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공진(共振), 곡신(谷神), 투기(投機) ①

소요유 : 2008. 3. 7. 11:51



산에 다니다 보면, 우연히 여러 생각들이 떠오른곤 합니다.
산이란 게 그저 푸르고, 희고 늘 같은 모습일 상 싶지만,
별별 생각의 파편들이 절로 터져나오는 것은 왜 그런가 ?

이 물음 앞에, 골몰히 생각해볼 것도 없이,
저는 이리 바로 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산은 어디 매인 바 없기 때문이다.”

만약,
저자거리에 나선 아낙네라면,
“오늘 저녁 반찬거리를 무엇을 할까 ?”,
대통령이라면,
“오늘은 저 39억짜리 귀한 장관을 어찌 변호할까 ?”
이리 생각을 한 곳에 집중하여,
골몰히 해결하여야 할 무엇인가 ‘꺼리’에 묶여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산 골짜기를 흐르는 녹수(綠水)가 반찬거리 걱정할 일이 있겠으며,
산 마루를 저 아래 두고 흐르는 백운(白雲)이
능신(能臣), 간신(奸臣)을 염려할 일 있겠습니까 ?

하니,
청산녹수(靑山綠水)에 든 客 역시 그에 물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행운유수(行雲流水) 걷다보면,
하늘가 머흐르는 구름처럼 어디 매인 바 없음이니,
뇌수 갈피에 숨어 있던 생각의 파편들이 제멋대로 뛰쳐나와
다투워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음이 아니겠습니까 ?
또한, 시절은 바야흐로 만물이 기지개 펴는 봄이 아닌가 ?

오늘은
등산길 오르다, 성황당인 양 짐짓 높이 돌무더기 쌓아올린 돌탑가를 돌아드니,
느닷없이 공진(共振) 또는 공명(共鳴)이란 말이 툭 발치에 떨어져 뒹굴더군요.
겨울철, 따끈한 군고구마를 호들갑 떨며 손 바꿔가며, 호호 불며 먹듯이,
이 말을 주어들고, 이리저리 굴리며 생각의 끄나풀을 쫓아가 보았습니다.

공진(共振)은 ‘함께 떤다“란 뜻이고,
공명(共鳴)은 ‘함께 운다’ 란 뜻입니다.

鳴 - 운다라는 말은 참으로 멋있습니다.
새, 벌레만 우는 게 아닙니다.
북도 울고, 종도 울며, 징도 웁니다.
그 뿐입니까 ?
화살 날아가는 소리도 운다라고 표현하고,
사람이 불평을 토로하는 것도 우는 소리라고 합니다.

혹자는 새 소리를 두고 운다고 표현한다고 나무랍니다.
서양의 경우 새가 노래(sing)한다고 표현하는데,
동양은 이리 어둡고,  진취적이지 못하다고 깔보기까지 합니다.
그럴까요 ?
무식한 소치입니다.

百家争鳴,
鳴鏑 - 향전(響箭)이라고도 하며, 개전 신호로 적진에 쏘는 화살
鳴笛
...

등등의 용례에서 보듯이 소리는 소리이되 주체적인 울림을 뜻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소리내는 주체가 명확히 인지되는 그런 울림.
게다가, 울림은 단순한 소리가 아닙니다.
거기엔 감정이 실려 있고,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하니 ‘주체적 울림’을 鳴이라고 하여야 마땅한 이해라 할 것입니다.

명천고(鳴天鼓)라는 도인법이 있습니다.
양손으로 두 귀를 가리고는
손가락으로 뒷통수를 툭툭 튀겨주는 것인데,
이를 매일 해주면 귀가 맑아지고, 머리가 총명해지는 공덕이 있습니다.
이게 나중에 말할 내용과도 함께 상기해볼 만한 것이기에
이리 미리 소개해둡니다.

말 나온 김에 두어 개 더 소개합니다.
고치(叩齒)는 위 아래 치아를 딱딱 부딪히는 행법인데,
이를 행하면 치아가 건강해짐은 물론 정신이 맑아지는 공덕이 있습니다.
이와 함께 저는 악고(握固)를 가끔 행합니다.
이게 무엇인고 하니, 네 손가락으로 엄지 손가락을 안으로 감싸안는 것으로
도인술의 하나입니다.
갓난아이를 보면 이런 모습을 할 때가 많습니다.
이 동작은 기를 안으로 품는 자세라,
기를 흩트러뜨리지 않고 외부로부터의 나쁜 기운의 침범을 막는 공덕이 있다고 합니다.
주의하실 일은 숨이 가쁘다든가, 마음이 안정이 되지 않을 경우 바로 이를 시행하면,
기의 흐름이 끊기거나 막혀 좋지 않습니다.

저는 산에 올라 숨이 가쁜데,
급히 운기조식을 하다,
쓰러진 적도 있습니다.
그 때 그 잘난 얼굴을 갈아먹기도 하였습니다.

반드시 어느 정도 평온해졌을 때 행할 일입니다.
저의 경우는 심신이 피곤할 때,
악고를 한 채 가만히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르곤 합니다.

책에 보면 각기 행하는 숫자까지 정해져 있습니다만,
저는 게을러 이를 바로 따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잠시 옆길로 새고 말았습니다.
하여간 공진이든 공명이든 '함께 진동(oscillation)',
즉 resonance한다라는 뜻이겠습니다만,
여기서, 떨되 ‘함께’라는 의미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이 말은 주.객이 사건(event) 현장에 동시에 居하고 있음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 뜻은 외부에서 떨게 하였다한들,
주체성을 가진 개체가 함께 떨만한 존재조건이 아니면
공진은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것이지요.

이 문제는 잠시 놔두고,우선 간단한 전자회로 하나를 소개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림에서 보면 L, C 두 가지 전자 소자에 의해 꾸며진 이상적인 회로가 등장합니다.
L은 inductor(단위:inductance), C는 capacitor(단위:capacitance)라 합니다만,
이를 이해하기 위한 전기전자적 설명은 굳이 필요없습니다.

오늘의 논의에서는 이렇게 생각하면 충분합니다.
즉, 이 양자(兩者)가 에너지,
(※. 여기서는 전자기적 에너지입니다만,
굳이 전자기적 에너지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소리라 해도 좋고, 인간의 마음이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하여간 그 에너지를 품고, 내뿜으며 주고 받는데,
그를 일정한 주기를 갖고 행한다라는 것,
이게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핵심사항입니다.

여기서 그 주기는 L, C의 물리적 구조에 의해 특정됩니다.
예컨대, 코일의 감긴 수, capacitor의 양단 면적, 거리.... 등등입니다.
사람 마음으로 치면, 성격이라도 좋고, 인품이라고 비유해도 좋겠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식에서 보면,
f가 주파수입니다.
즉 일초에 몇 번 주고 받느냐, 진동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게 L, C에 의해 특정된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하고자 합니다.

그 주고 받는 시간적 빈도수를 주파수(frequency)라고 합니다.
한발 더 깊이 논의하자면,
실제로 그 주파수는 여러 가지가 생기지만,
에너지 손실이 가장 적은 주파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 ideal 하게는 손실 제로인 주파수)

그게 위에서 말한 특정 주파수인 것입니다.
이를 우리는 고유주파수 또는 고유진동수라고도 부릅니다.
이 회로, 즉 system은 최종 고유주파수(natural frequency)에 안착됩니다.
그게 결국은 시스템을 최적으로 안정화시킬 것이기 때문이지요.

지금 파동에 대하여 설명드리고 있습니다만,
물리 세계 일반뿐이 아니라,
실인즉 심리 세계에도 역시 통용되지 않는가 하는 심증을 갖습니다.
한즉, 이에 멈추지 말고,
이 논의를 그리 환치하여 외연을 넓혀 생각하였으면 하는 취지에서,
이리 건조한 이야기를 지루함을 무릅쓰고 진행하는 것입니다.

사실, 위 회로에서는 에너지가 인가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현상이 생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외부에서 전기를 가하다든가 하면 진동하기 시작합니다.
이상적인 회로의 경우 한번 진동하기 시작하면
인가된 에너지를 차단하여도 영원히 진동합니다만,
실제의 세계에서는 에너지손실(dissipation)이 생기기 때문에
종국엔 멈추게 됩니다.
이 회로에서는 그 손실의 중요 인자는 resistor(단위:resistance)입니다.
현실에선 resistance 즉 저항이 없는 경우는 없기에,
결국 외부 에너지 공급이 없는 한 진동은 영속될 수 없습니다.

쉽게 설명하려고 하였는데,
오히려 어렵게 되고 말았습니다.

다시, 간단히 정리하자면,
진동이라는 현상은 회로내의 “물리적 특성에 의해 주파수가 특정된다”라는 것이고,
에너지 소모가 없는 한, 그 진동은 영원히 계속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선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휴지기가 반드시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거꾸로 말하자면, 외부에서 여하한 에너지가 다시 인가되었다한들,
그 진동수는 여전히 그 회로 고유 특성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인가된 외부 에너지 조건에 구속되지 않는다라는 이 소식이 중요합니다.

카나리아는 카나리아 고유의 음색으로 울고,
참새는 참새 고유의 새깔로 지저귑니다.
jaybird 역시 jaybird 톤으로 노래 부릅니다.
이는 그들 발성기관의 물리적 구조가 그런 음색을 가질 수밖에 없기에,
즉 환언하면, 특정 주파수들을 발성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태풍이 불거나,
미풍이 불거나,
홍수가 나거나,
가뭄이 들거나 불구하고,
"저들 새들의 고유진동수는 변함이 없다."
새들의 경우에는 진동수가 하나가 아니므로, 음색이라고 해야 정확하겠지만...
저는 이 소식을 이 자리에서 재삼 강조하고 싶습니다.
물론 조금 달라지기야 하겠지만,
그게 물리적 발성구조 자체까지는 간섭하지는 못한다고
저는 가정합니다.

여기서 물리적 구조를
사람의 경우엔 심리적 구조라고 바꿔 생각해도 상관없다고
저는 시험삼아 그리 생각합니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 배운 소리굽쇠의 공명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
하나의 소리굽쇠를 책상 모퉁이에 땅 쳐서 울리게 한 후,
인접 소리굽쇠들에게 가까이 다가설 때,
특정 소리굽쇠만 함께 크게 반응하며 떨게 됩니다.
이 특정 소리굽쇠만 떠는 이유는 이 양자가 진동수가 같기 때문입니다.
이 때 우리는 공진 또는 공명한다고 말합니다.
진동수가 같을 경우, 진폭도 크게 되고, 반응 결과도 강하게 나타납니다.

만약 인접한 소리굽쇠들간 진동수가 다르다면,
아무리 세게 흔든 소리굽쇠를 가까이 해도 함께 공명하지 않습니다.
흔히 말하는 ‘과(科)’ 또는, ‘code’가 다른 것입니다.

‘쉽게 단 쇠가 빨리 식는다’라는 속담에서 유의할 점은
공명한다, 하지 않는다라는 따위가 아니라,
이 속담의 진의는
위에서 말한 저항(registance)의 대소 문제라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여야 합니다.

즉, 저항 요소가 크면 빨리 식습니다.
공명을 함께 하였어도,
내부회로에 저항이 크면 에너지 dissipation이 커서 금방 식게 되는 것이지요.
(* dissipation: 소산(消散), 소실 ...)
그러니 이것은 공명의 유무 문제가 아니라,
그 유지력 내지는 보지력(保持力)에 관한 문제입니다.

연예인에게 경도된 팬들의 경우,
함께 열광하지만,
'얼마나 오래 지속되느냐' 하는 문제는
연예인과 팬들간의 주파수(frequency)의 이동(異同) 내지는 동조(同調)가 아니라,
저항(registance)의 대소(大小) 문제라는 것을 차제에 지적하여 두고자 합니다.

하기에, 만약 그대가 팬을 관리하여야 할 연예인 같은 위치에 있다면,
진동수(frequency)와 함께 저항(registance)이란 문제도 고려하여야 합니다.
즉, 이는 나에게 공감할 팬들을 발굴하고 규합함과 동시에,
그들의 저항력(resistibility)에 대항하여 얼마나 자주 팬들에 대한 서비스를
공급하여 할 것인가 하는 최적 주기 또는 방책을 고안하여야 하는 문제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팬들이 아무리 많아도, 그 팬들의 특성이 resistance가 커서,
즉, 그대를 향한 열정이 쉽게 식는다면,
그들과의 서비스 접촉용량(면적*시간)을 넓힐 방도를 강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그들이 저항력(resistance)이 작다면 곧 이는 충성심(loyalty)이 크다라는 것인즉
팬 서비스 재충전(recharge, refill)에 여유가 있게 됩니다.

현수교 다리 위를 군인들이 행진을 합니다.
이 때 군인들이 발을 맞추어서 걷게 되면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즉 우연히 그들의 보조(步調) 주파수가 다리 구조가 갖는 고유진동수와 일치하게 되면,
진폭이 커지게 되어 다리가 크게 출렁이게 되고,
급기야 무너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현명한 장교는 이 때, “제걸음로 갓” 이런 구령을 붙이게 됩니다.
제 멋대로 각각 다른 걸음으로 걷게 되면 다리 고유진동수와 동조(同調)할
가능성이 적기 때문에 안전합니다.

타코마 다리(Tacoma narrows bridge) 붕괴 역시, 다리 자체의 고유진동수와 같은
외부의 파동이 가해져서 무너진 유명한 사례로 알려져 있습니다.
(※. 여기엔 이설(異說)도 있다. 그 내용을 발췌 소개한다.
http://en.wikipedia.org/wiki/Tacoma_Narrows_Bridge
The bridge's spectacular self-destruction is often used as an object lesson in the necessity to consider both aerodynamics and resonance effects in civil and structural engineering. However the effect that caused the destruction of the bridge should not be confused with forced resonance (as from the periodic motion induced by a group of soldiers marching in step across a bridge).[8] In the case of the Tacoma Narrows Bridge, there was no periodic disturbance. The wind was steady at 42 mph (67 km/h). The frequency of the destructive mode, 0.2 Hz, was neither a natural mode of the isolated structure nor the frequency of blunt-body vortex shedding of the bridge at that wind speed. The event can only be understood while considering the coupled aerodynamic and structural system which requires rigorous mathematical analysis to reveal all the degrees of freedom of the particular structure and the set of design loads imposed.)



앞에서 말씀드린 명천고(鳴天鼓)는 뒷통수를 손가락으로 튕기되,
중지위에 검지를 올려 두고, 아래로 내리치게 됩니다.
이 때, 좌우 손으로 각기 24번씩 도합 48번을 두드려 소리내게 됩니다.
실제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아주 기분이 상쾌합니다.
제가 배운 방법은 손바닥으로 귀바퀴를 앞쪽으로 구겨 누룬 상태에서,
뒤통수에 손가락을 갖다대는 자세입니다만,
어디선가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빠진 경우도 있더군요.
어떤 게 옳은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다 두드린 후에는 악고를 지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천고, 즉 하늘의 북,
두둘김 곧 그 울림의 고유진동수는 48인 것입니다.
게다가 악고를 지어 즉시 폐회로(closed circuit)를 만듭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회로 또는 시스템이 닫혀 종결되지 않으면,
에너지 감모(dissipation) 또는 감쇄(damping)가 쉬이 일어납니다.

도인술이라는 게 참으로 놀라운 게,
얼핏 허술한 듯 보여도,
그 법식이 모두 이치에 드러맞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격물치지(格物致知),
즉 사물의 이치를 사무치게 연구하여,
앎이 궁극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닐까 싶군요.

라디오든 TV든 채널을 맞춘는다는 것(tuning)은
바로 방송국에서 송출한 특정 주파수를 받아들이기 위해,
그와 같은 주파수를 갖는 그릇을 이쪽에서 마련하여 채비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방송국 주파수란 잠자리를 잡기 위해
이쪽에서 맞춤맞는 잠자리채를 채비하는 것이지요.

채널 맞추는 경우가 아닐 때도,
우리는 흔히 tuning 한다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이는 실인즉,
사물 또는 사건의 고유주파수 맞추기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대의 주파수를 모를 때는 ?
주파수 스펙트럼(spectrum)을 헤집고, 주파수 분석(frequency analysis)을
하여 그를 찾아내야 합니다.
찾아낸 후,
이게 마침 나의 주파수와 같다면 혹간 ‘빠’가 될 터이고,
다르다면 ‘까’가 되고는 합니다.

그런데, 사람 중에는 주파수가 다른 데도 상대와 잘 맞추는 이가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모리배(謀利輩) 또는 간신(奸臣)이라고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이리 주파수가 다를 경우,
하늘의 주파수, 즉 천도(天道) 또는 천률(天律) 또는 천리(天理)에 비추어
다름을 꾸짖고, 바름을 일깨우는 이가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정인군자(正人君子) 또는 충신(忠臣)이라고 부릅니다.

제가 가끔 예를 들고 있는,

“향엄은 무심이 던진 기왓장이 대나무에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우치고,
동산은 다리를 건너다 물위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 보고 깨쳤으며,
의현은 옆방 사람의 중얼거림에 깨우쳤으며,
백장은 코를 잡아 비틀려 깨우쳤으며,
원효는 해골바가지에 든 물을 먹고 깨우쳤다.”

이들이 아니더라도,
수행자들은 천길 폭포 밑에서 물맞이도 해보고,
고고정상 절벽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안기도 하며,
칠흑 야삼경에 홀로 적적함을 벗 삼기도 하는 사연은 무엇이겠습니까 ?

이것은 잠깐 놔두고,
몇가지 먼저 점검합니다.
심리학 책에 보면, 사람의 성격은 절대 바뀔 수 없다고 하더군요.
이게 다른 말로 하면 한 인격의 고유진동수는 생래이후 탈바가지처럼
죽을 때까지 쓰고 지낼 수 밖에 없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

너와 나 사이의 공감이라는 것이,
그 공감 내용을 매개로 한 것이 틀림없지만,
실인즉 너와 내가 그 매개내용의 주파수와 일치할 조건을 미리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리 해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내용이 먼저가 아니라,
너와 내가 미리 갖추고 있는 그 조건이 먼저라는 것이지요.
저 소리굽쇠처럼 말입니다.

그러하니,
늘 얘기들 하고 있는 공감한다든가, 소통을 꾀한다라는 것을 저는 기대하지 않고,
다만 소요유할 뿐이다 라고
듣기에 따라 다소 되바라지게 느낄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도
이런 사정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말인즉슨 아름답게 공감이니, 소통이니 말하지만,
이게 실인즉 자신과 코드가 같은 사람, 소식을 찾고 있을 따름이지,
공감 내용 그 자체가 훌륭하기 때문에 이제껏 아니 그랬던 너와 내가
새삼 호들짝 놀라 그리 반응한 것이냐 ?
저는 이리 묻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예전엔 미쳐 몰랐는데,
그날 마주친 "내용이 훌륭하기에 새롭게 공감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면,
저는 실은 당신 자신이 자신의 훌륭한 점을 미쳐 챙겨놓지 못한 게으름은 없었는가 ?
이리 되묻고자 합니다.
이미 자신이 다 갖고 있는 것을 그를 통해 발견한 것처럼 느낄 뿐인 것이지,
그대가 원래 모자랐던 것이 아니다.
그러하니, 그런 자신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그만치 자신에 소홀한 소치이니,
정작은 이를 부끄러워할 노릇이다.
저는 이리 따져 묻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리 생각해보면, 공감이니, 소통이니 하는 것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하는 반성을 하게도 됩니다.
알고 보았더니, 실은 나르시스처럼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고,
뒤늦게 그리 함께 서 있는 현장을 확인함에 다름 아닌 것이 아닌가 ?

저는 오늘 이리 묻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기에 ‘빠’와 ‘까’가 동시대, 동지역에 나뉘어 병존(竝存)하는 것 아닙니까 ?

노빠 ↔ 노까,
황빠 ↔ 황까,
디빠 ↔ 디빠.

만약 빠가 옳다면 까는 그를 터이고,
끼가 옳다면 빠는 그른 것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느 빠도 빠질이 그르다고 하는 자 없으며,
어느 까도 까질이 틀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빠질, 까질의 내용이 아니라,
실인즉 자신의 기질, 존재조건을 먼저 되돌아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
이게 정직한 사람의 태도여야 하지 않을까 ?
저는 이리 묻고 싶은 것입니다.

공감, 소통이라는 것이
저만, 또는 제 집안 사람만 사랑하는 작법이 아닌가 ?
나의 '까질', '빠질'이 정녕 마땅함, 의로움에 기초한 것인가 ?
이리 자신한테 삼세번 물어야 합니다.
따뜻한 것이 지나치면 비릿하기도 하고 아린 맛도 나곤 합니다.
사뭇 경계할 노릇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되물음 뒤라야,
공감도, 소통도 진정 외연을 넓혀 아름다울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때문에 때로는 경계를 넘어 까도 되고, 빠도 되며,
어디 걸림없이 자유롭게 세상을 거닐 수 있으리란 생각입니다.

이제, 조금 아까 놔두었던 곳으로 돌아가 보지요.
향엄, 동산, 의현 등이 기를 쓰고 도를 닦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만,
기껏 기왓장에 놀라고, 그림자에 깨어나고, 중얼거림에 득도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

(※ 자신의 고유진동수가 특정 되어 있다면,
이를 바꿔 부르길 고유성격이라고 해도 좋겠고,
또는 고유인격이라고 칭해도 좋습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한마디로 아집(我執) 또는 아상(我相)이라고 부릅니다.)

저들은 자나깨나 이 틀 속에 꼭 갇혀 있었기 때문이 아닐런지요 ?
고집스럽게 꽉쥐고 있던 자신의 정체성이 어느 계기에
확 깨뜨려지고 그 틈에 휘엉청 밝은 월광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그를 불교에서는 성불했다라고 거창하게 이바구 까고 있는 것 아닙니까 ?
알고 보면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말입니다.

임제가 되었든, 혹 나옹이든, 성철이든, 이를 두고
“산은 산이오, 물은 물이다.”라고 했습니다만,
사실 싱거운 말씀이지요.
그럼 산이 산이 아니고 언제 물이었던가 ?
중생이 저마다 모자라, 산이 물이 되고,
물이 산이었을 따름이지.

하기에,
고수명창은 물폭포 밑에서 득음(得音)을 위해, 피를 토하는 것이며,
무림행자는 물, 불 속을 뛰어 들며, 고련(苦練)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

이는 곧 제 자신의 가상(假相)한 존재조건을 허물어 버리기 위함이니,
어느 순간 도적처럼 기회가 닥쳐오기를 기대하는 것 아닙니까 ?

***

육조 혜능 - 남악회양 - 마조로 이어지는 계보.
여기 그 진부한 남악과 마조의 이야기를 다시 끌어내봅니다.

마조라는 수좌가 하도 좌선을 많이 하여 마치 죽은 사람이나 나무등걸 같았다.
그 때 회양선사는 마조의 공부에 진전이 없음을 알고 마조에게 물었다.
“무엇을 하고 있는가?”
“좌선합니다.”
“무엇 때문에 좌선을 하는가?”
“부처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어느 날 회양선사가 벽돌을 갈고 있었다. 마조가 그 소리를 듣고 찾아가 물었다.
“벽돌은 갈아서 무엇에 쓰려고요?”
“거울을 만들려고 하네.”
“어떻게 벽돌로 거울을 만들 수 있습니까 ?”
“그러면 좌복 위에 앉아 있다고 부처가 되겠는가?
“그러면 어찌해야 합니까?”
“수레가 가지 않을 때는 소를 때려야 하나 수레를 때려야 하나?”
이 말끝에 마조는 확연히 깨달았다고 한다.

온 천하를 말발굽으로 밟아 죽이리란 예언의 그 당사자인 마조.
“出一馬駒 踏殺天下人”
그 마조가 나무등걸이 되고,
앉은 자리 좌복 일곱이 구멍이 나도록 좌선을 했어도
깨우치지 못하였던 그것을 어느 한 소리에
마치 베 가르듯 어둠을 찢어발겨 확철대오하게 됩니다.

***

저 향엄의 대나무에 기와장 부딪히는 소리는
이 견고한 natural frequency를 허무는 소리였으며,
어디에 걸림없는 천지와의 교합(交合)을 이끄는 불꽃놀이인 것입니다.

이를 계합(契合)이라고도 합니다.
천지와 합하여 맺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공학영어로 표현하면 coupling 또는 synchronization쯤 될런가요 ?

장자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어 이름을 곤(鯤)이라 하고, 크기는 몇 천리가 되는지 모른다.
변하여 새가 되면 이름을 붕(鵬)이라 한다.
붕의 등 넓이도 몇 천리가 되는지 모른다.
움직일 때는 날으니 그 날개는 구름같이 하늘을 가리운다.
.....
....
어느 정도 깊이가 없이는 물 위에 배를 띄울 수 없다.
조그만 웅덩이에 물 한잔을 부어놓으면 겨자씨는 뜬다.
그러나 잔을 띄우려면 가라앉으니 그는 물과 잔의 균형이 잡히지 않은 까닭이다.
공기에 있어서도 그렇다.
적당한 깊이가 없으면 큰 날개를 용납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새를 위해서는 공기도 九만리의 깊이가 되어야 날 수가 있다.
그래서 바람을 타고 머리 위의 공중에 아무 것도 없고,
아무 걸릴 것도 없이 그 새는 남방으로 날아가기를 시작했다.”

고유진동수를 갖고 있는 한,
곤이나 붕이 되지 못합니다.
천지와 교접하려면 그대의 조그만 부자지를 갖고는 불가능합니다.

우주와 통신하려고 한다고 해봅시다.
특정 고유진동수를 갖고 대들면,
꼭 자기 꼬락서니 만큼 밖에 교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즉 우주와 공진(Big resonance)하려면 특정 진동수에 구속되면 아니 됩니다.

Big resonance는
주파수를 초월하여야 합니다.
아니, 주파수를 초월하였기에 Big resonance라 부릅니다.

희대(稀代)의 정치 엔터테이너,
허경영이 하늘과 교신할 수 있다며 말하길,
파(wave)를 하늘로부터 받아 환자에게 전한다고 하더군요.
이게 정말이라면 그 주파수는 특정 주파수가 아니어야 합니다.
만약 물리적 특정 주파수로 고정된 것이라면,
다른 이도 그 주파수를 찾아내 이를 재현할 수도 있을 것이며,
최소한 특정 주파수에 구속된 만큼 그 능력에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 우주와 교신하려면, 딱 두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주파수를 다 갖추고 있거나,
이를 초월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딴뜨라에서,
여성 구루와 교접할 때,
그게 여자라고 생각하는 한,
합일의 경지에 이를 수 없습니다.
여자가 아니라,
궁극의 여성성, 샤크티, 원초적 여성에너지이기에,
특정 주파수, 즉 개별 여자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노자에 나오는 곡신(谷神), 현빈(玄牝) 또한 綿綿若存인 것입니다.

谷神不死 是謂玄牝.
玄牝之門 是謂天地根. 綿綿若存 用之不勤.

골짜기의 여신(女神)은 영원히 죽지 않고 만물을 창조해 내니
이를 현빈(玄牝)이라 한다.
현빈의 문은 바로 천지 만물의 근원이다.
이 여신은 보이지 않고 없는 듯하면서도 있으며 그 작용은 무궁무진하다.

***

무공적(無孔笛), 몰현금(沒絃琴)이라고 하는 것,
즉 구멍 없는 피리, 줄없는 거문고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
김영삼이 때문에 쓸데없이 널리 알려진 대도무문(大道無門)에서
대도는 왜 무문이어야 하겠는지요 ?

신라시대의 금척(金尺),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 역시 사정이 이러했으리라.
즉 금척엔 눈금이 새겨지지 않았을 터이며,
만파식적 역시 구멍이 없는 피리였을 터.
만약 금척에 눈금이 새겨져 있었다면,
딱 새겨진 만큼만의 척도(尺度) 구실만 하였을 터,

하지만, 금척이든 만파식적이든 밖에서 구하려한들,
그게 밖에 있을 턱이 있겠으며,
있다한들 구할 수 있을런가 ?
경주 금척리 무덤에 숨겨졌다는
전설의 금척, 그게 설혹 눈금 없는 것이었다한들
외물(外物)로 존재하는 한,
또한 밖에서 구하는 한,
금척일 수 있을런가 ?

사람들은 외물에 넋이 팔려,
한갓 쇳덩이를 무덤 안에 두고,
입 헤벌리고 감탄씩이나 하고 만다.

默不作聲.
입 다물어 소리 짓거리 멈추고,
여기 선시 하나를 소개합니다.
뜻도 수승하지만,
참으로 표현도 아름다운 시입니다.

逍遙 太能 (1562∼1649)

水上泥牛耕月色(수상니우경월색)
雲中木馬製風光(운중목마제풍광)
威音古調虛空骨(위음고조허공골)
孤鶴一聲天外長(고학일성천외장)

물 위에 진흙 소가 달빛을 밭간다
구름 속 나무 말이 풍광을 고른다
위음의 옛곡조 허공 속 뼈다귀라
외로운 학의 소리 하나 하늘 밖에 길게 간다

***

투기(投機)라는 게 요즘 아주 고약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만,
원래 投機라는 말은 불교의 禪용어입니다.
누구라도 부처가 될 수 있다라는 그 바탕 자리를 機, 틀이라고 합니다.
바로 제자의 機와 스승의 機가 상통하는 것을 禪家에서는 투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스승은 꼭이나 스님만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깨진 기왓장도, 구름도, 그림자도 투기의 계기가 되면 모두 스승이 됩니다.

그런데, 이 때 제자의 상대는 특정 주파수가 아닙니다.
기왓장, 스님을 매개로 하였을 뿐,
천지간 전체를 상대로 하여야 하는 것,
하니 frequency spectrum 중 어느 특정한 주파수에 한정될 까닭이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천변만변하는 것,
맛도 없고, 새깔도 없는 어디 한곳에 머무르는 곳도 없는 그 마음이 
스승과 제자가 딱 함께 자리를 같이 하는 것.
이게 주파수를 맞추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파수를 맞추기를 뛰어넘었기 때문에
득도요, 투기요, 깨우침인 것입니다.
어디 구속됨이 없는 계합(契合),
이 걸림, 매임없는 경지를 투기라고 불러야 옳습니다.

만약 어디 특정 주파수에 머무르고 만다면,
그게 허당인 것이, 다음 날 자고 일어나면
이내 아기 잃어버린 처지가 되어,
다시 천지간을 영원토록 방황하게 될 것입니다.

여담입니다만,
그럼 경제학에서는 하필 이런 말을 빌어 요즘 쓰임같이 무지막지한
투기라는 용어로 굳어진 것일까요 ?
투기를 투전놀이쯤으로 생각한 것일 것입니다.
상대의 얼굴표정과 기미를 알아채고, 수단을 부려 판돈을 알긁어 가는 것,
이게 機인즉 機微, 機會를 노려, 일발 승부를 결하는 것이
마치 선의 돈오와 비슷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군요.
실제 투기의 영어인 speculation은 라틴어 어원 상,
contemplation, consideration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즉 눈여겨 숙고하고, 관찰, 감시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speculation :
눈을 감고 마음으로 보거나 머릿 속에 영상을 그려 놓고
면밀하게 검토하고 명상에 잠기며 숙고한 끝에 용단을 내려 투기를 결행한다.)

그러고 보면,
도를 닦는 것이나, 투기질을 하는 것이나, 조금은 같은 구석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저들 망국의 투기 장관 후보들은 이쯤에서 용서해도 될런가 ?

저들의 고유진동수는 얼마일까 ?
오피스텔에서, 논문 표절할 때, 떡값 받을 때마다
화려하게 변조(變調, modulation)가 능수능란하지 않을까 싶군요.

구미호라한들 저리 변신자재가 수월할런가 ?
"코끼리는 생각하지마"란 책을 보면,
"왜 서민들이,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와 대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보수 정당에 투표할까 ?"라는 의문에
그럴듯한 답을 내놓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저는,
"은유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라는 말이
그의 중심 전언 frame보다 더 기억에 남는군요.

금척(金尺) 역시 은유에 불과합니다.
이 시대의 금척은 무엇입니까 ?
늘 그러하듯이,
그대 가까이 있는 것을 조심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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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 : 2008. 3. 7. 11:5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