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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학 단상

상학(相學) : 2017. 7. 31. 10:02


관상학 단상


사주추명(四柱推命)이든 관상(觀相)이든 이게 곧잘 사람을 묘하게 끌어들이곤 한다.

사람의 명운(命運)이라는 것이 과연 예정(豫定)되어 있는가?

면상(面相)대로 사람의 운명이 전개되는가?


부처의 삼십이상(三十二相) 팔십종호(八十種好)는,

세상에서 더는 생각할 수 없을 만치 좋은 것만을 모아놓은 것이리라.

아마도 이런 상을 셋은커녕 단 하나만이라도 옳게 가졌다면 세상을 호령하면 살 것이다.


내가 관상을 공부하면서,

뭇 사람을 관찰하건대 좋은 상을 가진 이는 거지반 없다.

깨지고, 찢어지고, 헐고, 무너지고, 찌그러지고, 삐뚤어지고, 튀어나오고 ...

과시 참담한 지경인지라,

참으로 인생이란 고단들 하겠구나 싶다.


일체개고(一切皆苦)

이 말씀을 깨닫게 된다.


이런 관상을 극복할 방법은 있는가?

아니면 그저 죽은 듯 순명(順命)하며 살 수밖에 없는가?


이제, 먼저 당(唐)의 유우석(劉禹錫)이 유배지에서 지었다는 글 하나를 읽는다.


陋室銘


山不在高,有仙則名;水不在深,有龍則靈。斯是陋室,惟吾德馨。苔痕上階綠,草色入簾青。談笑有鴻儒,往來無白丁。可以調素琴,閱金經。無絲竹之亂耳,無案牘之勞形。南陽諸葛廬,西蜀子雲亭。孔子雲:「何陋之有?」 


누실명(陋室銘)


산이 높지 않더라도, 신선이 거한즉, 이름이 나고,

물이 깊지 않더라도, 잠용이 숨은즉, 영검스러운 법.


여기 비록 누추한 곳이지만, 다만 나의 덕행의 향기만 흐르누나.

이끼는 층계 위로 뻗어 푸르고, 풀빛은 주렴(발) 안으로 숨어들다.

학덕이 높은 이와 담소를 나눌 뿐, 오가는 속인 하나 없어라.


가히 거문고(素琴)를 고를 만하고, 불경(金經)을 읽을 만하고나.

요란한 가락(絲竹)이 내 귀를 어지럽힐 일 없고,

번잡한 공문서가 내 몸을 피곤하게 할 일도 없도다.


남양(南陽) 제갈량 갈대 오두막 집, 서촉 양웅(揚雄)의 자운정이라.

공자가,

‘군자가 거하는데 어찌 누추하다’ 이를쏜가? 

하시지 않았던가?


관상이 그 법수대로 작동할 때는,

오로지 그 관상법에 따라 행동할 때뿐이다.

거기 매여 종속되지 않으면,

관상법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썩은 동아줄에 불과하다.


산이 높지 않더라도, 신선이 거한즉, 이름이 나고,

물이 깊지 않더라도, 잠용이 숨은즉, 영검스러운 법.


산의 고저가 아니라, 신선 존재가 문제 될 뿐이다.

물의 심천이 아니라, 용의 은현(隱現)이 중요할 뿐이다.


산이 높으니까 신선이 있겠고니 믿기 때문에,

신선의 유무불문 신선이 있는 양 살아간다.

물이 깊으니까 용이 있겠거니 믿기 때문에,

용의 존부불문하고 용에게 제사를 지내며 살아가게 된다.


관상법이란 이와 같이 작용될 때가 많다.

관상학이 옳고 그르다 이전에 이미 그것은 사람들의 삶을 지배한다.

신선이나 용의 실재 이전에 앞서 그것은 사람을 규율한다.


我只是我


‘나는 다만 나일뿐이다.’


굶어 죽을 상이라던 당나라의 배도(裴度)는,

후에 재상이 되리란 감평을 받기에 이른다.

(※ 참고 글 : ☞ 면상불여심상(面相不如心相))


그러니까, 배도가 음덕(陰德)을 쌓자,

나쁜 관상이 변하고 급기야 귀한 상으로 바뀌었단 말이다.


하지만, 이런 따위의 相隨心生論,

즉 상이란 마음을 따라 생긴다(변한다)라는 식의 말씀도,

극복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상(相)과 심(心)이 짝으로 놀아나는 한,

표상은 절대 극복될 수 없다.

아무리 마음이 예뻐야 미인이라고 외쳐보았자,

성형병원에 가서 낯짝에 칼질하려는 짓을 멈추게 할 수 없다.


지금은 모르겠는데,

내 소싯적엔 미아리뿐이 아니고, 이대 근처에도 점집이 많았다.

점집이 많다는 것은 곧 점을 치러 다니는 이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저들은 관상이나 점을 믿지 않는다 말하면서도,

이 짓을 애써 구매하러 찾아다닌다.

적지 아니 이에 경도되어 매어 있음의 반증이다.

하지만 저런 태도는 참으로 믿는 이보다 더 엉터리다.

저들은 점보는 것을 마치 영화를 보듯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를 믿는다 하지 않지만, 소비함으로써, 하루 역시 지우고 있다.

하지만 믿는 이는 소비하지 않고 인생을 채운다.

이 둘 모두 물론 엉터리이긴 매한가지이지만,

지우는 것보다는 차라리 채우는 것이 좀 수지맞는 장사가 아니랴?


나는 주장한다.


無相無心


상도 없고 마음도 없다.


이것을 상이나 마음의 무용론(無用論)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상에 매이지 말 것이며,

마음에 따라 상이 변한다는 말도 믿지 말라.


我只是我


‘나는 다만 나일뿐이다.’


다만, 자신만을 지그시 응시할 일이다.


相人,古之人無有也,學者不道也。

(荀子)


상보는 이는,

옛날에 있어도 없는 양,

학자는 말도 하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부처를 두고,

삼십이상(三十二相) 팔십종호(八十種好)를 갖췄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한다.

하지만, 부처 자신은 외눈 하나 깜짝도 하지 않고,

다만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말할 뿐이다.


我只是我


‘나는 다만 나일뿐이다.’


따라서 천 사람은 모두 저마다 최상의 관상을 가졌으며,

만 사람은 모두 저마다 최상의 관상을 가졌음을 알아야 한다.

아니 최상이라 말도 바르지 않다.

유일한, 독특한, 제 개성을 가졌다 일러야 옳다.

그런즉 이제 이를 최상의 관상이라 부는다면, 그제서야 허물이 없다.


天地萬物只是一氣聚散,更無別個。


천지만물은 다만 기가 모였다 흩어질 뿐, 그 외 다른 것이 없다.


***


내가 이리 말하자.

그럼 관상 공부는 왜 하느냐? 라고 반문하는 어리석은 이가 있다.

이리 말해주었는데도 아직 또 물을 것이 남아 있는가?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상 공부를 그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런가?


나의 공부는,

거기 매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不昧觀相


관상에 매몰되면 죽는다.


不落觀相 


하지만, 공부가 깊기에 관상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여도 그르다.

내 말을 소비하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내 글을 재미로 대하면, 여우가 되고 말리.

(※ 참고 글 : ☞ 수호지는 젊어서 읽으면 아니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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