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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립지물(氣立之物)

농사 : 2017. 5. 1. 19:46


정부우세성(頂部優勢性, apical dominance)


사람이 살지 않는 집터가 하나 있다.

왜 사람이 떠나면, 나무도 쓰러지고 마는가?

사람이 떠나고 홀로 남은 공가(空家) 한 구석에 나무가 여럿 자빠져 있다.

혹, 집이나 가구라면 돌보지 않아 헐고, 기울며, 

서서히 시간이란 괴물에 의해 뜯기며 허물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나무는 스스로 자라지 않는가 말이다.

천년 묵은 숲은 그래 제 스스로 꿋꿋하니 장엄한 세상을 만든다.






헌데 일대의 나무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좌르르 누워 있다.

이만도 기이한데, 드러누운 나무마다,

자빠진 줄기를 박차고 일어나 기립(起立)한 가지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다.
과시 식물들이란 기립지물(氣立之物)임이 여실하구나.

자못 놀랍다. 

저 생명의 의지란 얼마나 벅찬가?

왜 살아있는 생명은 끝끝내 대지를 버티고 일어나,

올올(兀兀) 하늘을 지향하고야 마는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벅차도록 가슴을 가득 메운다.


생의 맹목적 의지.


그러나, 저 모습은 너무 처절하구나.

고통이 느껴진다.

서울에서 데려온 길고양이 두 마리 중 하나는 동네 개들의 습격을 받아 죽었다.

하나 남은 녀석은 조금씩 사람 곁으로 가까이 오고 있으나,

아직도 세상을 두려워한다.

밤에 홀로 지내려면 힘이 들게다.

잘도 버티고 있구나.

이곳 시골은 아직도 밤은 춥다.

고통이 느껴진다.

저 어린 생명은 왜 이 모진 세상과 홀로 대면하여야 하는가?


살고자 하는 의지를 쇼펜하우어는 맹목적으로 보았다.

맹목적 의지에 구속된 삶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런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의지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 하며, 욕망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알 수 있는 것만 알 수 있기 때문에, 

세계를 있는 그대로 알 수 없다. 

산다는 것은 알 수 있는 것 안에서만 이뤄진다.

곧 의지의 한계에 갇혀 있다. 

때문에 그것은 알 수 없는 세상을 알 수 없는 만큼 맹목적이며, 

끝없이 일어나는 목적 없는 욕구를 모두 채울 수 없기에 고통스럽다. 


쇼펜하우어는 사람도 동물도 이와 같다고 하였다.

때문에 동물에게 동정심을 베풀어야 한다고 했다.


그도 그랬지만, 나는 식물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때문에 식물이라고 함부로 대하면 아니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백하거니와,

나는 바로 얼마 전에도,

나의 맹목적 의지를 따라,

나무를 자르고, 뽑아내고, 캐내었다.


여기 시골엔 뽕나무가 제 풀로 생겨나고 마구 자란다.

밭 주위에 비죽이 올라오다 그냥 놔두면 일이년 새에 부쩍 자란다.

뽕나무엔 ‘뽕나무이’란 벌레가 잘 생기는데,

하얀 분비물이 잎에 거미줄처럼 엉겨 붙는다.

이것 보기에 여간 편치 않다.

농장에 이로 인한 피해는 없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는 바라, 방심하기에 마음이 놓이지 않아 처리하고 말았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제대로 된 농부가 되는 길은 쉽지 않다.

내 맹목적 의지, 갈증 나는 욕망을 위해,

낫을 들어 다 자란 나무를 꺾고,

예초기를 매고 가끔씩 풀을 제어한다.

쇼펜하우어가 농부가 된다면,

그는 필경은 자연재배자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언제나 되어야,

모든 맹목적 의지를 여읜 바른 농부가 될 수 있을까?


나의 맹목적 의지는,

나만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넘어,

타자도 고통스럽게 할 수 있다.


때문에 타자에 대한 연민과 동정심을 넓혀야 한다.

‘동물해방’이란 책을 쓴 피터 싱어, 

그 역시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였다.

헌데, 나는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로 이를 제한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무생물이 고통이 없기에 윤리적 한계 밖에 있다고 할 수 없다.

기실 맹목적 의지로 따지면 바위만 한 것이 더 있을까?

비바람이 몰아쳐도 저들은 피하지 않고 저리도 굳건히 제 자리를 지키며,

천년 한을 풀지 않고 버티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고민이라도 하지,

바위는 제 자신의 문제를 알지도 못하고 있다.

아니 설혹 알아도 어찌 할 수 없어, 비바람을 마냥 맞고도 천년 그대로 있을 뿐이다.

그러한즉 바위 역시 윤리적 책임 밖에 있지 않다.


천년 세월 쌓인 강변의 모래를 아작 내고,

만년 흐른 강줄기를 시멘트로 꺾어 돌린,

소위 사대강 사업은 제(諸) 존재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져버린 악행이다.

나는 제 사적 의지를 가진 그를  용서할 수 없다.


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쇼펜하우어 책을 대하고는 한 때,

그의 철학에 깊이 경도된 적이 있었다.

개가식이었던 도서관 책장 구석에 박힌 것까지 찾아 다니며,

탐독하던 내 어린 시절이 있었다.

여린 영혼을 인도하였던 내 스승이었던 그.

저 나무들의 기립한 모습을 보고,

불현듯 그가 떠올랐다.


정부우세성은 흔히 식물 호르몬 이론으로 설명을 한다.

애초, 옥신, 사이토카이닌, 지베렐린의 작용 효과가 아니라,

나는 천기(天氣), 지기(地氣)를 동원한 천지자연관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펴려 하였다.


헌데, 저들 나무들의 굳센 의지, 처연한 풍경에,

감상이 일어 전혀 다른 방향으로 글의 흐름이 이끌리고 말았다.

뭐, 그것은 그것대로 놔두자.

나중에 다른 인연이 생기면 못 다한 이야기를 하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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