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촌놈과 요강 꼭지

소요유/묵은 글 : 2008. 3. 5. 11:33


intro comment :
"모모YS 사이트에서 겪은 일"
(※ 관련 사연, 2008/02/26 - [소요유/묵은 글] - 강낭콩 말미 주석 참조)

***

세상에 말을 통하지 않고 이치를 드러낼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는 서양철학자가 있다.
그는 이어 말하길 ‘말로 드러낼 수 없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라고까지 주장한다.
하이데거의 ‘언어는 존재의 집’이란 이야기와 일응 맥이 닿는 말인데,
이게 한 사람의 얘기인지 서양철학은 서툴러서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하여간 이리 생각나는 것을 앞장 세워 말머리를 몰아가 본다.

성경에도 보면 logos라는 게 말씀이 아니던가 ?
말씀이 있은즉 곧 세계가 펼쳐졌음이라.
요한복음의 중심사상인 빛, 로고스 역시 말씀의 현현이다.

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말하는 불교지만,
그 교주 역시 살아 생전엔 장광설 사자후를 토해내었었다.
물론 그게 후대 특히 대승불교 논장의 발전에 따른 바 크지만,
어쨋건 언어를 여의라고 주장하는 그들도 저리 치열하게 말품, 글품을 팔았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바로 그를 증거하고 있다.
모두들 입 모아 대장경을 자랑하지만,
단 한권이라도 제대로 읽은 사람이 그 몇이런가 ?
모두 이미 도통하였기 때문인가 ?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당나라 때의 선종의 흥륭에 따라,
특히나 이 계열에 따라 든 우리나라의 풍토에서
언어도단의 세계가 불교의 모든 것인 양
오해하고들 있다.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 폐단이다.

실로 이 땅에 넘치는 사이비 땡중은 이로 인해 야기된 소이가 적지 않다.
공부는 하지 않고 맨날 덕산 방(棒)이니, 임제 할(喝)이니 하며,
겉 멋만 들어 곡차 탐하며 절집을 횡행한다.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서유기의 주인공 삼장법사 현장 역시
삼장(三藏),
즉 경(經), 율(律), 론(論)을 함께 아울러 두루 통달하였기에 그리 부른다.
이 삼자 모두 글이요, 말의 터널을 통하지 않고는 이룰 수 없다.
이를 구하려 천축으로 7세기경 구법행각에 나선 사연이 그러한 것이다.
이로서 구마라습 구역이래 신역의 역경사업이 활발히 펼쳐진 것이며,
결국 이를 토대로 그 찬란한 盛唐 문화, 특히 불교문화의 씨를 내린 게다.

같지도 않은 것들이 말이, 글이 필요 없다고
제 부실한 처지에 빗대어 그리 견강부회하는 것이지,
정작 그러면 말, 글은 치우고
뜻이라도 올곧고, 정이라도 맑기나 할까 ?
기껏 신문 뒤적이며 남의 글 통으로 베껴오는 수고만 대단할 뿐,
거기 자신의 뜨거운 숨결과 깊은 뜻은 한 오라기도 묻어 있질 않다.
잔뜩 겁 먹은 개가 주인 빽 믿고,
머리만 대문 밖으로 내놓고는 꽁무니 저만치 빼고서는 그저 왕왕 짓는 격이다.
사뭇 부끄러운 노릇이다.

하지만 정작 말, 뜻의 상호 수승함을 다투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말이든 뜻이든,
그 의론의 현장에서 슬쩍 빗겨 비열하게 피하는 작태다.

창으로 겨루기로 하였으면 창을 들고 나설 것이요.
검으로 다투기를 약속하였으면 그를 들고 나서면 되는 것이다.
하기사, 요전 앞에서 이리 나서던 이도 있더라.

“ooo가,,,말은 잘하는데,,글은못씁니다”

말 못한다든가, 글 못하는 게 흉이 아니다.
역으로 말 잘한다든가, 글 잘 하는 게 자랑이 아니다.
나는 앞 글 ‘링컨의 얼굴’에서 이르기를
얼굴, 글, 말은 중요한 믿음의 표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저 ooo라는 분한테는 아니된 바지만,
이곳은 글로 뜻을 펼 수밖에 없는 제약이 따른다.
그러하다면 제 아무리 제 뜻이 높고 고상하면 무엇하나,
도리없이 글로 마주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
자신이 창의 명수라고 자부한다면 창술대회로 터를 옮길 일이요,
‘ooo’ 님처럼 말에 자신이 있다면,
그리 광고만 하고 애끓일 일이 아니라,
어디 만담대회라도 수배하여 자리를 엿보는 것이 득책이 아닐까 ?
내 글향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저 분은 일응 정이 깊고 따사로운 인상으로 다가온다.
아마 그를 밑천으로 나서신다면 대성하시지 않을까 싶다.
뜨겁게 응원한다.

청맹과니 당달봉사가 여축없지 않은가 말이다.
대들더라도,
글의 갈피를 헤집고 이치의 소홀함을 들어
논장에 참여하여 소명하니 도리를 다투어야 하지 않겠는가 ?
내 써논 글이 다리가 있어 그대가 나무랄 때 도망이라도 간단 말인가 ?
꾸짖으려면, 해당 처소를 들어야 할 것이며,
비꼬려고 하려도 얼추 적당한 곳이라도 찝어내어 다스려야
면목이 서지 않으리.
두꺼비 면판이라 흉함이 부끄러운 겐가 ?
무당개구리라 뱃가죽이 망측스러워 그리 잔뜩 움츠리고 있음인가 ?

그리 자신이 없다면 그저 잠자코 구석에 찌그러져
요강단지나 끼고 자빠져 있으면 애꿎은 봉욕이나 당하지 않는다.
‘유복한 과수(寡守)는 앉아도 요강꼭지에 앉고 넘어져도 가지밭에 넘어진다’라고 하지 않던가 ?
혹 아는가 ?
13년 수절과부 섣달 자리끼처럼 맵차가운 포한을 잠투정하는 새에 풀 수 있을런지 ?
하지만, 행여라도 요강단지는 엎지 말게나,
독살이로 애옥살이인즉, 마지막으로 뒷물한 게 지난 가을께가 아니던가 ?
그렇지 않아도 시큼털털 퀴퀴한 형편인데, 지린내까지 더하면 어찌할 텐가 ?

형편이 이리 지지리 하궁상인데,
기껏 한다는 짓거리가,
신문 나부랭이 통으로 베껴다 놓고 우쭐거린단 말인가 ?
갈 추수 끝난 황량한 벌판에 홀로 선 허재비 꼬락서니가 아닌가 ?
어깨에 걸친 남루하니 찢어진 옷자락이
위인의 비루한 풍모를 펄렁이며 증거하고 있음이 아닌가 말이다.

걸견폐요(桀犬吠堯).
걸의 개가 되어 요를 향해 짖는 저 흉측한 주막 무리들.
도대체 부끄러움이 없다.
그야말로 개발에 주석편자라고,
어디 xx놈이 엇그저께 가까스로 언문 뗀 주제에,
알지도 못하는 한문 훔쳐 호가호위 위세를 부리고 있음이 아닌가 말이다.

돌팔이 의사라도
맥이라도 잡는 시늉은 해야 우선은 체면이 서지 않겠는가 ?
가련무비,
아득한 중생이로고.
그대가 사내라면 중뿔도 없는 망통, 고집불통일 터이고,
계집이라면 변비에 걸린 암코양이 형용일 터.

내 소시적부터 드나들던 문지방이 너름찍 하였노니,
마침, 맥도 얼추 짚어 볼 수 있나니.
여기 침술을 일러 가로되,

댁같은 사람에겐 신궐혈(神闕穴), 신당혈(神堂穴)을 취처하여
다스리면 효험이 있을 바라.
當 요혈인즉, 모두 정신병환자에겐 탁효하니,
그대야말로 오늘에 이르러 명의를 맞음이라,
이 또한 그대에겐 洪福이니,
현세의 행실은 비록 수미를 비웃어 넘보듯 罪萬이나,
행일런가 ?
과거세에 조그만 덕이 있었는지 용케 과객을 만났음이니,
그대에게 천행인가 하리라.

日暮途遠이라
해는 져가는데 길은 아득하니 머니
앞길이 정녕 심상치 않고뇨.

두어라, 이미 삼경에 잠든 공산명월 보고,
짖는 저 강아지 심사는 오죽하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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