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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보복

소요유 : 2015. 9. 25. 17:58


사적 보복


살아가면서 사랑하는 이를 만나고, 귀한 인연을 맺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원수를 만나고, 미운 인연을 짓는다.


운전을 하다보면 절로 화가 날 때가 많다.


앞 차의 거리가 미처 반 차 거리도 아니 되는 틈을 비집고 갑자기 끼어들면서도,

미안하다는 표시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녀석들이 있다.


갈림길에서 방향지시등을 켜지 않고 느닷없이 길을 꺾어 가는 이들도 심심치 않게 만난다.

이런 차를 뒤따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급제동을 걸며 속도를 늦추어야 한다.


영업용 택시는 습관적으로 은근슬쩍 차선을 밟고 주행하며,

여차직 제 필요에 따라 옆 차로를 훔치려 한다.

이에 따라 곁을 지나는 운전자는 바짝 긴장하며 좁아진 차폭을 의식하여야 한다.

저들은 차 하나로 차로(車路) 두 개를 소비하며,

제 사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거리낌 없이 종일 남의 자원을 빼앗는다.

마치 입은 하나인데 양 손에 떡을 들고,

모두 동시에 먹을 궁리를 트는 욕심쟁이 먹보와 다름이 없다.


최근 당국은 보복운전을 엄히 다루겠다고 한다.

하지만, 보복(報復)은 과연 무조건적으로 나쁜가?

난 이런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매체에서 제공하는 영상을 보면 무지막지한 보복도 많이 벌어진다.

이런 것을 보면 그 누구일지라도 ‘보복운전’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저 폭거를 두둔할 수 없다.


하지만, 보복운전이 왜 일어났는가?

이 부분에 대하여는 정당한 점검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생각해보면, 저들이라 하여 까닭 없이 저리 험한 짓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인가 선행하는 못 마땅한 일을 겪었을 것이다.

이를 되갚으려 하다 보니 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도를 넘는 짓을 자행하였을 것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보복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규정되는 새로운 행위가 나쁜 것이다.

선행 원인, 촉발 동기로 시작되었지만,

저들이 저지른 행위는 새로운 위법성을 일으킨다.

마땅히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한다.


보복운전이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행위를 처벌하려면,

마땅히 선행하는 그릇된 상대 행위에 대하여도,

우리의 의식을 넓혀 그 잘못을 제대로 환기하여야 한다.

이것이 제각된 채 결과만을 나무라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준법(遵法)

법을 지켜라!

이리 간단히 말하지만,

법이 나를 보호해주지 못하게 될 때,

사적 구제에 나서게 된다.


오늘 날 이 땅의 법적 체계 내에선,

사적 구제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정당방위, 긴급피난 등의 자력 구제 형식이 있긴 하나, 

제한적이고 경직되어 이로부터 법률적 보호를 받기는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보복 권한을 공법(公法)이 독점적으로 다 갖고 있으면서도,

사적인 원한을 온전히 해결해주지 않는다면,

개인의 불만을 어디에 호소할 수 있겠는가?


子不復仇,非子。


자식이 아비 원수를 갚지 않으면 자식이 아니다.


고래로 내려오는 말씀이다.

사적인 물리력 행사를 정당화 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笞墓


오자서(伍子胥)는 원수인 초평왕(楚平王)의 능침(陵寢)을 파굴하고,

시신을 꺼내 태장을 친다.


그래서일까?

오자서는 복수의 논리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상대가 보복할 여지를 주지 않으려면 죽이는 것만치 확실한 것이 없다.


월왕 구천(句踐)이 오나라로 잡혀오자,

오자서(子胥)는 후환을 없애버리려면 그를 죽여야 한다고 진언한다. 

하지만 이미 월의 뇌물로 노골노골해진 태재비(太宰嚭)는 왕의 명예심을 건드리며,

살려줄 것을 청한다.

부차는 태재비의 진언을 택하여 그를 살려주고 만다.

결국은 이로 인해 후에 오나라는 월나라에게 망하고 부차는 자살하게 된다.


伍子胥復諫吳王曰:「臣聞,王者攻敵國克之則加以誅,故後無報復之憂,遂免子孫之患。今越王已入石室,宜早圖之,後必為吳之患。」太宰嚭曰:「昔者齊桓割燕所至之地以貺燕公,而齊君獲其美名;宋襄濟河而戰,春秋以多其義:功立而名稱,軍敗而德存。今大王誠赦越王,則功冠於五霸,名越於前古。」吳王曰:「待吾疾愈,方為大宰赦之。」

(吳越春秋)


보복운전을 하지 못하게 하려면,

보복자를 엄히 응징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사법당국의 태도를 보자,

난 오자서, 그의 이 장면을 떠올리고 만다.


그래 이것도 일응 효과를 볼 수는 있으리라.

하지만 억울함을 당하고도 법이 무서워 그저 참아만 내는 것이 능사인가?

기중 삭이지 못하고 울화병에 걸리는 이도 있을 것이며,

거꾸로 상대가 보복운전을 하지 못할 터이니까,

도리어 이를 기화로 마구잡이로 얌체 운전을 하는 이가 늘어날 소지는 없는가?


우리는 오자서처럼 보복 예비자를 죽일 수 없다.

오늘날 국가를 운영하는 책임 위치에 있는 자라면,

손쉬운 길을 택할 것이 아니라,

그 행위의 원인을 먼저 찾아 규제하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가령 영업용 택시가 두 개 차로를 상시로 점거하는 행위를 하면,

적절히 벌을 가하는 시스템을 마련해볼 만하다.

블랙박스가 제법 많이 보급이 되었은즉,

이런 행위를 지켜본 목격자가 당국에 신고를 하면 포상을 하고,

위법 해당자는 일정 수준 이상의 도를 넘으면 벌을 가하면 어떨까 싶다.

내가 수양이 덜 되어서겠지만,

영업용 택시로부터 이런 방해를 받으면,

차를 세워놓고 저들을 되우 나무라고 싶을 때가 적지 않다.


보복운전자를 벌하기에 앞서,

선행 원인 제공자를 함께 규율하는 고민이 따라야 한다.


此有故彼有,此生故彼生。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음이요,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기느니.


원인이 있은즉 그 길에 이끌려 결과가 따라오는 법.

보복운전 역시 보복만 나무라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그 이전의 원인 행위를 점검하는 노력을 등한히 한다면,

기도한대로의 사회적 효과를 얻지 못할 것이다.

마치 근인(根因)을 찾아 치료하지 못하고,

대증(對症) 치료에 급급한 엉터리 의사처럼,

환자를 제대로 구하지 못하지 않을까 저어된다.


無風不起浪


바람이 없으면 풍랑이 일지 않는다.


바람은 여전히 부는데,

풍랑만 탓하고 있다면,

이 얼마나 안일한 처사인가?


무릇 대증치료(對症治療, symptomatic treatment)는 비용이 헐하게 든다.

게다가 급한 대로 일시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다.

하지만 나중에 반드시 근본 원인을 찾아 치료하여야 한다.

이를 등한히 하면 예기치 않은 부작용이 생기거나,

외려 병을 깊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증상이 같지만 병인(病因)이 다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증상 치료가 병을 다스리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다행이나,

때로는 병을 악화시키는 작용을 할 수도 있다.


先治標急症,後治主病主證


먼저 드러난 급한 증세를 다스리되,

후에 주 병을 치료한다.


이게 따르지 않는 대증요법은,

얼치기 돌팔이나 의지하는 법임을 알아야 한다.


대인치료(對因治療, Etiological Treatment)라 함은,

치본(治本) 곧 본을 다스리며 치료하는 방법이다.

병인(病因)을 찾아 발본색원(拔本塞源)한다.

근본 원인을 뽑아내고, 원천을 막아버린다. 


하니까 교통당국은 보복운전자를 엄벌하여,

보복운전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생각이다.

그들은 보복운전자를 병인으로 보고 있다.

내가 보기엔 그저 손쉬운 치말(治末) 방책에 불과하다.


나는 저들과 생각이 다르다.

보복운전이 일어나는 원인을 보복운전자에게 모두 돌릴 수 없다.

저들을 충동하고, 분격하게 하는 원인 행위가 별도로 있다고 보는 것이다.

운전을 하다보면 예기치 않게 다른 이에게 폐를 끼칠 수도 있다.

이 때 미안하다는 표시를 하는데 우리네 사람들은 대단히 인색하다.

진로를 방해받고도 마음이 편한 사람은 없다.

이럴 할 때 상대가 미안한 신호를 보내면 이내 마음은 풀리고, 너그러워진다.


방향지시등 켜는 것을 생활화하자.

양보를 받아 감사하다는 마음,

폐를 끼쳐 사과드린다는 말씀,

이를 아낌없이 표시하자.

서너 차례 비상등을 깜빡이며 상대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자.


난 생각한다.

도대체가 이를 행하지 않는다면,

어찌 이를 두고 불한당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음인가?


내가 여름 한 철 농장과 서울 집을 매일 오갔는데,

왕복 3~4 시간 거리이다.

목침만 한 틈을 비집고 대가리를 들이밀고 끼어 드는 녀석들.

방향지시등 켜지 않고 종일 온 거리를 주행하는 치들,

차선을 밟아 가며 양쪽 차로를 홀로 훔쳐가는 택시들,

이런 얌체, 무뢰배들을 잡아 꿰자면,

하룻 낮에 두 두름을 족히 채우리라.


내 수양이 잘 된 편이 아니지만,

그날 태양이 조금만 더 강렬하니 비췄다면,

나라도 필시 보복운전을 자행하고 말았으리라.


그러함에도 꾹 참아낸 것은,

애오라지 이 염치 모르는 사람들이 사는 예토(穢土)에,

함께 살아가는 죄인임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보복에 관하여는 여기 내가 지난번에,

써둔 글 몇 편이 있다.

별도로 소개해두련다.


☞ 여성과 위생, 그리고 제초에 대하여

☞ 애자지원필보(睚眦之怨必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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