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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사 2

생명 : 2017. 2. 3. 20:12


서울에서 인연 지은 길고양이 두 마리를 농장으로 데려다 놓은지 3개월여가 지난다. 

그 동안 삼 일에 한 번씩 밥을 주려 농장을 들리다가,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자 이틀에 한 번씩 들렸다.

이 일은 처가 맡아서 하였는데, 나는 차례를 두엇 건너 띄어 처와 함께 하곤 하였다.


어제는 처 혼자 농장에 갔었는데,

서울에 머무른 내게 처로부터 다급한 연락이 왔다.

엘사란 이름을 가진 고양이가 죽어 있다는 것이다.

(※ 참고 글 : ☞ 엘사)


부리나케 농장으로 달려가니,

엘사는 하우스 입구에 드러누워 있다.

사지가 경직되어 있으니, 이미 절명(絶命)한 상태임이리라.

이빨에 피가 묻어 있고, 테이블 밑은 피가 여기저기 튀어 있다.

무엇인가와 사투를 벌이다 힘에 부쳐 당하고 만 것이 역력하다.

필경은 떠돌이 개들의 습격을 받아 변을 당하였을 것이다.


여기 시골 농장,

특히 겨울철엔 농장이 비어,

동네 개들이 드나들고,

고라니가 뛰어 논다.


엘사는 또 다른 고양이 ‘예쁜이’와는 다르게,

사람을 잘 따라, 발밑에 발랑 뒤집어지며 자신을 만져주기를 재촉하곤 하였다.

달포 전에는 잘 먹지를 못하여 동물병원에도 다녀왔다.

링거 주사를 맞고 돌아오자마자 행으로 바로 회복하여 건강을 되찾았다.

그러던 녀석인데 이리도 허망하게도 명줄을 놓고 말았다.


농장 가장자리 뚝방 한켠을 파고 묻어주었다.

땅이 얼어 구덩이를 파기가 힘들다.

곡괭이질을 하였으나 충분한 깊이를 확보하지 못하였다.

일단 가매장을 하고 해토(解土)머리께에 다시 수습을 하여야 하리라. 


여기 뚝방엔 내가 시골에 들어서며,

근 10 여년간 음양으로 인연 지었던,

강아지, 고양이들 대여섯이 묻혀 있다.


'나거든 죽지 말고, 죽거든 태어나지 마라.'

(박상륭 - 죽음의 한 연구)


이 말은 존재의 무상성(無常性)을 드러내었다기 보다는,

끝내 회멸(灰滅)되고 마는 존재의 비극적 운명 또는

그리고 생사윤회(生死輪廻)의 수레바퀴에 갇혀 있는 업력(業力)에 대한 저항이다.


아니 저 말은 저항이 아니다.

그렇다고 희구(希求)도 아닌 것이리니,

차라리 체념을 넘은 달관의 경지에서,

피할 수 없는 존재론적 구속 조건에 갇힌 상황을 역설적으로 토로한 말이 아닐까?


‘그래야 해’ 하는,

다짐의 말을 빈 양 싶지만,

이는 거죽 모양이라,

실인즉, 극복이나 도전이 아니라,

정작은 그리할 수 없는 숙명적 존재의,

그 비극성을 앞에 둔,

작가의 반어적 서술에 그치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대개는, 죽음 앞에선, 

절로 이는 슬픔을 통어(統御)할 수 없다.


생자필멸(生者必滅)


이를 벗어날 수 없기에 체념(諦念)할 만도 하련만,

뼛속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나약하기 그지없는 중생들의 실존적 한계상황(限界狀況)은,

끝내 위로받지 못하는 슬픔으로 마감되고 만다.


과연, 박상륭은 시간의 지평(time horizon) 너머,

대흑천 위신력(威神力)의 실체를 엿보기라 한 것일까?


아,

그 역시,

뭐 대단한 것을 알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난해하기 짝이 없다고 중인(衆人)들이 입을 모으고 있는,

‘죽음의 한 연구’에서의,

‘한’이란 한정사는 바로 그가 온전한 것에 다가서지 못하였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 밖에는 ‘백’, ‘천’이 대기하고 있다.

이를 모두 극복하고 있다면,

굳이 ‘한’으로 꾸미며 유보할 이유가 없다.

그냥 ‘죽음의 연구’ 또는 ‘죽음’의

자족적(自足的)인 언술이면 족할 뿐이었으리라.


(출처 : divinehere.com, 大黑天)


大黑天(Mahākāla, 摩訶迦羅, 瑪哈嘎拉)

원래 이 신은 바라문교의 濕婆, 즉 시바(Śiva)신이 불교로 들어와 자리를 잡은 것이다.

불교에선 이를 大自在天(Maheśvara,摩醯首羅)이라고 하는데,

색계(色界)의 꼭대기에 머물며 삼천계(三千界)의 주인 노릇을 한다.

하지만 후대에 밀교로 들어와서는 호법신(護法神)인,

대흑천(大黑天)으로 변신한다.


Mahākāla에서,

Mahā는 크다(大)라는 뜻을 지니며, 

kāla는 黑 또는 時의 뜻을 가진다.

하여, 大黑 또는 大時라 이르는 것이다.


kāla의 자근(字根)인 kal은 원래 계산(計算)을 한다는 뜻이다.

고대 인도에선 kālá는 오늘 날 144초에 상당한다.


kāla는 이리, 본디 시간이란 뜻을 가진 것이로되,

차츰 숙명(宿命), 명운(命運), 사망(死亡)이란 뜻으로 이끌려 나아가며 외연 확장하게 된다.

마침내 이 시간이 신격화되자, 이 신은 죽음을 주관하게 된다.

일체의 모든 것을 완전히 파괴, 소멸 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그리하여 大黑天이라 부르게 되는 것이다.


허나, 죽음 뒤엔 탄생이 있는 법.

大黑天은 죽음을 주재하지만,

한편으론 생성시복(生成施福)도 주관한다.


이 대흑천은 六臂, 四臂, 二臂의 삼종이 있는데,

육비대흑천(六臂大黑天)으로 몸이 백색인 경우 육비호주(六臂怙主)라 칭한다.

호주(怙主)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일컫는데,

이게 곧 관세음보살의 분노상(忿怒相)이 된다.


(ⓒ高野山有志八幡講十八箇院「五大力菩薩像」之一「金剛吼菩薩」 (日本国宝)(西元九世紀))


언젠가 소개한 일본의 금강명왕(金剛明王), 금강후보살(金剛吼菩薩)도,

문화, 역사적 변천과정을 겪으며 변전한 것으로 대흑천과 연관되어 있다.


(※ 참고 글 : ☞ 金剛吼菩薩)


재미있는 것은,

대흑천은 밀교에선 醫神, 財富之神 등의 호법신(護法神)으로 변신되고 있는 것이다.

시간으로부터 출발하여, 숙명, 사망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치병(治病), 재물 따위의 현실적 가치 주재자(主宰者)로 굽혀지고 있는 점이다.

거대한 우주적 진리 체계, 형이상학적 논의 따위는 중생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재물, 건강 등 현실적 만족을 위해 복무하는 신을 다만, 구하며, 설정할 뿐인 것이다. 


아, 보살, 부처들은 이리도 중생의 욕구에 따라 변신 자재가 화려하구나.

기실,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 

네, 너 가릴 바 없이 존재는 모두 부처의 성품을 가졌다 하였음이니,

굳이 나눠 따질 일이 없음이라.

보살이든, 부처든, 아니면 중생이든 존재는 차별적 대상이 아니란 말임이라.

허나, 이 사바세계의 존재는 상하, 존비(尊卑)가 천양지차임이라,


다만, 내 이리 확인해줄 수는 있다.

六臂, 四臂, 二臂니 하며,

까짓 팔이 여섯, 넷, 둘인들,

그리고, 하마, 

천수(千手), 천안(千眼)이라 요란하지만,

팔 천, 눈 천인들,

아니면, 설혹, 

독비(獨臂), 독안(獨眼)이라한들,

一切衆生悉有佛性인데,

무슨 차별이 있으리오리.


헌데, 언필칭, 보살, 부처인 위격(位格)이언데,

六臂, 四臂, 二臂니 하며,

잔뜩 뻥 치며, 폼을 잡는가 말이다.

이는 실로, 중생을 상대로 겁박(劫迫)하는 것이 아니언가?


아, 중생의 삶은 이리도 어렵구나,

도적에게 뜯기고,

권력자에게 당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대자대비 부처도 되려 겁살(劫煞)을 펴옴인가?


중생은, 

보살이 천수(千手), 천안(千眼)으로 품고, 살핌을 원하기 이전에,

온갖 환난(患難)에 들기를 원치 않음이라,

어이 하여 애시당초 진구렁텅이에 몰아넣고는,

뒤늦게 천 개의 팔로써 거둔다고 힘자랑을 하고 있음이더냐 말이다.

그러면서 복전함(福田函)에 시줏돈 많이 넣어야 복이 많다며,

어리석은 사람을 꾀고 있음이더냐?


나는 본디 세상에 태어나길 원치 않았으되, 태어났으며,

죽어 다시 태어나길 원치도 않음이라.

천수천안 관세음보살도 귀치 않을 뿐더러,

육비 마하가라(摩訶迦羅) 대흑천(大黑天)도 원치 않는다.


'나거든 죽지 말고, 죽거든 태어나지 마라.'


박상륭은 이리 말하지만, 

나는,

애당초, 

나키를 원치 않고, 

설혹,

지붕 위에 채색구름이 몰려와도 죽어 있길 원하며,

태어난다면, 

설사,

태풍, 벼락이 쳐도 까닭 없이 죽기를 바라지 않으리다.


내, 

우리 착한 엘사에게 말하노니,

공연히 다시 환생하길 원치 말지니,

행여,

사람으로라도 다시 태어나길 꿈꾸지 말기를 바라노라.

진실로.


엘사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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