 기형이 되고 만다.

개장수의 셈법으론 저리 좁은 울에 가둬 키워야,
증체(增體)에 유리하고, 관리 품이 적게 든다 여길 것이다.
저런 마음보라면 성장호르몬인들 조처하지 않을 것이며,
독한 항생제인들 어찌 삼갈 리 있겠음인가?

저리하여 도축된 개고기를 사람들은 보신탕집에 앉아 취식(取食)한다.
자신의 입맛을 위해 뭇 생명들이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 한 생을 지난다.
살 속엔 저들의 신음 소리가 무늬져 서려있으리며,
뼛속엔 고통의 진물, 독이 옹박혀 있으리라.

저 뜬장을 두고 그 누가 있어 ‘미래’라 부를 것이며,
첨단 경영 방식이라 칭송할 수 있으랴?

시설농장이라 칭하는 것들을 난 농장이라 부르지 않는다.
저것은 그냥 공장에 불과하다.
아니, 여느 공장은 차라리 낫다.
거긴 차가운 쇳덩어리를 다루므로 아픔은 없다.
하지만 저런 따위의 축산내지는 농업 공장은,
따뜻한 생명을 대상으로 저질러지기 때문에,
진홍 핏빛 아픔이 바닥에 흥건하고,
허공엔 단말마의 비명 소리가 그치질 않는다.

천륜을 저버린 패악의 농법이다.
아니, 저것은 감히 농법이라 부를 수 없다.
저곳은 농장이 아닌 공장이다.
아니, 그저 공장이라 부르기도 민망하다.
물건너 고을 선생께서 말씀한신 그저 천박(淺薄)한 짓거리라 할지니,
욕망의 소굴, 적당(賊黨)들의 적와(賊窩)라 할 밖에.

여기 잠시 중국 전설상의 짐승 도철(饕餮)을 소개한다.


(http://baike.sogou.com)


(神異經•西南荒經)
西南方有人焉,身多毛,頭上戴豕,貪如狼惡,好自積財,而不食人穀,彊者奪老弱者,畏羣而擊單,名曰饕餮

서남방에 사람 하나 있으니,
몸엔 털이 많고 머리는 돼지를 얹은 듯한 형상이다.
탐욕스럽기가 이리와 같고,
재물을 탐하길 즐긴다.
사람의 곡식을 먹지 않고,
노약자를 공격하여 빼앗으며,
무리를 꺼려, 홀로 된 자를 친다.
이를 도철이라 부른다.

(商末饕餮紋盉, http://cathay.ce.cn/pieces/200802/14/t20080214_14520419.shtml)


貪財為饕,貪食為餮。

재물을 탐하는 것을 도(饕),
음식을 탐하는 것을 철(餮)이라 한다.
 
욕심의 끝을 모르는 흉악한 짐승이 도철인 것이다.
그런데 내가 도철을 떠올리고 있는 것은,
오늘날의 우리들과 몹시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도철미식천당(饕餮美食天堂)

중국 식당들은 도철을 끌어들여 제 곳들을 꾸민다.
도철이 음식을 탐하는 것에 가탁(假託)하여,
자신들의 식당이 미식(美食)을 먹기엔 제일 좋은 천당이란 뜻이다.
먹기로 작정한다면 도철이 되어 한껏 부어라, 마셔라 즐기잔 말이렷다.

도대체가 도철과 미식이 함께 어우러질 관계인가?
탐(貪)과 미(美)가 이웃이 될 수 있음인가?
탐식(貪食)의 상징인 도철을 빌어 미식(美食)을 꾸미고 있는 상(相)을 두고,
나는 오늘날 우리들의 발가벗은 모습을 본다.

손님들의 욕망을 자극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운다.
도철의 탐식은 貪이 아니라 美로 순식간에 전도(顚倒)된다.
손님, 그대들의 탐식은 추한 게 아니다, 아름다운 게다.
이리 이르고 있는 것이다.
貪을 美로 포장하여 욕망을 팔 때,
식당 주인들은 돈을 번다. 貪財.

하니깐,
손님은 탐식(貪食)을 마음껏 하고,
주인은 탐재(貪財)를 욕심껏 할 수 있다.
미식(美食), 천당(天堂)이란 말을 앞잡이로 내세우는 순간,
미추(美醜)가 뒤집어 지고,
천당과 지옥이 뒤바뀌고 만다.
얼마나 재주가 뛰어난가?
이것은 마술인 게다.

掩義隱賊,好行兇慝,天下謂之渾沌。

의로움을 가리고, 사악함은 숨기며,
흉특함을 즐겨 행하는 녀석을 두고,
천하 사람은 혼돈이라고 부른다.

천하는 난(亂)에 들었음이다.

‘농업의 미래’를 빙자한 저 시설 공장에 공급되는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가?
당장 전기가 끊기면 더 이상 굴러갈 수 없다.
저들은 전기를 물처럼 흥청망청 쓰리라.
저리 에너지를 낭비하고서는 도대체가 십리인들 더 달려갈 수 있으랴?
저것은 지속 가능한 농법이 아니다.
그저 당대에 뽑아 쓸 수 있는 한 최대한 가용 자원을 동원하여,
이악스럽게 돈을 버는데 집중할 뿐,
그 밖의 것엔 책임을 지지 않는다.

NPK 위주로 처방된 양액이란 것은,
세상을 분절시켜, 어미와 아이를 헤어지게 하고, 하늘과 땅을 가른다.
사물을 본질이란 이름에 기대어 비본질적인 것으로 환원시킨다.

양액(養液)이란 말 그대로 영양물(營養水)이란 뜻이다.
NPK 등 속 식물이 필요로 하는 원소를 녹인 물이니,
이것으로서 식물이 온전히 자랄 수 있다고 함이다.
3대니, 16대니 웅얼거리며,
식물의 필수 원소라고 외치는 순간,
우리는 과학을 앞세운 저 천박한 환원주의의 노예가 된다.

그러니까,
뜬장에 개를 가두고는 사료를 먹이고는,
동물이 자랄 수 있는 필수 원소를 공급하였으니,
자라는데 문제가 없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말이다.

우리 인간은 땅위에서 하늘을 이고 살지 않던가? 
강아지는 땅 위에서 살던 것이 아니던가?
식물은 본시 흙에서 자라던 것이 아닌가?
흙의 역할이 거세된 현장에 서서,
우리는 양액 병을 하늘 높이 쳐들어 흔들며,
천하를 움켜쥐었다고 흥분하며 노래를 부른다.

난, 흙의 역할을 다 아지 못한다.
하지만 거기 사는 무수한 생물들이 있음을 안다.
하다못해 미생물은 흙을 분해하여 그들이 말하는 필수 원소외에,
효소, 비타민, 호르몬들을 흙속으로 방출한다.
이들은 NPK로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한 흙 속의 세계를 일궈낸다.
식물들은 이런 흙 속의 세상에 살아갈 때 평온함을 느낄 것이다.
난, 이것 하나만으로도 양액으로 선전되는 세상을 믿지 못하겠다.

양액 재배는 아이들에게 모유를 주지 않고,
우유를 주면서 할 도리를 다했다는 박정한 어미를 생각케 한다.
모유와 우유는 조성 내용이 다르다는 보고도 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milk만으로써 말할 수 없는 세상이 있음이다.
아이가 어미 품에 안겨 젖가슴을 만질 때 느끼는 경험이 없다면,
그가 자라서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있겠음인가?
어미가 고이 들려주는 자장가 소리,
엉덩이를 토닥이고, 환히 짓는 미소.
이 속에서 아이는 크고, 마음은 영근다.

바람을 맞아 화답하듯 이파리를 떨지도 못하고,
천둥, 번개를 대하여 놀라고, 울지도 못하고, 
단비를 만나 함빡 웃지도 못하며,
달빛에 젖어 고은 잠을 자지도 못하고,
흙의 품속에 안겨 안온(安穩)함을 느끼지도 못하고,
이러하고서도 정녕 식물이 온전히 자랄 수 있겠음인가?

식물 공장에서 거죽으론 제법 잘 자란 듯이 보일 터이지만,
저것은 분단장으로 꾸며 성장(盛裝)한 모습일 뿐,
거긴 긴장된 역사가 거세되어 있고,
생명의 아름다움이 지워져 있으며,
갈등과 사랑의 교감이 부재하다.

이를 두고 그 누가 있어 ‘미래’라 노래를 부르고 있는가?
‘농업의 미래’가 이 따위 천박한 것이라면,
그것은 농업, 식물의 미래뿐이 아니라,
인간 나아가 자연의 앞날을 흉히 위협하고 말리라.

심히 우울한 미래라 하지 않을 수 없음이다.

내, 하여,
저들의 짓거리들을 일러 뜬장 농법, 도철농법이라 부를 테다.
혹은 부평농법(浮萍農法)이라 칭하고자 한다.

부평초(浮萍草)는 물 위를 바람결에 이리저리 쓸리면서 자란다.
이게 요즘은 자취를 감추었다.
강하(江河) 농부들은 삶의 터를 버리고 떠났다.
그리고 공상인들이 몰려들자 물이 오염된 바로,
저들 부평초들은 삶의 터전을 잃어버렸다.
혹 남아 있는 농부들이 있다한들,
맹독 농약이니, 흉독한 제초제를 뿌려대니,
온 천지엔 도대체가 멀쩡한 개울 하나 남아 있지 않다.
허니, 어찌 부평초인들 온전하랴?
독하다.

헌데, 요망스런 짓거리를 즐겨 꾸미는 인간들은,
물이 아니라 땅에 뿌리를 내고 사는 뭇 식물들을 불러들여,
하나 같이 부평초로 만들고 있다.
부평초가 사라진 들녘 가운데,
유리감옥이 성을 이루고 있다.
그 안엔 죄인도 아니면서,
차꼬(着錮) 차고, 항쇄(項鎖)에 갇혀,
시름에 잠긴 식물들이 삼백예순 날 매양 울고 있다.
가엽다.

저들 식물이 속절없이 묶인 곳은,
야자수 껍질로 만든 속칭 베드란 것이다.
이것은 양액에 매양 젖어 한 차례 쓰면,
염류집적이 심하여 내다버려야 한다.
농토는 무지막지한 농부들이 비료를 퍼붓는다한들,
한두 해 쉬면 미생물이 염류를 분해하고, 우수에 씻겨 좀 회복이 되나,
쓰고 버린 베드는 농장 한 켠에 년년세세 쌓여 흉물이 되어 간다.
흉하다.

블루베리 농부 중엔 이게 피트모스와 비슷한즉,
그 대용으로 쓰겠다고 신이 나서 주어 가는 이도 있다.
허나 저것은 EC 농도가 높아 블루베리는 물론 어떤 작물도 자랄 곳이 못된다.
딱하다.

전기, 온열 따위의 에너지는 기갈이 든 양 있는 대로 마구 써재끼고,
양액이니, 베드니 하는 요망스런 물건은 공장에서 찍어내어 한껏 소비한다.
거기 천하의 식물들을 가둬 부평초로 만들고서는,
질산염 가득하니 짙푸르게 멍든 이파리,
NPK 물고문으로 허우대만 갖춘 성체(成體),
성장호르몬, 착색제로 분단장한 열매,
이러한 꼭두각시(傀儡) 식물들을 짓는다.
삿되다.

네들, 사람들이 밥만 먹고 살더냐?
동물들을 좁은 울에 가둬두고 사료만 주고 키우고도,
입맛만 다시며 혀를 낼름거릴 수 있음인가?
뭍식물들을 물에 띄우고도 열매가 달기를 바랄 수 있음인가?
슬프다.

‘농업의 미래’
네들은 이런 모습을 두고도 미래를 전망(展望)할 수 있음이더냐?
이, 천하의 전귀(錢鬼)들이라니.
참람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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