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평균 회귀

소요유 : 2016. 3. 1. 12:06


평균 회귀와 미래 예측

 

내가 오늘 동영상 하나를 접하게 되었다.

 

☞ 동영상 하나

 

사람들은 제 신념에 이리도 충실하구나.

 

이런 분들의 행위 양식이 궁금해졌다.

해서 관련 동영상을 하나 더 보게 되었다.

땅굴 문제에 관한 한, 이분은 이미 저명 인사였던 게다.

나는 내친 김에 땅굴에 관련된 다른 분의 동영상도 좀 보게 되었다.

 

이 부분은 내가 가진 정보가 충분치 않으므로,

논할 위치에 서있지 못하다.

 

다만, 애초대로 제 신념에 찬 사람들에 대한 감상내지는,

이로부터 야기된 문제를 따라가 보려 하는 것이다.

사전 전제의 말씀을 드리거니와,

이제부터 쓰는 이야기는,

지적한 동영상의 주인공 개인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다.

나는 ‘신념에 찬 인간’ 유형이란 추상화된 주제에 문제의식을 가졌을 뿐이다.

일개 개인에 전혀 관심이 없다.

 

개인의 신념, 가치 체계를 존중한다.

설사, 내 생각, 사상과 같지 않다한들,

타자의 인생에 내가 관여할 이유가 없다.

도대체가 나는 이런 따위에 정력을 기우릴 정도로 한가하지 않은 것이다.

 

이제, 프란시스 골턴 (Francis Galton, 1822~1911)을 앞세우고, 말을 이끌어 보고자 한다.

이 사람은 영국인으로 통계학계에선 입문 과정에서 흔히 소개되곤 한다.

 

골턴은 부모의 키와 자녀의 키 사이에는 일정한 관계가 있으며,

이를 회귀법칙(law of regression)이라 불렀다.

그러니까 키는 세대 간 유전이 되며, 평균값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가령 부모 키가 크면 자녀 키가 크고,

반대로 부모 키가 작으면 자녀 키가 작아지는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그 변이(variation) 폭이 세대를 거쳐 가면서도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은,

회귀법칙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부모 키와 자녀의 키 사이의 관계는 선형함수를 이루는데,

이 양자의 관계 비율을 ratio of regression이라 불렀다.

이는 오늘 날 통계학의 회귀방정식, 상관계수와 개념이 비슷하다.

 

하지만, 이미 당시에도 존재하던 회귀식을 구하는 최소자승법을 골턴은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자료를 그림으로 그린 후, 적당히 눈대중으로 상관계수를 정했다.

게다가 단순한 부모 키가 아니라,

어머니 키에 1.08 가중치를 주어 부모 키를 평균하였고,

자녀 키 역시 여자에겐 1.08의 가중치를 가하였다.

(※ 최소자승법 : method of least squares

어떤 시스템의 해(解)방정식을 근사적으로 구하는 방법이다.

구하려는 해와 실제 사이의 ‘오차의 제곱’의 총합이 최소가 되는 조건을 찾는 방법.)

 

또 다른 통계학자인 케틀레(Adolph Quetelet)는,

자료의 중심이 전체 자료의 대푯값이라 생각하였다.

여기서 중심이란 자세히 논하지 않고, 그냥 자료의 평균값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가도록 한다.
  (물론 통계학적으로 mean, median, mode, range는 모두 다르다.
  이들 간 차이에 대하여는 이 링크를 참고 하라. )

하지만 골턴은 중심이 아니라 중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료에 관심을 가졌다.

골턴은 통계학 자체가 아닌 유전학, 특히 우생학에 집중하였다.

따라서 집단의 중심(평균)적인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특별한 천재들에 관심이 많았다.

 

예컨대 정규분포의 끄트머리, 특히나 오른쪽 꼬리 부분에 주목하였다.

그는 특출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의 출산은 장려하고,

그렇지 못한 열등한 자의 출산은 제한하자는 주장을 하였다.

 

평균값으로 세상의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면 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노태우는 보통 사람론을 폈다.

케틀레는 평균적인 사람들을 beautiful of all which is good이라 하였다.

케틀레야 통계학자이니까, 평균값으로써 세상의 현상을,

하나의 관찰, 분석 단위로 특정할 수 있음을 즐거워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노 씨의 보통 사람론은 순전 정치적 수사에 불과할 뿐,

일고의 가치도 없는 엉터리로 나는 이에 대한 생각을 예전에 말하였다.

 

가우스(C. F. Gauss, 1777-1855)가 새롭게 해석한 바에 따르면,

정규분포의 중심은 관측 평균값, 좌우 나머지 부분은 오차 값이 된다.

하지만, 골턴의 주 관심부분은 평균값이 아니라 좌우 꼬리 부분이다.

그 역시 중심 값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모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가령 천재 남자와 부유한 상속녀 간에 결혼을 하여,

세대 간 유전을 지속적으로 꼬리 부분으로 옮겨 가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자손을 남기지 못했다.

 

 

(ⓒstudy.com)

 

(※ 정규분포 : normal distribution

이에 대한 설명은 다음을 참고할 것.

내가 접한 것 중에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가장 친절하게,

그리고 훌륭하게 잘 설명하고 있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22&contents_id=2490)

 

자, 내 이야기를 할 준비가 얼추 끝났다.

정규분포의 평균값이라는 것이 세상의 많은 일을 설명할 수 있는 대푯값인가?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히 우리는 원하는 바를 얻게 되었는가?

 

가령 주식투자자치고 이동평균선이란 것을 모르는 이가 없다.

하지만 이를 이용하여 큰 성과를 보았다는 이를 찾기 어렵다.

만약 평균값이라는 것이 주가를 대변하는데 유익하다면,

이를 이용하여 주식투자를 하는 사람들이 재미를 좀 보았다면 좋았을 터인데,

불행하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통계학에선 일반 현상은 평균으로 회귀(regression to mean)한다고 가르친다.

주식투자자는 평균 회귀(mean reversion)라 하여,

오른 주가는 다시 내려 평균치로 수렴하고,

내린 주가는 평균치로 이끌려 들어온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충분히 내렸다고 여긴 주식이 부도가 나서 영원히 오르지 못하고,

지평선 밖으로 사라지기도 하며,

거꾸로, 주가수익비율(PER)이 과도하게 높은 데도,

높은 주가 수준을 상당 기간 유지하는 주식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문제는 평균으로 회귀하거나, 아니 그러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설혹, 평균으로 회귀한다고 하여도 문제는 있다.

 

즉 평균으로 복귀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거나, 더딘 경우,

여기 적응하거나 예측하는 것은 쉽지 않다.

게다가 평균이란 것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황 조건에 따라 쉼 없이 이동하기도 한다.

 

이러할 경우엔 평균 회귀에 기초하여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주먹구구로 예측하는 것에 비해 더 나을 것도 없다.

게다가 주식투자의 경우 평균 근처 구간이 아니라,

평균을 훨씬 벗어난 구간에서야,

초과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

마치 골턴의 예처럼, 정규분포의 꼬리 부분에 처하여야,

우생학적 기대 결과를 얻어낼 수 있듯이,

주식 투자 역시 평균을 벗어난 주가 수준을 노려야,

초과 수익을 얻을 기회가 많아진다.

 

종교적 맹신에 빠진 이들,

과도한 자기 신념에 충실한 이들을 보면,

나는 저들이 일반적 성질 집단 내의 정규분포의 꼬리 부분에 처한 모습을 연상하게 된다.

 

꼬리 부분에 처한 저들이 폐쇄 공간에 함께 모여,

내부적으로 신념을 서로 교환하고, 강화할 때,

마치 골턴의 우생학적 대응처럼 꼬리 부분이 따로 결집하여,

저들만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평균 회귀론은 물리학적 세계라면 인간계보다는 더 쉽게 적용될 수 있다.

하지만 주식시장과 같은 인간이 의지와 감정이 개입하는 영역에선,

평균 회귀론은 그다지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 같다.

 

현대 사회에선 지탄을 받는 골턴의 우생학이란 것도,

기실 인간계 내부적으로는 얼마든지 목격할 수 있다.

가령 재벌, 정치권력 집단끼리 또는 이들 상호 간에,

폐쇄적인 통혼을 통해 정규분포의 우(右) 꼬리 부분 간의 결속을 강화한다.

 

여기 한 연구 결과를 잠깐 검토해본다.

나이토 아시오는 폐쇄집단의 심리적 오작동 기제를 밝혔다.

 

(불안감에서 전능감(全能感)이 발생하는 구조 - 왜 인간은 괴물이 되는가)

 

간단히 설명하자면 존재 자체가 불안하다고 느끼는 사람 또는 집단은,

세계가 잘못된 듯하다는 막연한 불안감과 초조감에 싸인다는 것이다.

이 존재론적 불완전감에 직면하였을 때, 내지르는 소리가 '열 받아'인 것이다.

현실 속에서도 이런 이들을 곧잘 목격하고 있다.

바로 문제아이들이라 불리우는 일진들, 그들은 입에 이런 소리를 담고 살아간다.

 

이들은 늘 이런 분노를 느낀다.

문제는 이 분노는 무엇인가 윤곽이 뚜렷한 분개나 불만이 아니다.

존재하는 것 자체가 불안다고 느끼는 것이기에, 어디로부터 그것을 찾아낼 수 없다.

 

존재론적 불완전감.

 

이들은 급기야, 자신의 시스템을 오작동 시킨다.

집단의 폭력으로써 형성되는 전능감에 의해 이 분노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기분을 느낀다.

이 묘한 기분은 존재론적 불안감을 초기 조건으로 해서,

발생하는 그 불완전감의 반전 현상이다.

즉 심리 시스템이 불완전감으로 인해 오작동을 일으켜서,

돌연 세상과 자신이 힘으로 충만하고,

모든 것이 구제될 것만 같은 무한의 감각이 생성된다.

 

이것은 거의 마약 먹었을 때와 비슷한 상태인 것이다.

현실에선 절대 성취될 수 없는 세상을,

뽕쟁이들은 마약을 통해 쟁취한다.

 

오늘도 여기 저기서 이들을 만난다.

낮도깨비들 같이 허공을 부유하는 존재론적 불안들.

저들은 치유를 받아야 한다.

 

***

 

오늘날 우리 사회의 양극화 심화, 부의 집중 현상은,

의식적인 평균에로의 회귀를 거부하는,

저들 꼬리 부분, 그 힘의 존재 때문에 더욱 심화되고 있다.

 

게다가 부자 감세니, 낙수효과(落水效果, trickle-down effect)를 외치며,

정책 당국자는 꼬리 부분에 더욱 힘을 실어주고 있다.

저들은 신실한 중간 조정자가 아니라,

꼬리 부분에 속한 위장 세력일 따름이다.

비정규직이 반을 넘어가고 있는 한국의 오늘 현실은,

그야말로 비정규가 정규화 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식물계, 동물계도 인간이 끊임없이 관여하여,

품종 개량이란 이름으로 우생학적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평균으로의 회귀를 거스르는 작업을 인간은 이들 식물, 동물들에게 가하며,

이는 뭇 사람들로부터 인류 복지를 위한 공헌이라 상찬을 받는다.

작금엔 유전공학, 생물공학 등의 무시무시한 공격적 공학이,

생물학적 영역에 출현하여 우리를 놀라게 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인간에게 있어서는,

표면적으로는 우생학적 정책은 인권 문제를 일으키며,

거센 사회적 지탄을 받는다.

자유 의지에 의한 선택권은 자유 시민에게 주어진 권리이다.

이를 통해 재벌 등의 특정 위치에 있는 세력이나 계급은,

그들만의 선택과 집중으로 평균으로의 회귀를 완강히 거부한다.

 

이렇듯, 인간만은 평균으로의 회귀 법칙에 저항한다.

따라서 평균으로 회귀(regression to mean)를 인간계에 적용할 때는,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

자칫 그릇된 관측, 분석, 결과를 초래케 될 우려가 많은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겐, 평균회귀란 그리 미더운 법칙이 아니다.

평균회귀를 자연계의 철칙으로 믿기보다는,

의사결정의 과정, 방법에 집중하는 것이 보다 낳다.

그런데 문제는 미래는 불확실한 영역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불확실한 미래를 선택하고, 예측하는 데는 위험, risk가 따른다.

이 리스크를 어떻게 규정하고, 관리할 것인가?

이 문제는 또 다른 주제로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다.

이는 다음 기회로 넘기기로 한다.

 

평균회귀란 불안 의식이 낳은 사생아가 아닐까?

마찬가지로 신념에 찬 이들, 종교적 맹신자들 역시 불안에 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불안은 외적 믿음을 요구하게 된다.

그게 신일 수도 있고, 때론 신과 유사한 평균이란 레퍼런스를 의지처로 삼아,

불안을 잠재우며, 길고 긴 삶의 강을 건넌다.

따지고 보면 가련한 이들이다.

 

그렇다 하여도 나는 만인이 평균으로부터 멀어져, 

독자적이고 비범(非凡)한 자기 영역을 구축하는 세상을 꿈꾼다.

물론 여긴 외부의 인위적이고 강압적인 폭압이 전제되어서는 아니 되고,

자유로운 선택과 판단 하에,

저마다 하늘로 비상(飛翔)하는 독존(獨尊) 의식하에 진행되어야 한다.

 

비겁하게 자신들 만의 동굴 속에 들어가,

떼를 짓고 옴두꺼비같은 형상을 하며,

주위에 독을 뿌리며 살아간다 한들,

평균 회귀를 부르짖으며, 

이들의 복귀를 강압하는 세력엔 함께 힘을 보태 저항해주겠다.

 

다만, 그로써,

정의를 해치지 않고,

타자에 위해를 가하지만 않는다면,

평균 회귀보다는 낫다.

 

따라서 이 한계 안에서,

저들을 용납하고자 한다.

 

오늘날 정치 현실을 보면,

입에 침 바르고, 단꿀인 양 한 수저 떠서 입에 넣어주며,

그대를 도와주겠다고 밤도둑처럼 다가온다.

하지만 그들이 지나간 자리엔 열린 장롱, 흐트러진 자취만 남는다.

 

마찬가지로,

동굴 속으로 숨어든 짐승들은,

저마다의 상처를 서로 핥아주며, 

서로를 위로한다.

저들의 불안이란 얼마나 가여운가?

 

저들은 치료를 받아야 한다.

건전한 시민으로 다시 태어나길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남에게 폐만 끼지지 않을 수준만 지켜주면 된다.

가엽긴 하지만,

그 이상을 기대하는 것은 지나치다.

오랜 시간 이런 일들을 관찰하였지만,

임계점을 넘어 망가진 이들은 완전히 고치기 어렵다.

 

그저 시시닥 거리며,

불안을 잠재우고 살 수만 있다면,

그것도 한가지 복된 삶이 아니겠는가?

 

***

 

참고 자료로 나의 지난 글 한 토막을 여기 소개해둔다.

자연과학 실험실이나, 사회과학 연구실에서도 흔히 쓰는 기초적 기법인 외삽법을 두고 생각을 일으켜보았다.

외삽법은 부지불식간 생활 현실 가까이에 있다.

가령 주어진 용기안에 공기압을 조사했는데,

1 단위 온도 변화에 따라, 1 단위 기압 변화가 생겼다 하자.

그러면 2 단위 온도 변화가 생기면, 2 단위 기압 변화가 생기리라 예상을 한다.

이는 외삽법의 전형적인 한 예이다.

외삽법은 기실 앞에서 다룬 ‘평균으로의 회귀’에 기반한다.

과연 외삽법이란 신뢰할 만한 것인가?

 

외삽법(外揷法, extrapolation)은 우리가 학교 다닐 때, 모두 배운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예측 일반의 가장 기초적인 수단인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림을 보면 까만 점들이 기히 얻어진 데이터들이다.

이 때 다가올 여섯 번째 시점에서 어떤 데이터가 올 것인가?

우리는 기존의 데이터들을 기초로 물음표(?) 표시가 있는 위치에 

다음 데이터가 존재하리라고 예측을 하곤 한다.

이렇듯 기존의 자료를 해석하여 그 외부의 자료를 가상으로 구축하는 방법을 

외삽법(外揷法 extrapolation)이라고 한다.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는 내삽법(內揷法 interpolation)이라고 있는데,

이는 기존 자료들 외부가 아닌 내부를 추정하는 방법으로 흔히 보간법이라고도 

일컬어지고 있다.

 

외삽법은 기존의 자료의 경향성에 의존하는 방법이다.

이는 자료들의 분포 또는 궤적이 연속성을 갖고 있다고 전제하고 있다.

만약 자료 외부 공간 영역 또는 미래에 급격한 불연속적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외삽법은 대단히 위험한 예측 방법이 되고 만다.

(※ 여기서 외부라는 표현은 시간적으로는 예측자가 경험하지 못한 과거 또는 미래,

공간적으로는 예측자의 자료 미획득 상태 공간을 의미한다.

앞으로는 설명의 편의상 외부를 “미래”로 한정하여 지칭하므로서  

예측이란 주제에 집중하고자 한다.)

 

우리가 여론조사에서 흔히 듣는 “95% 신뢰구간” 운운할 때도,

표본집단이 충분히 커서 모집단의 분포를 통계학적으로 대표한다고 한들,

모집단이 어떠한 이유로 연속성을 잃고 급격한 변동을 겪게 되면

0%의 신뢰조차 담보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고려 요소를 확인하여 두지 않을 수 없다.

외삽법의 “정확한 확정”과 “불확실성”(또는 "불연속성")이다.

 

“불확실성”과 "불연속성"은 다른 속성들이지만,

 

여기서는 "불연속성"에 대하여서만 언급하고자 한다.

 

먼저 외삽법의 확정이란, 여러 종류의 외삽 기법 중에서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이다.

즉 선형적인 외삽법을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비선형적인 것을 택할 것인가?

개별적으로는 선형, 다항식, 스플라인 등등의 

자료의 형태에 따라 적절한 외삽법을 잘 선택하여야 한다.

 

하지만, 제 아무리 외삽법을 잘 적용하였다한들,

천체의 운동법칙과 같은 질서정연한 현상이 아닌 한,

대부분은 내적 포텐셜, 외부 조건 변동 등에 따라 

예상과 다른 결과에 봉착하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럼 외삽이 되었든 내삽이 되었든 무엇이 인간의 예측을 어긋나게 하는 것일까?

대표적인 게 파국과 랜덤워크라고 생각한다.

 

***

 

파국(Catastrophe)

우리 사회에서 겪었던 대표적인 파국사건은 성수대교 붕락이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다리가 어느 날 아침 붕괴되어 강 속으로 두 동강나 떨어져버렸다.

외삽법에 입각한 의식으로 늘 건너던 다리를 대하고 있었다면, 

여지없이 불행을 당하고 만다.

긋그저께도, 그저께도, 어제도 멀쩡하였으니, 

이를 외삽하면 오늘 역시 건재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경사면에 쌓여 있던 눈더미들이 빛을 받아 얼핏 푸르게 빛나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허물어져 내리면서 걷잡을 수 없는 눈사태(雪崩, avalanche)가 된다.

 

3년간 죽도록 사랑하던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식사 후 그의 입가에 묻은 고춧가루를 본 순간

그녀는 절교를 선언한다.

 

향엄은 돌자갈이 대에 부딪히는 소리에 깨쳤고,

동산은 물 건너다 자기 그림자를 보고 깨쳤다고 한다.

어제까지 범부였던 이들이 담박 도를 이루었음이니,

이를 일러 번갯불의 깨우침, 돈오(頓悟)라 하는 게 아닌가?

 

작은 자극으로 균형이 깨지면서 짧은 시간에 급격한 변화를 초래한다.

이렇듯 불연속적으로 급변하는 현상은 그 흔한 외삽법으로는 감지하기 어렵다.

 

***

 

그림을 보면 고무판을 구부려 만든 가상공간이 있다.

사건, 또는 사태의 추이가 지금 a에서 b로 진행한다고 생각해본다.

 

보통 외삽법을 구사하는 경우 고무판이 구부러져 있지 않고 

그냥 편평하다고 생각한다.

고대의 지구관 천원지방(天圓地方) - 하늘은 둥글고 땅은 편평하다.

땅은 반듯하니 고르게 연속하여 퍼져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기존 자료들이 궤적이 a에서 b로 진행된 경우 b 이후의

궤적 예측은 b의 오른쪽으로 진행되는 것으로 외삽된다.

 

하지만, 지금 제시된 고무판처럼 공간이 구부러져 있다면

b에서 아래로 뚝 떨어져 c로 내려가게 될 것이다.

 

비유하건데, 기존의 구조공간이 편평한 고무판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한, 

외삽법으로 이동평균을 동원하든 지수이동평균, 스플라인, FFT(Fast Fourier Transform), 

ARIMA 등등 무엇을 동원하든 예측은 빗겨가고, b의 지점에서는 모두 c로 추락하게 된다.

 

이 때에 파국을 맞게 된다.

만약 예측 현장에서 구부러진 고무판 같은 구조공간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제 아무리 훌륭한 외삽도구를 동원한들 위험을 피할 수 없다.

문제는 구부러진 고무판위에 우리가 居하고 있다는 증거를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는 고대인과 다름없이 地.方.에 살고 있음이다.

사후에 비로소 그 구조공간을 그럴 듯이 분석해낼 뿐이다.

 

어렸을 때,

마음보 강퍅한 동네 영감탱이를 놀려 먹는 놀이가 있다.

그가 평소 잘 다니는 길 한가운데 몰래 구덩이를 파고 똥을 퍼 넣는다.

우리는 이를 호방다리라고 불렀지만, 다른 곳에서는 뭣이라 하였을까?

그 위는 표가 나지 않게 살짝 흙으로 덮는다.

조각달조차 비추지 않는 그믐밤이다.

물레방아 옆, 외따로 떨어진 과부댁을 훔치듯 다녀오던 그는 그만 

호방다리에 발을 딛고는 낭패를 당하게 된다.

이 파국의 현장을 그 뉘라서 피할 수 있었겠는가?

 

예전에 신정아氏가 문제의 중심에 서자,

비로소 역학자들이 주둥이를 헐어 “도색기 흐르나 말년 운은 꽝”이라고 떠벌린다.

모두들 申의 남자가 아니라고 발뺌하기 바쁜 와중에,

이들 관상쟁이들은 다투어 자신이 神의 아들, 딸들이라며 허공을 향해 외쳐댄다.

늘 그렇듯이 파국은 사후에 확인되기에 삶은 어지럽다.

 

***

 

갈지자행보(Random walk,亂步)

 

외삽에서는 기존 데이터들이 표출하고 있는 경향성, 추세(趨勢)에 의지한다.

하지만 랜덤워크가설에 의하면 그런 것은 없다고 본다.

다만 술 취한 이의 발걸음처럼 미래는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만약 관찰 대상이 술에 취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될까?

화란의 튤립 투기는 모든 사람이 욕심에 취하였기에 오히려 한 방향으로

달려 나가 끝없이 투기가 일어났다.

현실에서 주식시장이 효율적 시장(efficient market)이 아니라는 반증은 많이 있다.

이는 시장 참가자들이 온전히 술에 취해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관여되지 않는 자연현상은 어떨까?

자연은 술에 취할 일이 없으니 오히려 취보(醉步) 현상을 보일 것 같기도 한다.

올 여름처럼 일기예보가 늘 틀리는 이유는 기상청이 대단히 멍청한 집단이기도 하지만, 

기상현상은 원천적으로 난보(亂步)를 보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그들 기상청 인사들의 부끄러움이 조금 감추어질런가?

 

***

 

여기 두 집안이 있다.

모두 딸만 9명씩 두고 있다.

우연히도 두 집안 부인들은 같은 날 출산을 앞두고 있다.

 

만약 이들 집안의 신생아 성별을 예측하고자 한다고 하자.

외삽법을 차용한다면 미래의 아기들은 당연 딸이 될 것이 예측된다.

수십 년 동안 출산만 하였다 하면 딸아이를 낳았는데, 

이번엔 아들일 것이라는 예상을 하는 것은 손자를 애타게 기다리는 

그 집 할머니가 아니라면, 섣부른 짓이다.

외삽법은 연속성에 대한 신뢰에 기반하고 있는 까닭이다.

년년히 딸이라는 출산의 경향성이 강하면 강할수록 

다음 차회의 출산이 딸일 가능성은 더욱 견고해진다.

 

드디어 양 집안에 새 생명이 태어났다.

A 집안은 또 딸을 낳아 도합 딸만 10명을 꽉 채운다.

B 집안은 이번엔 아들을 낳아 그 집 할머니는 온 동네잔치까지 벌인다.

 

A 집안은 딸을 또 낳아 외삽법의 위력을 증거하였으나, 

새로운 정보를 외부에 전한 것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B 집안은 기존의 국면을 깨뜨리고(파국,破局) 

극대의 정보량을 창출해내었다.

 

지금 여기서 자연스럽게 정보량이란 개념을 소개하고 있다.

외삽법이 깨질 때 정보량이 극대화된다.

아닌 게 아니라, 그제나, 어제나 일관되게 유지되던 추세가 

지금도 그대로이고, 미래에도 그리 예측되고, 아니 예정되다시피 되고 있는

상태라면 무슨 재미가 있을 것이며, 기회가 발생하겠는가?

 

이 양 집안은 모두 10명의 자식을 꽉 채우게 되었다라는 사실에선 일치하지만,

정보 생산량에선 천양지차를 시현한 것이다.

 

주식시장에서 말하여지고 있는 기술적분석가들은 추세를 말하며 

오늘도 열심히 잣대를 주가 궤적에 갖다 대고 그리며 미래를 외삽한다.

주가 추세가 유지되는 한 기회는 없다.

추세가 깨질 때라야 새로운 황금의 기회가 도래한다.

그런데, 문제는 외삽법은 추세가 깨지는 것을 외부에 알리는데 

그리 재빠르지 못한 대안(對案)이다.

 

외삽법은 미래를 예측하는데 기대하는 만큼의 충분한 보상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사후적으로 예측이 틀렸다라는 사실을 확인하는데 그치곤 한다.

 

성수대교가 무너진 후에라야 조급증과 부패를 확인하고 대책을 세우곤 한다.

눈사태가 나서 수많은 건물과 사람이 다친 연후라야, 

산기슭 밑에 대책 없이 집을 짓는 것은 위험하다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외삽법이 미래를 예측하는데 동원하기엔 한계가 있다는 증거는

바로 이런 파국의 실례로서 확인된다.

 

그럼 외삽법을 뛰어넘는 예측술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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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 : 2016. 3. 1. 1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