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무늬, reality, idea

소요유/묵은 글 : 2008. 3. 4. 11:10


intro comment :
"모모YS 사이트에서 겪은 일"
(※ 관련 사연, 2008/02/26 - [소요유/묵은 글] - 강낭콩 말미 주석 참조)

***

천문(天文)이라고 할 때, 文은 글월문이니,
이를 글자 그대로 하늘의 글 또는 하늘의 문장쯤으로 여기는 사람이 혹 있을까 싶다.
그리 새겨도 얼추 그럴사하니, 뜻을 풀어내는데 크게 어긋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원래 여기서 쓰이는 文은 紋과 같은 뜻이니 ‘무늬’로 새겨야 바르다.
하늘엔 별, 달, 해가 벌려져 있다.
천에 수를 놓아 무늬를 만들듯,
하늘가에 별들이 열차(列次)지어 반짝인다.
(※ 列次 : '하늘 구역을 나열한 것'이란 송명호 선생의 연구가 있음.)
그 아름다운 하늘의 문양이 천문인게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人文, 地文 역시 이런 풀이에 의지하여 이해하면,
어의가 바로 짚어진다.

人文이란 사람들이 살림살이(living, life)를 해나가는 중에,
꾸며낸 문화를 일컫는 것이 아니겠는가 ?
‘꾸며냈다’라는 것이 무엇인가 ?

텅 빈 하늘이 쓸쓸하시니,
누군가 거기 별들을 벌려놓고 꾸며놓으신 게다.
그 누군가가 누가 되었든 그 역시 하늘의 허랑함을 그냥은 견디어내기 어려웠을까 ?

이게 天文이라면, 人文은 이러하리라.

때로 하늘은 노하시어 천둥번개 내리시고,
땅은 쩍쩍 갈라지며 인간을 꾸짖는다.
하지만, 봄이면 속삭이듯 시냇물 흐르고
가을이면 맛난 열매가 익는다.
이 때 인간들은 나름대로의 꾸밈들,
예하건데, 춤, 노래, 가면, 장신구, 토템, 샤먼 등을 동원하여
희노애락 자신들의 감정을 실어펴낸다.

이리 제 살림에 꾸밈을 보태,
쓸쓸함을 달래고,
흥겨움을 북돋는다.
이런 소박함들이 발전하여 문화일반을 일구어내는 게 아닐까 ?

만약, 天文에서 꾸밈을 제거하고 남은 게 하늘의 허공이고,
人文에서 꾸밈을 제거하고 남은 게,
천지자연 건공중(乾空中)에 불과하다고 이른다면,
거꾸로 꾸밈이야말로 현실이라 불리우는 바로 그것이 아닐까 ?

체면차려 조금 양보한다면,
현실로 올라가는 사다리 같은 게 아닌가 ?
나는 이런 상상속에 잠시 든다.

절집에 가면 단청이 울긋불긋 그리 요란할 수가 없다.
제 아무리 무아, 무상을 가르치는 불교지만,
막상 부처가 거하신 그곳은 그리도 자지러질듯 화려한 단청 올려 꾸민다.
그 뿐인가 불상엔 금박까지 입혀 지극히 높이 장엄(莊嚴)한다.

장엄은 불경에 보면 善美飾, 功德飾 등으로 국토, 몸을 꾸미는 것을 일컫곤 한다.
이 때 飾이 곧 꾸밈이 아닌가 ?
하니 장엄을 영어로는 sublimity로 번역해도 좋지만,
나는 그냥 단순히 decoration이란 보다 솔직하니 직설적인 말로 남에게 새겨내보이곤 한다.

( * 잊기 전에 잠깐 여담을 끼어 넣는다면,
이오덕 선생의 글쓰기 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선생은 말글을 써야지, 책글을 쓰는 것을 경계하시곤 했다.
한자말, 꾸밈말도 글에서는 가능한 한 삼가 쓰기를 권하셨다.
여기서는 이 모두에 대한 내나름 생각을 펼 여가가 없다.
다만 지나는 길에 하나만 지적하고자 한다.
문식(文飾), 문채(文彩)라는 말이 있다.
천문, 인문처럼 글에도 꾸밈과 빛남이 있음을 가리키고 있는 말이다.
천, 지, 인은 물론이거니와 文에도 꾸밈을 빗기지 못할 사연이 있음이다.
선생은 아마도 소문(素文)을 지향하시지 않았는가 싶다.
소문을 짓는 대표적인 사람으로 나는 김규항을 꼽고 싶다.
내가 사뭇 좋아하는 인격이요 문장이다.
이와 대척점에 선 글은 번문(繁文) 또는 윤문(潤文)쯤 될까 싶다.
이에 대하여는 곁길인즉, 여기서는 그냥 바삐 지나친다.
)

가없이 높으신 부처의 가르침도,
장엄을 통해 가까이 한다.
이게 중생의 한계요,
이내 도리(?)가 아닌가 말이다.

이 장엄이란 사다리를 빌어,
저 곳을 짐작하듯이 건넌다.
행여 건너기나 제대로 할까나 ?
대부분은 건너기는커녕 거기 머물러
진탕 욕심내고, 성내고, 어리석음 속에
회술레를 당하고는 생을 마감한다.

(* 회술레 :
예전에, 목을 벨 죄인을 처형하기 전에 얼굴에 회칠을 한 후 사람들 앞에 내돌리던 일.
)

탐진치(貪瞋痴) 이를 삼독(三毒)이라 부른다면,
그리고 그 격랑 고해 한가운데 우리가 던져진 존재라고 한다면,
삼독이야말로 人文의 근원이요,
장엄(?)된 현실태 그 자체가 아닐까 ?

욕심으로 지어낸 그 현장을 우리는 짐짓 태연히 현실이라 명명한다.
욕심의 주인공은 그를 욕심, 욕망이라고 결코 부르지 않는다.
욕심을 장엄하여, 그를 현실이란 이름으로 점잖히 바꿔 부른다.

이 때, 욕심이 절제된 현장,
궁리(窮理) - 이치를 쫓는 모습을 대하게 되면,
외려 '현실감 없어' 보인다.

7일 중 6일 욕심에 거하고,
단 하루 주님 앞에 선다.
종일 낟알 헤아리고,
밤엔 별 헤아리며,
한주일의, 하루의 욕망을 사함 받고,
자신을 위로한다.
이를 현실감 있게 산다고 자부한다.

이게 주님을 또는 별을, 부처를 능욕한 것은 아닌가 ?
나는 가끔 이리 회의한다.
아니 세상을 요령있게 사는 방책일런가 ?

***

실제의 혈액형이 무엇이건간에,
나는 재미 삼아,
사람의 기질을 이리 나누어보곤 한다.

A형 : logic
B형 : emotional
O형 : real
AB형 : ideal

A형과 B형, O형과 AB형이 각기 기질적으로 대립된다.
O형은 현실에 굳건히 터를 내리고 사는 현실주의자,
AB형은 하늘의 뜻을 좇는 이상주의자 이리 배대할 수 있으리라.

나는 여기 주모도 나그네들도 나의 기질 테스트로 시험해본 바 있다.
사뭇 무엄한 짓거리다.
나 혼자 즐겼을 뿐,
감추어도 될 것이나,
이리 밝혔은즉 용서가 될런가 ? ㅎㅎ

라파엘로의 그림 ‘아테네 학당’을 보면
플라톤은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손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것을 허공중에 각기 나누어져 이배향지(以背向之) 등돌려
뿔뿔이 흩어져 각행기로(各行己路) 걸어가는 것으로 봐야할 것인가 ?

하지만, 정직하게 말하면
세상을 현실주의와 이상주의로 분할된 프리즘으로 관찰하는 것은
별로 그럴 듯한 태도가 아니다.
대부분은 위험에 놓여 있거나 또는 초라한 태도에 기인하곤 한다.
때문에 나는 이런 이분법을 경계한다.

곧잘 현실주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현실에 대한 비관적 전망에 길들여진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이 말을 차용하며,
타자를 이상주의로 몰아 붙이기도 한다.

반대로 이상주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현실의 중압감을 이겨내지 못하여
idea의 성곽 속으로 숨어 든다.
그리곤 성외(城外) 사람들을 비루한 사람들이라 비웃는다.

그런데 진정 현실주의자, 이상주의자로 나뉠 사람이 있기나 있을까 ?

각자는 각기 자신의 현실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기실 현실주의자다.

각자는 자신의 꿈을 꾼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꿈을 꾸는 한 우리 모두는 이상주의자가 아닐런가 ?

그러니 현실주의와 이상주의란 구별의 실익은 자기강박 속에 놓여 있거나,
세상을 분할하여 이해하려는 사람들의 편의속에서만 기능하고 존재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양심과 신념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남에게 현실 또는 이상이란 이름으로 불리어지든 아니든간에 말이다.

소수자, 약자의 이해를 대변하고, 그들의 권익 향상을 위해 애쓰는 이들이 있다.
예하건데, 예전같으면 독립운동 하시던 분들이 그렇고,
지금 같으면 비정규직, 여성, 장애인, 동물 등의
지위와 권익 향상에 이바지 하시고 계시는 분들이리라.

멀쩡한 국토를 배갈라 돈 줍자는 허갈든 이들이 가득 찬,
이땅의 현실에선 이들이 벌이는 운동이라는 게 도시 전망이 밝지 않다.
전망이 어둡다 하여 이들을 현실감 없는 분들이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
아니면 이상주의자라 치부해버리고 말 것인가 ?

기실, 이다지도 오염돼버리고만 역사현실이란 바다에
일엽편주 떠다니면서,
우리가 그래도 이만큼 절망하지 않는 것은,
가물거리게나마 비추이는 이런 분들이 밝힌 등불 때문이 아닐까 ?


***
***


댓글 모음

ys :

인문의 뜻풀이가 사뭇 재미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근디, 제 혈액형은 어찌 나왔는지 궁금하네요...

bongta :

橫看成嶺側成峰
處處看山各不同
不識廬山眞面目
只綠身在此山中
(廬山-蘇東坡)

모로 보니 재인 듯, 옆에서 보니 봉인 듯
곳곳마다 보는 산 서로서로 다르고나,
여산의 참얼굴 알아볼 수 없기는
다만 이 내 몸이 이 산 속에 있음이네...

봄 아지랑이 두고,
그 누가 그를 구름 또는 안개라 이름하여 부를 수 있으랴.

아지랑이가 한자로 하면 아주 재미있습니다.
야마(野馬), 유사(遊絲)...
‘야마’ 정도면 규모도 크고, 기상현상이 아주 불안정한 모습일 듯 싶고,
우리나라에서는 ‘유사’가 아주 썩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실처럼 가는 기운들이 버들가지처럼 요리저리 흔들리며 노는 모습이라니,
은은하니 시적이기까지 합니다.
여간 잘 그려낸 게 아닙니다.

YS 주모는 유사(遊絲)처럼 뵈입니다.

음전하신 가운데
사려 올린 향인 듯
한자락 幻 흐르는 유사(遊絲)
그 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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