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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韓非)의 비극

소요유 : 2015. 11. 2. 19:51


한비(韓非)의 비극


한비는 형명학(刑名學)을 주로 연구하였다.

최후엔 자기가 도리어 무정한 가쇄(枷鎖) 즉 칼과 족쇄를 채우는 신세가 되었다.

이야말로 일종의 저주를 방불한다 하겠다.

이는 상앙(商鞅)의 경우와 유사하다.

(※ 상앙에 대하여는 나의 다른 글들을 참고할 것.)

이는 후대에 선비들이 제 행동을 부득불 신중하게 하는 단초가 되기도 하였다.


慎終追遠


이 글귀는 납골당에 가면 가끔씩 접하게 된다.

이를 흔히 상(喪)을 치를 때 예를 다하고, 제사를 지낼 때 정성을 다하라.

이런 뜻으로 해석을 한다.


헌데 終을 어떤 한 일의 업(業), 또는 결과로 보고,

遠을 앞 선 과거의 선행하는 원인으로 본다면,

이리 새겨 볼 수도 있다.


삼가 마침을, 바라는 대로 되길 기대한다면,

제대로 된 시작을 하였는지 잘 헤아려 보아야 한다.


이는 곧 다음 말씀과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菩薩畏因,衆生畏果


보살은 원인을 두려워하고,

중생은 결과를 두려워한다.


이는 또한 다음 말씀에 연결된다.


君子居易以俟命,小人行險以僥倖。

(中庸)


군자는 초촐하니 살아가며 천명을 기다리나,

소인은 위험을 무릅쓰고 살아가며 요행을 바란다.


한비의 삶을 돌아보면, 

제 신념을 지키며 살아가다,

천명을 맞이한 군자의 한 전형을 본다.


이사의 시기심에 의해,

그는 생을 비극적으로 마감한다.


헌데, 동문수학한 이사(李斯)를 어찌 믿지 않을 수 있는가?

처음부터 그를 의심한다면 이 또한 의롭다 할 수 없다.

나중에서야 이사의 흑심을 알았다 한들, 이 또한 천명인 것을.


한비는 한(韓)나라의 귀족 출신이다.

진(秦)나라에서 승상이 된 이사(李斯)와는 동문수학한 처지다.

순자(苟子)를 스승으로 모셨다.

이치껏 말하자면, 육국(六國)엔 변사(辨士)가 많았다.

말하지 않아도 구변들이 과시 흐르는 물과 같았다.

말재주를 닦는 것은 기본 공부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한비는 공교롭게도 병으로 심한 말더듬이이었다.

하루하루가 뭇 사람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당시의 정황은 어떠하였는가?

진왕(秦王) 영정(贏政)은 함곡관을 열고 나가서,

제일 먼저 노리려 하는 것이 한(韓)나라였다.


진왕이 칼을 겨눈 곳은 바로 남쪽에 있는 이웃 나라였다.

한왕뿐이 아니라 당시의 대다수 군왕들은 소인과 가까이 하고,

주지육림에 빠져 있었다.

당연 정직한 신하들은 눈의 가시였다.

변경이 위급할 때, 대장군들은 집안의 어린아이를 껴안고 있었을 뿐이다.

임시로 징집하여 일진을 이끌고 나섰으나,

진왕은 순식간에 두들겨 부셨다.


이런 문제가 벌어지고 있는 때에,

한비는 이상적인 포부를 간직한 사람이었다.

한눈에도 한나라는 하루가 다르게 국세가 약해져갔다.

언제나 근심에 싸이고, 울분에 차있었다.

수차례 한왕에게 헌책(獻策)하였으나,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한비는 한숨을 내뱉고,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며,

책 하나를 저술하였으니 사기엔 이 장면이 이리 기술되어 있다.

과거 역사상 정치의 득실 변천을 살펴,

孤憤, 五蠹, 內, 外儲, 説林, 説難, 등

55편, 10만여 자의 한비자(韓非子)란 책을 지어내다. 

(觀往者得失之變,故作孤憤、五蠹、內外儲、說林、說難十餘萬言。- 史記)


후에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은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에서 이리 말하고 있다.


余獨悲韓子為說難而不能自脫耳。


나는 홀로, 한비가 세난(說難)을 짓고서도,

스스로 화를 벗어나지 못한 것을 슬퍼한다.


혹자는 이리 말한다.

한비는 스스로 심히 높은 경지라 여겼지만, 

밝게 아는데 결함이 있었다.

그렇지만 저런 비웃음거리는 일반 개인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유독 한비에게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나는 이것이 결함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는 다 명운(命運)일 뿐이다.

이사와 한 스승을 섬기며 동문수학한 처지이니,

진실한 사람이라면 형제와 다름없이 사귀었을 것이다.


以信交友 以誠待人 


믿음으로서 친구를 사귀고,

성심으로 사람을 대한다.


자고로 사람을 사귈 때는 믿음을 으뜸으로 생각했다.


以德交友 患難與共

以誠交友 肝膽相照

以知交友 見多識廣

以道交友 法樂融融


그러함이니,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먼데서 친구가 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이런 경지로 나아가게 된다.


어찌 의심을 가지고 이사를 대할 수 있으랴?


손자병법의 저자인 손빈(孫臏)도 명색의 병법가이지만,

동문수학한 방연에게 크게 배신당하고 무릎 밑을 절단 당하고 만다.

이로서 그는 빈(臏)이란 이름에 걸맞는 처지로 전락한다.

빈(臏)은 종지뼈를 잘리는 형벌의 이름이기도 하다.


손빈은 동문수학한 사이인 방연(龐涓)의 초대로 위(魏)나라로 갔지만,

재주를 시기하는 방연의 꾐에 빠져 빈(臏)이란 형벌을 받고 만다.

기왕에 출세하여, 위나라 정승으로 있는 방연의 천거로 위나라에 와서,

출세를 꿈꾸던 손빈이야말로 애초에 방연을 귀인이라 여기고,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방연을 신뢰하였으리라.

하지만 그는 미끼에 걸린 ‘중고기’가 되고 말았다.


방연은 손빈의 위인 됨이 자기보다 훨씬 뛰어남을 알고,

그를 끌어들여 애저녁에 절단내버리고자 계획한 것이다.


고금(古今)을 통해 가장 위대한 병법가로 추앙받는 손빈이지만,

소리장도(笑裏藏刀)라,

방연의 웃음 속에 숨겨진 칼날을 미처 경계하지 못했다.


손빈과 방연도 귀곡자를 스승으로 섬긴 동문지간이다.


믿음으로써 사귀었으나,

후에 배반의 결과로 나타났을 뿐.

어찌 믿음을 결함의 증거라 이를 수 있겠음인가?

이는 다 명운(命運)이라 할 따름인저.

(※ 참고 글 : ☞ 2008/02/15 - [소요유/묵은 글] - 배반의 장미)


다만 손빈은 살아남아 방연에게 설욕을 하였으나,

한비는 죽고 말았으니 애석한 일이다.

그가 만약 목숨을 건져 한나라로 돌아 왔다면,

이사나 진왕에게 복수를 할 수 있었을까?


기원전 233년, 한왕 안(安) 5년, 진왕 14년은,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기 12년 전 시기다.

한나라는 진나라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날 아무런 수단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한나라는 최후에 한비자를 생각해냈다.

시험 삼아 한비자를 진에 파견해보기로 한다.

(거꾸로 진에서 한비자를 요구했다는 설도 있다.

이는 사기의 입장인데 이하에서 언급할 예정이다.)

진왕은 형명(刑名)을 좋아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한비에 대하여는 소문을 들어왔다.

진왕은 그를 그리워하며 한번 꼭 만나보기를 원하였으니,

여기 한비의 비극적 인생의 서막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비는 이번 행차의 사명을 잊지 않았다.

한비는 책 하나를 진왕에게 바쳤다.

진왕은 책을 읽고는 破釜沉舟之心, 즉 전쟁 출전의 마음을 일으켰다.

(※ 破釜沉舟之心 : 출진할 때, 밥솥을 부수고, 배를 침몰시킨다는 뜻이니,

즉 돌아올 것을 기약하지 않고, 불퇴전의 각오로 싸우겠단 소리다.)

진왕의 공격적 배짱에 맞아 크게 기뻐했다.

하지만 조금 의심을 두고서는, 바로 임용하지는 않았다. 


진왕은 한비를 과연 만났을까?

한의 사절단으로 왔을 터이니 접견시 당연 보았을 것이다.

게다가 진왕은 한비를 꼭 보기를 그리워하지 않았던가?


이는 다음 사기의 기술 내용을 보면 확연해진다.


人或傳其書至秦。秦王見孤憤、五蠹之書,曰:「嗟乎,寡人得見此人與之游,死不恨矣!」李斯曰:「此韓非之所著書也。」秦因急攻韓。韓王始不用非,及急,乃遣非使秦。秦王悅之,未信用。


어떤 이가 그 책(한비자)을 진나라에 전하다.

진왕이 孤憤、五蠹 편을 읽고는 이리 탄식하다. 


‘아, 과인이 이 사람을 만나 교유할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구나!’


이사가 말하다.


‘이는 한비가 지은 책입니다.’


진은 이런 까닭으로 급히 한나라를 쳐들어갔다.

한왕은 한비를 임용하지 않았으니 급해졌다.

한비를 진에 사절로 보내다.

진왕은 기뻐하였으나, 신용하지는 않았다.


사기의 바로 이 부분은 극적인 장면으로,

예로부터 문학, 희극의 소재로 즐겨 쓰였다.


한나라가 멸망을 면하는 댓가로 한비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한비는 조국인 한나라로부터 냉대를 받았다.

진나라에 와서 진의 신하로 봉사할 마음이 있었을까?

설혹 그럴 마음이 있다하여도 다른 한의 사신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 본심을 드러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는 반면, 

혹자는 한비는 강직하여 그리 변절할 인물이 결코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


자, 바로 윗 장면에 이어, 이사는 진왕에게 이리 진언한다.


「韓非,韓之諸公子也。今王欲并諸侯,非終為韓不為秦,此人之情也。今王不用,久留而歸之,此自遺患也,不如以過法誅之。」秦王以為然,下吏治非。李斯使人遺非藥,使自殺。韓非欲自陳,不得見。秦王後悔之,使人赦之,非已死矣。申子、韓子皆著書,傳於後世,學者多有。余獨悲韓子為說難而不能自脫耳。


한비는 한나라의 공자인지라,

이제 제후들을 아우르려면, 

한비는 한을 위하지, 진을 위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인지상정입니다.

이제 왕께서 그를 쓰지 않으시면,

오래 머무른다한들, 한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는 우환을 남기는 일입니다.

법을 어겼다는 구실로 죽여 버림과 같지 않습니다.


진왕은 그럴싸하다 여겨, 한비의 죄를 묻도록 하였다.

이사는 사람을 시켜 비에게 독약을 보내,

스스로 자살을 하도록 하였다.

한비는 진왕에게 직접 진술하길 원했으나,

만날 도리가 없었다.

진왕이 후에 이를 후회하며,

사람을 시켜 사면토록 하였다.

허나, 한비는 이미 죽은 후였다.


신자(신불해)와 한비자는 모두 책을 지어 후세에 전했다.

이를 배우는 학자가 많았다.

나는 홀로, 한비가 세난(說難)을 짓고서도,

스스로 화를 벗어나지 못한 것을 슬퍼한다.


이사는 순자 밑에서 한비와 함께 수학한 처지이다.

그러함인데 과연 한비를 해코지 할 수 있는가?

이사는 본래 초(楚)나라 사람이다.

진에서 처음에 객경(客卿)에 있었다 하는데,

기실 이것은 허울만 좋을 뿐 실권은 거의 없는 지위다.

이것이 시기심이 발동하여 동창(同窓)의 정의(情誼)를 버릴 만한 조건이 되는가?

이하에 다룰 테지만, 

그가 애초부터 명리를 구하기 위해 순자 밑으로 들어왔다 한들,

젊은 시절 한비와 함께 공부를 하며 진리를 찾고, 인생의 의의를 참구하던,

일말의 그 순수하였을 마음은 과연 어디에 남아 있단 말인가?


옛 사람들은 한비의 죽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였던 것인가?


或問:「韓非作《說難》之書而卒死乎說難,敢問何反也?」曰:「說難蓋其所以死乎?」曰:「何也?」曰:「君子以禮動,以義止,合則進,否則退,確乎不憂其不合也。夫說人而憂其不合,則亦無所不至矣!」或曰:「說之不合,非憂邪?」曰:「說不由道,憂也;由道而不合,非憂也。」

(揚子法言)


혹자가 묻는다.


‘한비가 세난을 지었는데, 그러면서도 그 세난 때문에 죽었다.

감히 묻는데 어찌 그에 반하여 죽게 되었는가?‘


양자가 말하다.


‘아마 세난 때문에 죽게 되었으리라?’


‘어째 그런가?’


‘군자는 예로 움직이고, 의로 멈춘다. 

합치하면 나아가고, 그렇지 않으면 물러난다.

(※ 합치 : 자기의 소신, 주청(奏請)을 왕이 받아들일 경우)

합치하지 않는데도 우려하지 않고 확고한 뜻을 굽히지 않았다.

무릇 세객은 그 합치하지 않음을 근심한다.

즉 그치는 바가 없다.’


혹자는 이리 말한다.


‘설득하는 일이란, 합치하지 않으면 근심하지 않는가?’


양자가 말한다.


‘설득함이 도에 따르지 않으면 근심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게 도에 따르면 근심할 바 없다.’


그러니까 양자는 한비가 죽음을 맞이한 것은,

도를 따르지 않고 제 신념만을 믿고 제 주장을 마구 폈기 때문이란 것이다.

한비는 뒤로 도망갈 길을 남겨 두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즉 자신감이 지나쳤다는 말이다.


한편 사마광(司馬光)의 비판은 통렬하다.


臣光曰:臣聞君子親其親以及人之親,愛其國以及人之國,是以功大名美而享有百福也。今非為秦畫謀,而首欲覆其宗國,以售其言,罪固不容於死矣,烏足愍哉! (資治通鑑)


신(사마광)이 듣건대,

군자는 자기 가족에 친하여 사람 일반에까지 친함이 미치며,

자기 나라를 사랑하여, 다른 사람들의 나라까지 사랑이 미칩니다.

그런즉 공이 크면 이름이 아름답고 백가지 복을 향유합니다.

이제 한비는 진나라를 위해 모략을 획책하였으니,

자신의 나라를 뒤엎고자 한 것입니다. 

말을 팔아 계략을 부렸으니,

그 죄는 죽음에 용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조금도 불쌍할 것이 없습니다.


사마광 당시 정국은 구법파와 신법파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었다.

사마광은 이 중 구법파에 속하였으니, 보수주의자라 할 수 있다.

황제의 영에 의해 통감을 19년간에 걸쳐 완성하였다.

臣光曰로 시작되는 부분은 사마광 자신의 견해를 특별히 밝히고자 할 때,

특별히 쓰는 구성 형식이다.


한비에 대한 평 역시 보수주의자의 역사관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한비가 조국인 한(韓)을 배신하였다는 근거 사료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기실, 한비 작이 아니라는 비평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외려 존한(存韓)편에선 한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주장을 볼 수 있다.


한비가 직접 짓지 않았으리라는 부분을 제외하고 논하여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한비는 물론 한나라 사람이다.

하지만 그가 품은 사상은 하나의 나라에만 국한되는 편협된 것이 아니다.

그는 인간 심리에 대한 근원적인 통찰에 기초한 인간 경영 원리이자,

천하 국가 경영 원리를 밝혔다. 

그런 그가 진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일반론적인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설파하였으면,

하였지, 단 하나의 나라를 위한 방책을 제시하며 자신을 팔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설혹 만에 하나 그럴 의사가 있었다한들,

이사에 의해 진작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리고 있는 처지인즉,

적극 진나라에 부역할 틈조차 없었다.

사마광의 주장은 체재에 복속된 보수주의자의 편협된 시각이었을 뿐,

객관적인 역사 기술로 보기 어렵다.


사마광 그는 근거도 부족한 한비의 획모를 탄할 것이 아니라,

위대한 사상가요 실천 개혁가인 한비 하나도 품지 못한,

한왕(韓王) 안(安)의 암둔(闇鈍) 함을 먼저 통렬하게 비판하였어야 한다.

하기사 체제내 인사인 그에게 이런 일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망한 노릇이긴 하다.


한편, 사람에 대한 평가는 결과에 매몰되기 일쑤이다.

난, 기억한다.


노 대통령은 도쿄방송(TBS)이 일본 전역에 방영한 '한국 노무현 대통령 솔직하게 직접 대화'라는 주제의 90분짜리 토론에 참석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일본 여성 방청객의 질문에 "과거에는 김구 선생이었으나 정치적으로 성공을 못해 그 뒤 링컨으로 바꿨다"고 대답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27583)


과연 성공과 실패는 무슨 잣대로 매겨지는 것인가?

과정을 제각하고 결과에만 집착한다면,

우리는 한비를 이사와 함께 다시 죽이는 일에 동참하고 있다 하겠다.

난, 노무현 그의 죽음이란 결과와 그의 꿈 그리고 정치적 현실 성패를 결부 시키지 않는다. 

냉정하게 그의 공과를 헤아릴 뿐이다.


후대 학자 또는 사가들의, 한 인물을 둔 포폄(褒貶)은 실로 다양하여, 

자신의 입장에 따라 정반대의 주장을 펴기 일쑤다.


차라리 양자(揚子)의 비판은 일면의 진실을 담고 있다.

그는 세객 일반의 심리 상태를 잘 지적하고 있다.

다만 한비자가 과연 그러한 인물인가에 대한 증거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사(李斯)는 그 위인의 됨됨이를 평하기 쉽다.


見吏舍廁中鼠食不絜,近人犬,數驚恐之。斯入倉,觀倉中鼠,食積粟,居大廡之下,不見人犬之憂。於是李斯乃嘆曰 人之賢不肖譬如鼠矣,在所自處耳!

乃從荀卿學帝王之術。學已成,度楚王不足事,而六國皆弱,無可為建功者,欲西入秦。

(史記)


관청 측간의 쥐들은 더러운 것을 먹고, 

사람이나 개들이 가까이 가면,

수시로 겁먹고 놀란 채 살아가는 것을 보았다.


헌데 창고에 들어가 거기 살아가는 쥐들을 보았더니,

곡식을 쌓아놓고 먹으며, 큰 곁채에 살며, 

사람이나 개들로부터 해를 입을 염려가 없었다.

이에 이사는 탄식하며 말한다.


‘사람의 현명함과 못남은 마치 쥐와 같으니,

그가 처한 곳에 달려 있구나’


이에 이사는 발심하여 순자에게 달려가 제왕학을 배우게 된다.


배움을 끝내자 초왕은 섬길 만하지 못하고, 

육국은 모두 약소하니, 공을 이룰 수 없다 판단하여 진나라로 들어가기로 한다.


辭於荀卿曰 斯聞得時無怠,今萬乘方爭時,游者主事。今秦王欲吞天下,稱帝而治,此布衣馳騖之時而游說者之秋也。處卑賤之位而計不為者,此禽鹿視肉,人面而能閒行者耳。故詬莫大於卑賤,而悲莫甚於窮困。久處卑賤之位,困苦之地,非世而惡利,自託於無為,此非士之情也。故斯將西說秦王矣。


순자에게 작별인사를 하며 이리 말한다.


‘저는 때를 만나면 게으름을 피우며 늦지 말라고 들었습니다.

이제 바야흐로 만승의 나라들이 때를 다투고 있으니, 세객들이 일을 도맡고 있습니다.

이제 진왕의 천하를 집어삼키려 하고, 황제를 칭하며, 다스리려 합니다.

이는 벼슬이 없는 자들이 달려 나갈 때이며, 세객들의 시대가 온 것입니다. 

비천한 자리에 있으며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면,

이는 짐승이 고기를 보고도,

사람이 보고 있다고 그냥 지나는 것과 같습니다.

고로 가장 큰 치욕은 비천한 자리에 있는 것이며,

가장 큰 슬픔은 빈곤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비천한 지위와, 곤궁한 자리에 있으면서,

세상을 비난하고 이익을 미워하면서,

스스로 무위(無爲)에 의탁하는 것은,

선비의 마음이 아닙니다.

그런즉 저는 서쪽으로 가서 진왕에게 유세를 하려 합니다.’


사기의 이 장면, 특히 욕서입진(欲西入秦) 여기에 이르면,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떠올리게 된다.

달마 대사가 서쪽 인도에서 동쪽 중국으로 들어온 뜻은 무엇이냐?

이 물음으로부터 갖은 공안이 나와 풋중들을 괴롭혔다.

헌데 욕서입진은 거꾸로 서쪽으로 들어가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뜻을 새기기 위해 머리통을 싸매고 고민할 것도 없이,

부귀공명(富貴功名)을 탐하기 위해 짐승의 삶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아, 동과 서가, 그리고 가고 옴이 이리도 다르구나.


그러던 그도 끝내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二世二年七月,具斯五刑,論腰斬咸陽市。斯出獄,與其中子俱執,顧謂其中子曰:「吾欲與若復牽黃犬俱出上蔡東門逐狡兔,豈可得乎!」遂父子相哭,而夷三族。


이세 황제 2년 7월, 

이사에게 오형을 갖추어, 죄를 묻고, 함양시에서 허리를 자르게 하였다.

이사가 함께 잡힌 둘째 아들과 함께 옥에서 나와,

그 아들을 돌아보며 이리 말하다.


‘내가 너와 더불어 다시 누런 개를 끌고,

상채 동문으로 가서 토끼 사냥을 하려 하였는데,

이제 어찌 그리 할 수 있겠는가?’


마침내 아비와 아들은 통곡을 하였다.

삼족이 모두 죽임을 당하다.


동문인 한비까지 죽음으로 몰아넣고,

명리의 극을 탐하다,

사소한 일상의 즐거움조차 누리지 못하고 말았지 않은가?


욕서입진(欲西入秦)


오늘날,

조사가 서쪽에서 온 까닭을 묻는 이는 없는데, 

진나라로 들어가려는 자는 상기도 그치질 않는다. 


(내용 중 일부는 중국 鳳凰網의 자료를 참고하였으나,

그를 전적으로 따르지 않고, 나의 비판적 의견을 새로 개진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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