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비가 왔다고 말하고 싶으면 비가 왔다고 말하면 된다.

소요유/묵은 글 : 2008. 2. 28. 17:56


intro comment :
"모모YS 사이트에서 겪은 일"
(※ 관련 사연, 2008/02/26 - [소요유/묵은 글] - 강낭콩 말미 주석 참조)

***

모순(矛盾)이란 말이 있습니다.

어떤 방패도 뚫을 수 있는 창,
어떤 창도 막을 수 있는 방패.

한비자에 나오는 우화인데,
양자의 상호 존립을 배반하는 상황을 빗댈 때,
흔히 차용되어 쓰입니다.

본래, 한비자가 이 우화를 든 것은 유가를 비난하기 위한 것입니다.

위 방패와 창이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요와 순을 동시에 칭송할 수 없다라는 것이지요.

농부가 서로 논두렁 경계를 두고 시비를 다투고 있을 때,
순이 그곳에 가자 1년만에 논두렁은 정상으로 돌아갔으며,
어부가 어장을 두고 다투고 있을 때,
순이 그곳에 가서 고기잡이를 하자 역시 1년만에 다툼이 해결되었습니다.
도공이 도기를 조악품으로 만들자,
역시 그곳에 순이 가자 1년만에 튼튼한 도기가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한비자가 어떤 유자(儒者)에게 이리 물었습니다.

“그 때 요는 도대체 어디에 계셨습니까”

“요는 천자였다네.”

“그렇다면 요를 성인이라고 한 것은 어떤 뜻입니까 ?
성인이라면 세상의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을 터,
하니 세상에 나쁜 짓을 있을 수 없게 할 것이 아닙니까 ?
그렇게 되면, 농부, 어부가 미쳐 다투지 못하였을 것이며,
도공 역시 조악품을 만들지 못하였을 것이니,
순이 애써 교화를 펼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순이 그리 백성들의 잘못을 고치려고 한 것을 보면,
요에게도 실수가 있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요와 순을 동시에 성군이라고 칭송할 수는 없다는 것이 한비자의 주장입니다.
순을 칭송하는 순간 요의 잘못이 드러나고,
역으로, 요를 칭송하는 순간 순의 공덕은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대저,
보기만 해도 징그러운 누에를 거침없이 만지는 아낙네는,
벌레를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며,
허벅지가 헐도록 모시삼기를 하는 부녀자 역시,
제 몸 아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 모시삼기 :
쪼개진 모시올을 전지에 걸쳐놓고 손바닥에 침을 발라,
한 모시올의 머리쪽과 다른 모시올의 아래쪽 끝을 연결하여
허벅지 또는 무릎에 대고 비벼서 잇는다.
)

그것은 징그러움, 고단함을 감수한즉,
그 때서라야 달디 단 돈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 돈으로
자식을 키우고,
시부모를 공양하며,
늙은 영감 술값을 보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하니,
징그러움으로써, 삶이 지탱이 되고,
고단한즉,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것이지요.

***

끼리 무리짓고,
요순우탕이 모두 성군이라 칭송하지만,
세상의 악은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하기에 한비자는 말합니다.

“순이 1년 걸려 한가지 잘못을 고치고, 3년이 걸려서야 3가지 잘못을 고쳤을 뿐입니다.
순의 행위에는 한계가 있고 수명도 언젠가는 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악은 그칠 날이 없습니다.
한정이 있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 것에 대처한다고하면
고칠 수 있는 악은 극히 적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
상벌이야말로 세상을 복종케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째서 한가지 잘못을 고치는데 1년이나 기다려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
그런데도 순은 법령을 써서 온 세상 사람을 복종시키려 하지 않고,
오히려 제 발로 걸어가서 손수 일을 했습니다.
이 얼마나 책략에 어긋나는 짓입니까 ?
더군다나 자신의 몸을 괴롭힘으로써 사람을 감화시키려는 방법은
요순과 같은 훌륭한 사람들마저도 쉽게 이룩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

세상 사람들은 자신 하고는 직접 상관없는 문제에 이르러서는,
사랑이니, 포용이니 하며,
햇병아리처럼 어여삐 떠들지만,
막상 자신의 책임이 따르거나, 부담이 지불되어야 하는 마당이면,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거나,
욕심 사납게 으르렁 거리며 대듭니다.

원래 한비자는 출신이 韓나라란 작은 나라의 公子입니다.
그의 활동시기는 까마득히 머나먼 기원전 3세기 때입니다.
그는 말더듬이였지만, 글을 잘 써,
일찍이 진시황은 그의 글을 읽고는 이 자와 교분을 맺을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토로할 정도였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그는 법가(法家)의 진정한 완성자라고 생각합니다.
한 때 노자, 공자보다 그를 더 사랑하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흔히 오해되듯이 냉혹해서가 아니라,
그가 너무 외로울 것 같아서...
그의 슬픔을 알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한비자가 말한 것 중에 이런 말도 있습니다.
“상고시대에는 도덕으로 다투었고, 中世에는 지모로 싸웠다.
그러나 지금은 힘으로 서로 견주고 있다.”

그의 이 말은 전국시대 말기라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2200여년이란 역사의 벽을 뛰어넘어 지금, 여기 생생히 가슴팍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 참고로 춘추시대보다 전국시대는 더 망가진 시대입니다.
온 나라가 부국강병을 기치로 한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고자
혈안이 된 말 그대로 천하 쟁패의 시대입니다. -

당시에 이미 옛날처럼 정의(正義)란 기치를 내걸고,
그에 따르고 살면 족한 시대가 아니었던 것이지요.
정의는 힘을 잃고, 대신 힘이 정의가 돼버린 시대.
그러므로 그런 시대 상황을 외면하고는 누구라도 제대로 살아남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한비자는 그런즉 정의를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악의을 선택하였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비자의 악의에는 인간을 향한 진한 애수가 번져 있습니다.
그가 선택한 악의란 형태를 달리한 선의의 다른 이름일런지도 모릅니다.
그가 말하는 악의란, 선의로부터 이탈된 인간의 선의에 대한 역설적인 갈망인 것입니다.
한비자에겐 악의란 이 어지러운 천하를 독해낼 수 있는 유일한 key word이자,
이를 통해 천하를 구원해낼 추동력으로 택하여진 것입니다.

9년 치수 삼과기문불입(三過其門不入)의 주인공,
“禹王도 강을 다른 곳으로 흐르게 하자, 마을 사람들이 기왓장을 우에게 던졌다”라며
한비자는 말합니다.
자연을 정복하는 행위는 분명 악이겠으나,
우가 행한 惡으로 인해 해마다 겪었던 장강의 범람은 다스려지고,
사람들은 농사를 편하게 짓고 잘 살게 됩니다.

하기사, 지금은 치산치수가 아니라도, 멀쩡한 국토를 배 갈라,
뼈 발라 먹고, 창새기까지 내어먹고자 합니다.
오늘, 이 이악스런 사시장철 동토에 사는
우리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기왓장을 던지는 게 아니라,
돈 벼락 쏟아져라 노래 부르며, 다투어 칭송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부르던 사랑 노래는 이미 돈 타령으로 으깨져버렸습니다.
그런즉 한비자가 택한 악의란
그 상실된 사랑에 대한 슬픔이자 분노에 다름이 아닐런지요 ?
이미 깨져버린 사랑을, 부르짖지만 그 소리는 공허한 골짜기를
장송곡처럼 메아리쳐 나갈 뿐입니다.
그러하니, 한비자는 사랑을, 신뢰를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모두들 사랑을 노래하고, 신뢰를, 정의를 부르짖지만,
실인즉, 제 가슴 따스히 덮히기 위한 감상 한 조각이 귀하고,
제 집 울 둘러칠 엽전 한 닢을 헤아리기 분주합니다.

그 위선에 한비자는 악의를 비수처럼 되들이밉니다.
이 역설적 형식을 통해 한비자는 슬픔과 분노를 토해냅니다.
그러하니, 한비자란 흔히 잘 못 알려진,
저 피도 눈물도 없는 무자비한 법가가 아닐 것이라
이 bongta는 감히 짐작해보는 것입니다.
그는 전국시대, 가장 위대한 휴머니스트라고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노장의 무위자연(無爲自然),
공자의 인의예지(仁義禮智)
한비자의 형명법술(刑名法術)

도니, 덕이니 하며 의젓하니 체면을 차리다가,
막상 벌어진 현실 문제에 임하여서는
슬그머니 발을 빼버리는 유가, 도가의 위선보다는
맞부딪혀 이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려는 한비자의 갈심진력하는 모습이
때로는 한결 아름답습니다.

실인즉 이야말로 인간을 향한 절절한 호소가 아닐런지요 ?
이를 저처럼 슬픔과 분노로 독해하여도 되겠습니다만,
기쁨과 환희로 독해한들 아니 될 까닭이 어디에 있겠는지요 ?

저 역시 곧잘 분노하고 슬퍼합니다.
저는 이 극적인 allegory를 통해 상실된 사랑을 향해 울부짖고 있는 것입니다.
저의 allegory는 제가 아닌 그 부재를 증명하고 있는 alibi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의 alibi는 분노와 슬픔이란 제 allegory를 통해 通天弔喪되고 있는 것입니다.

***

돌이켜 보면,
저는 부지불식간에 이 한비자의 분노와 슬픔이란 문법을 빌어
이 너절한 사태를 재단하였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찌 보면 그저 지나치고 말면 스러질 것이긴 합니다.
하지만, 봄 되면 다시 싹 튀어날 마음의 질긴 씨앗이기도 합니다.

어쨋건,
세상의 이치란 다기다지한 것,
길이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며,
천하에 강 줄기 역시 무수히 많습니다.

제가 가고 있던 길목,
그 멱을 막아서자고들면, 또 아니 훌륭한 가르침이 없겠습니까 ?

불효한 올빼미에 대한 고사를 아시는지요 ?

춘추시대 정장공의 불효에 대해 영고숙이라는 현인이 말한 것인데,
그 내용이 이러합니다.

“이 새 이름은 올빼미라고 합니다.
낮이면 태산도 보지 못하며, 밤이면 능히 秋毫까지 분별합니다.
즉 조그만 것은 볼 줄 알지만, 큰 것은 못봅니다.
그런데 이 올빼미는 어릴 때 어미의 젖을 먹고 일단 장성하면
그 어미를 쪼아 먹기 때문에 세상엔 불효한 새라고 합니다.”

오늘 아침 세수를 하면서,
문득 이 고사를 떠올리게 된 것은,
제가 마치 이 올빼미 같이 작은 것은 보지만,
막상 백주 거리에서 큰 것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 산골일기에 적혀 있는 글도 다시 상기해보았습니다.

“늦은 밤, 콩 고르다가 친구의 전화를 받다.
오늘 길상사 법문에서 달라이라마 님의 이야기를 들었단다. 
달라이라마 님은 어떤 사람을 만나든 두 가지 생각을 하신단다.
하나는 이 사람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두번째는 이 사람에게서 나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꼭 내게 들려주시는 말씀 같다.
갈 길이 참 멀기도 하다.”

‘달라이라마’라면 한국에선 대단히 훌륭하신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현실이 모순과 위선에 가득 차 있음을 아시고 개탄하였다지요.
활불로 알려진 ‘린포체’들중에는 민중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하고,
사치와 방일에 빠진 이들이 많음은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 이들이 한국에 초청되어 와서 관정의식을 행하며 장사하는 비리도 많다고 합니다.
저희 동네 주변은 사찰이 물 묻은 손에 깨알 붙듯이 도도처처에 널려 있습니다.
이곳에도 가끔씩 ‘린포체’들 모시고 여는 법회 플랭카드가 내걸리곤 합니다.

문득 생각해봅니다.
달라이라마가 저들 사이비 린포체들을 위해,
무엇을 하시려고 하였으며,
무엇을 배우셨을 텐가 ?

그것이 용서와 사랑일까 ?
아니면, 분노와 슬픔이셨을까 ?

우리가 히말라야 등정에 성공하였다고 뽐내지만,
실인즉 많은 돈, 짐꾼들의 수고를 바탕으로 제 명호를 허공에 새겼을 뿐인 것이 아닌가 ?
그게 돈으로 자부심이 구매되는 기록이라거나,
제 소망을 채우려는 욕구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면.
저들 짐꾼들의 등정기록은 도대체 무슨 이름으로 불리어져야 마땅할런가 ?

만약 차마 이름을 붙일 수 없다면,
차라리 제 힘으로 앞 동산에 올라,
맘껏 가슴을 부풀리며 노래를 부르는 게,
한결 떳떳한 게 아닐까 ?

소승 다음 대승이 나온 것은 (역설적이게도)
역사적으로는 상인 계급의 대두에 따라
그 현실적인 토양이 마련된 것이긴 합니다만,
어쨋건 대중을 향한 갸륵한 골배질이라 할 것입니다.

(* 골배질 :
얼음이 얼거나 풀릴 무렵에 얼음을 깨고 뱃길을 만들어 배를 건너게 하는 일.
)

사랑, 용서란 풀씨 날려
어둑한 골방에서,
기껏 소승 아라한을 꿈꾸며,
제 가냘픈 앙가슴을 덥히며 낙락한 마음을 거둡니다.

하지만,
저들 셰르파를
분노와 슬픔이란 형식을 빌어,
기억하지 못한다면,
대승은 없습니다.
저는 이 ‘봄의 침묵’을 '소승' 또는 ‘위선’이라고 부릅니다.

***

‘비가 왔다고 말하고 싶으면 비가 왔다고 말하면 된다.’
체홉이 이리 말했다고 하더군요.

제 앞선 글을 다 지우고
마감 글을 올립니다.
창밖엔 지금 비 대신 눈이 가득합니다.

"갈 길이 참 멀기도 하다.”
그런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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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묵은 글 : 2008. 2. 28. 17:5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