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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선과 아포플라네시스 그리고 횡설수설

소요유 : 2017. 1. 12. 16:57


조윤선과 아포플라네시스 그리고 횡설수설


박.최 게이트로부터 벗어나 어서 빨리 일상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閉目塞聽

요망스런 이들로 인해 바깥세상이 한창 어지로우니, 

도대체가 눈을 감으려 한들, 마냥 그리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귀를 막으려 한다 한들 맘대로 그리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헌즉 절로 보게 되고, 듣게 되니 마음속엔 어느덧 한이 서리고, 절로 분노가 일고 만다.


閉明塞聰,愛精自保

(論衡)


“눈을 닫고 귀를 막아 정기를 아껴 스스로를 보호한다.”


중국 무술 영화를 보면,

도사나 무림 고수가 곧잘 동굴 속에 들어가 폐관(閉關)하며 수련하는 장면이 나온다.

폐관이란 동굴로 들어가는 문을 닫았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의 오관(五官) 빗장(關)을 틀어막았다는 뜻이다.

그러한즉, 동굴이 아니라, 저잣거리에서도 폐관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自入元 自入明


자기의 본래 근원, 진면목으로 들어가려면,

외부와 통하는 모든 감관(感官)을 열어 두고서는 그 뜻을 이루기 어렵다.

愛精自保

도를 이루려면, 정을 아끼고, 스스로를 보하여야 하건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죄인인 바라,

이리 휘둘리고, 저리 자빠지고 만다.

정녕 내 도는 아직도 먼 곳에 있음이라.


不破禪,不住山;不開悟,不閉關。


허나, 아직 깨우치지 못할진대,

참선을 파하거나, 홀로 산에 들어가 수행을 하지 말라 하였음이라,

이런 형편이라면 어찌 폐관이 가당키나 한 노릇이겠는가?


盲修瞎練而走火入魔。


이를 무릅쓰고 폐관하여 맹목적인 수련에 들면,

주화입마에 빠지게 된다.


차라리 저들과 함께 울고, 짓고 까불며,

옆구리에 막걸리 가득 채운 표주박 꿰차고,

이 진세(塵世)를 한껏 농(弄)이나 하다 가는 것이 수지맞는 일이리라.



김경진 :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조윤선 : “의원님. 橫說竪說 ....”

김경진 : “알았어요? 몰랐어요?”

조윤선 : “제가 ....”

김경진 : “장관 되고나서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조윤선 : “제가 누차 설명을 ... 橫說從說 ....”


청문위원은 소리를 높여 질타를 하고, 한껏 야단을 친다.

하지만 증인은 차분한 목소리로 쟁점을 피해 돌려 말하고 있다.

이를 수사법(修辭法)에선 아포플라네시스(apoplanesis)라 부른다.

그러니까 논점을 이탈하여 빗겨가며 관계없는 대답을 하여,

주의를 엉뚱한 곳으로 빼앗아가는 수법이다.


김경진 위원은 검사 출신이라고 하는데,

조윤선의 아포플라네시스에 걸려 기껏 한다는 것이 고작 으름장이나 놓을 수 있을 뿐이다.

본래 아포플라네시스는 어색하거나 서투르게 구사를 하면,

명예를 잃고, 제 발부리에 걸려 넘어지게 되는 고약스런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조윤선은 외교학, 법학을 전공하였은즉, 서양의 수사학쯤은 배웠지 않았을까 싶다.

경험이 많고 훈련이 잘 되어 있어 보인다.

이 자를 결코 두둔할 일은 없으나, 누구에게나 자기 변호권이 있은즉, 

솟는 화를 누르고 애써 참기로 하였다.

그런 한편으론 마음을 가지런히 정돈하고서는, 

청문회 현장에서의 태도가 예사롭지 않아,

몇 차 동영상을 되돌려보며 저이의 수사술을 점검 해보기도 하였다.


아포플라네시스는 야살스런 정치판이나, 고무(鼓舞) 선동(煽動), 팝아트 등 

책임질 일이 없는 현장에서는 혹 통할지 모르나,

신뢰의 영역에서 책임을 담부(擔負)해야 할 때는 아무리 경험이 많고, 구사력이 뛰어나도,

최종적인 목적성과를 얻는다 장담할 수 없다.


문제는 우리네 현 청문회라는 것이,

수사, 조사권과 같은 강제력 있는 권한을 충분히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말의 성찬에 그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쉬이 노정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를 한시 바삐 보완해야 할 것이다.


앞에서 조윤선 증인의 말을 두고,

나는 횡설수설(橫說竪說), 횡설종설(橫說從說)이라 적어두었었다.


본디 전자는 불교에서 나온 말이며, 후자는 장자가 출전이다.

여기 橫은 수평, 竪나, 從은 수직 차원을 뜻한다.

헌즉 횡설수설(橫說竪說), 횡설종설(橫說從說)은 

언설(言說)이 종횡무진(縱橫無盡) 거칠 것이 없다는 뜻임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釋迦大士。四十九年。橫說竪說。逆說順說。


“석가는 49년 간, 횡설수설, 역설순설 하셨다.”


석가모니께서 49년간 종횡으로 거침없이 말씀하셨다.

이리 외로 틀고, 저리 바로 잡으며,

중생들의 근기(根機)에 따라 설법을 하셨다.

이를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 한다.

허나 이 허공에 가득 찬 중생들 중 그 누가 있어 제대로 알아듣기나 하였을런가?


釋迦老子。播弄唇舌。四十九年。橫說竪說。顯說密說。
(楞嚴經擊節)


“석가께서 입술과 혀를 마음대로 움직이시길 49년이라.

횡설수설, 현설밀설.”


현설밀설은 때론 드러내시기도, 때론 은밀하니 감춘 말씀으로써 설법을 하셨다는 말이다.


百般伎倆。皆是弄人的圈套。千樣鉗鎚。無非鍊鋼鐵的家風。
(楞嚴經擊節)


“백 가지(많은) 기량이심이라.

이는 모두 사람들을 올가미로 씌어 희롱하시는 바라.

천 가지 갖은 쇠망치 집게이니,

강철을 단련하시는 가풍이라 하겠음이다.”


아, 부처의 횡설수설은 중생을 해탈케 하심이나,

조윤선 증인의 횡설수설은 제 잘못을 감추려 함이니,

구피고약(狗皮膏葯)이라 개가죽에 바른 고약처럼 엉터리 가짜 횡설수설이라 하겠다.


여기 遮醜漢堡라 부르는 동영상을 소개하련다.

이는 부끄러움을 가리는 햄버거를 뜻한다.


(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Zcd5qU-08jo)


도대체가 계집사람들의 욕망과 그 표상의 은폐 처리 재주란,

아니 倭人들의 잔망(孱妄)스러움이란.

이젠 橫說從說에 대하여 마저 살펴본다.


徐無鬼出,女商曰:「先生獨何以說吾君乎?吾所以說吾君者,橫說之則以《詩》、《書》、《禮》、《樂》,從說之則以金板、六弢,奉事而大有功者不可為數,而吾君未嘗啟齒。今先生何以說吾君,使吾君說若此乎?」徐無鬼曰:「吾直告之吾相狗馬耳。」女商曰:「若是乎」?曰:「子不聞夫越之流人乎?去國數日,見其所知而喜;去國旬月,見其所嘗見於國中者喜;及期年也,見似人者而喜矣。不亦去人滋久,思人滋深乎!夫逃虛空者,藜、藋柱乎鼪、鼬之逕,踉位其空,聞人足音跫然而喜矣,而況乎兄弟親戚之謦欬其側者乎!久矣夫!莫以真人之言謦欬吾君之側乎!」

(莊子)


“서무귀가 나오자, 여상이 말했다.


‘선생은 홀로 어찌 내 군주를 설득시키셨습니까?

제가 군주를 설득시키는 방법은 횡으로는 시, 서, 예, 악을,

종으로는 금판, 육도를 씁니다.

그리 일을 받들고, 공을 세운 바 많지만, 

제 군주께서 이를 드러내시고 웃은 적이 아직 없습니다.

이제 선생은 내 군주를 어찌 설득시키셨기에, 이리 기뻐하시는 것입니까?’


서무귀가 말했다.


‘저는 오직 개와 말을 감정하였던 것을 바로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여상이 말했다.


‘그게 다입니까?’


서무귀가 말했다.


‘선생은 저 월나라의 유배당한 사람 이야기를 들어 보지 않았습니까?

나라를 떠난 지 수 일일 때는 아는 사람을 보기만 하여도 기뻐합니다.

나라를 떠난 지 수십 일이 지나자, 만나본 적밖에 없는 사람을 보기만 하여도 기뻐합니다.

해를 넘기자, 전에 본 비슷한 사람을 보기만 하여도 기뻐합니다.

사람을 떠난 지 오래될수록, 사람을 그리는 마음이 깊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릇 황량한 곳에 쫓겨 와,

명아주 같은 잡초대가 족제비 다니는 길까지 가리는 곳에서, 혼자 있게 되면,

사람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기뻐하게 됩니다.

항차, 형제 친척의 담소하는 소리가 곁에서 들린다면 어떻겠습니까?

오랜 된 것입니다.

군주의 곁에 진짜 사람의 소리가 들린 바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橫說從說 역시 걸릴 것 없이 박학다식한 말을 뜻한다.

그러하던 것이 요즘엔 횡설수설이 헛소리로 치부되고 있으니,

말이란 것의 명운(命運)도 청문회 증인들의 뒤웅박 팔자처럼 아지 못할세라.


청문회 방송을 보고 있자면 불현듯, 야릇한 세계에 들어선 듯한 착각이 들 때가 있다.

위원들의 질문 자체가 금기(禁忌)시 되던 게 바로 엊그제까지의 일이었다.

헌데, 증인들은 하나 같이 자기 존재를 부정하며, 그런 일이 없다고 발명(發明)하기 바쁘다.

우리는 물을 수 없던 일을 묻고 있는 것이 아닌가?

존재의 유무를 따지는 것이 불가능한 세상은 바로 엊그제까지 우리 가까이에 있었다.

이번 청문회, 그리고 탄핵 이후,

우리는 과연 당연히 무엇이든 물을 수 있는 나라를 맞이할 수 있을까?

촛불은 이를 견인해낼 수 있는가?


이 추위를 불사하며 광화문 네거리에 모인 시민들의 의기(義氣)는,

이제껏, 무작정 충성(忠誠)하고 애국(愛國)하라는 국가의 강요에 반기를 들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우충(愚忠)이라 이따위 맹목적 忠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젠 義가 민주시민의 덕목으로는 더 으뜸 가치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棄忠求義


"충을 버리고 의를 구하라."


시대의 구호는 이러해야 마땅하다.

정의를 바로 세우면, 비로소 따라 忠도 이뤄지고, 애국도 절로 행해지는 법.

외부 국가 권력으로부터 이끌어진 충성이나 애국은 시민과는 별반 상관이 없다.

義를 바탕으로 한 시민의 자각은 곧 나아가 실천적 민주 정치 사회의 초석이 되나니,

棄忠求義는 실로 이 시대 정신을 넘어, 통시적 민주 사회의 작동 원리라 하겠다.


애국 단체라는 이름의 집단은 언제나 태극기를 앞세우고 나타난다.

저 동영상의 ochobo(おちょぼ(口))처럼 말이다.

가면 뒤의 탐욕스러운 누런 이빨들을 나는 본다.


하지만 저들의 애국을 믿는 시민은 이젠 아무도 없다.

내가 토요일에 행해지는 광화문 집회에 가보면,

태극기를 들고 나온 시민을 보지 못하고 있다.

忠은 가고 이젠 義가 온 천하를 덮고 있는 것이다.


☞ 촛불과 태극기


끝으로 한 마디 덧붙인다.

위에서 말이 나온 김에,

물음을 던질 수 없는 물음에 대한 나의 의론을 소개해두련다.


☞ 물음을 물을 수 없는 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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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 : 2017. 1. 12. 16:5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