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사천왕(四天王)과 복전함(福田函)

소요유 : 2008. 3. 10. 15:36



나는 앞 글 ‘☞ 2008/02/29 - [소요유/묵은 글] - 사천왕’이란 글에서
나름대로의 인식지평을 펴다려 사천왕을 조명했다.

오늘 이야기는 그 후편이 되겠다.

먼저 이야기 하나를 꺼내들고 시작한다.

은봉도화(隱峰倒化)

은봉(隱峰)은 마조도일에게서 도를 깨우친 스님이다.

그가 입적하시기 전 그를 따르던 대중에게 물었다.

“나는 여태까지 고승들이 누워 죽고 앉아 죽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그런데 서서 죽은 사람이 있느냐 ?”

그러자, 대중들이 말했다.

“있습니다.”

“그럼 거꾸로 물구나무 서서 죽은 사람은 있느냐 ?”

“그런 것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자 은봉은 거꾸로 선채 천화(遷化)하시고 말았다.

거꾸로 선 채로 염을 다 했는데도 그 시체가 꼿꼿이 서서,
도무지 움직이질 않는다.
어떻게 다비를 치를까 걱정이 되어 스님들은 의논하는데,
구경하는 사람들은 모두 놀라 경탄을 금치 못했다.

이때, 은봉의 여동생이 비구니스님이었는데,
마침 그 자리에 있었다.
꼿꼿이 거꾸로 서 있는 시체 앞에 가서 외치기를,

“오빠!
살아 생전에는 계율을 그렇게 무시하고 살더니만 죽어서는
이제 사람들을 현혹시키려 거꾸로 서 있소 ?”

하고 시체를 툭 치니 피식 쓰러지고 말았다.
다비를 치르고, 사리를 거두어 탑을 세웠다.

좌탈입망(坐脫立亡),
즉 앉은 자세 또는 선 자세로 돌아가시는 스님은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으시다.

삼조(三祖) 승찬은 뜰을 거닐다 나뭇가지를 잡고 열반하셨고,
우리나라만 하여도 효봉, 서옹 ... 등 좌탈입망(坐脫入忘)하신 스님은 적지 않다.

아무리 김삿갓 말대로 유유화화(柳柳花花)라지만,
중생은 이리 살아서도 흐늘흐늘 제 몸 하나 건사하기 어려운데,
애써, 남 죽은 자세까지 셈하는 것이야말로 부질없는 노릇이 아닌가 ?

앉아서 죽든, 서서 죽든, 그것이 누워서 죽든,
모두 한줌 재로 돌아가는 바는 같다.
그런데도, 좌탈입망에 놀라는 것은 무엇인가 ?
앉거나, 서서 죽음을 맞이 한다는 것은 죽는 순간 자신의 죽음을
주체적으로 쳐다 보고 계셨음을 뜻하고 있지 않은가 ?
무엇이 자기자신의 죽음까지 지켜볼 수 있게 하였음인가 ?

그런데,
여기 은봉스님은 더 나아가,
좌탈입망(坐脫立亡) 스님들을 싸잡아 희화화하고 계시는 게 아닌가 ?
거꾸로 서서 돌아가실 때,
스님은 무엇을 보셨을까 ?

어렸을 때,
우리는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이리저리 흔들리며,
적당히 어찔어찔 한 가운데,
마치 어른들이 술에 취해 세상을 건너듯,
그리 현실속에서 동화의 세계로 뛰어들어가 놀곤 했다.

은봉스님은 돌아가실 제,
저승 문전에서도 어린아이가 되고 싶으셨던 것이 아닐까 ?
도립된 은봉의 눈엔,
저들 좌탈입망한 이들이 거꾸로 서서 돌아간 것이니,
실은 은봉 하나만 제대로 입탈입망(立脫入忘)한 게로다.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에 등장하는 그 등신불은 소신공양(燒身供養)의 예다.
몸을 버려 제 몸으로 도리어 부처가 되신 게다.
만적(萬寂)스님 몸을 향유로 한달간 결은 후,
향로를 머리위에 얻으니 연기가 일며 소신(燒身)되었다.
이윽고, 금입(金入)으로 장엄하고 금불각(金佛閣)에 모시었다.

부처상은 대개는 인간 크기 보다 크게 조성하여 모시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주 작게 하여,
조그만 방이나 내 몸에 지닐 수 있게 조성하기도 한다.

하지만, 등신불이란 뭣인가 ?
등신불(等身佛)에서의 等身이란 身과 등급이 같다, 동등하다라는 뜻이니
그 크기가 사람 몸 크기라는 말씀이다.
하니 사람이 바로 부처가 되시면 등신불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
누구나 불성을 지녔다라든가, 중생이 곧 부처라는 말씀.
이 말씀이 저 만적스님의 소신공양(燒身供養) 앞에서,
그저 넙죽 받기에는
한가하니, 사뭇 염치없는 짓거리가 아닌가 하는 부끄러움을 일게 한다.

이야기 따라 걷다보니 문득 곁길로 들어섰다.
다시 되돌아 서니,
저만치 좌탈입망의 말씀을 드리던 곳이 기다리고 있다.
눈 맞추고 길을 마저 이어가자.

게서, 나는 와탈(臥脫)과 좌탈(坐脫)을 잠시 생각해 보았던 것이다.

나의 앞 글 ‘사천왕’에서도 실인즉 나는 같은 이야기를 꺼내었던 폭이다.

복전함은 하나같이 부처님전에 놓여져 있다.
복전(福田)이 무엇인가 ?
복을 이루는 밭이란 뜻이 아니겠는가 ?
복의 밭을 일구려면,
복전함에 보시를 하여야 한다는 이름이 아니겠는가 ?
이 뜻을 그대로 새기면,
부처 앞에 서 있는 게 제법 버성기게 된다.

협박인가 ?
유혹인가 ?

아니면,

시험인가 ?
구함인가 ?

몇 년전 교회 재정의 70% 이상이 교회 유지 비용으로
쓰인다는 논문을 읽은 적이 있다.
나는 어떤 조직이든 자체 유지비용이 3할을 넘으면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기업체라면 감가상각충담금이라든가, 투자, 위험 등에 대비하여
사내유보금을 비축하는 것이야 당연하다.

하지만, 명색이 종교단체라면 최소한의 유지비용외에는
모두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찰 경내를 거닐다 보면,
복전함이 적지 아니 목격된다.
대웅전은 물론이거니와, 명부전, 시왕전 ...
게다가 야외에 모신 불상 앞에도 빠지지 않고
복전함이 얌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뿐이 아니다,
철 따라 각종 불사동참(佛事同參) 플랑카드(placard)가 걸려있다.
우물불사, 복원불사, 개금불사, 기와불사...
중생들은 참으로 복밭 닦을 일도 많다.

땅 파서 사찰을, 성전을 유지하는 것이 아닌 한,
금전, 은전이 왜 아니 소용되겠는가 ?

하지만,
저 복전함이 처처에 계시온데,
해우소에는, 사천왕각(四天王閣)에는 왜 아니 모셔져 있는가 ?
나는 그런 역설적인 의문을 가진다.

결코, 오랜 옛날이 아니다.
지금은 모두 잊고 산다.
그것도 아주 잘 산다거니 하고 살아들 간다.
1970년대까지만 하여도 시월 상달이면,
집집마다 고사를 지냈다.

그 때,
대청마루, 방은 물론,
부엌에도 고사떡 내어 정성을 빌고,
뒷간에도 그리 귀신을 모셨었다.
이는 부엌엔 조왕(鋤王),
뒷간엔 주당귀신이 계셨기 때문이다.
심지어 강아지 집도
북어 대가리 틈에 꽂고,
막걸리 붓고,
시룻떡 벌려놓고,
무탈하라고 축수했다.

복밭이 왜 부처 앞에서라야만 펼쳐져야 하는가 ?
기왕에 복밭 일구려면,
왜 아니 되런가 ?
해우소에도 복밭을 차리고,
정각(井閣) 귀퉁에도 복전 내고,
사천왕각에도 복밭을 일궈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不二門이라 하지 않았음인가 말이다.
음양고저를 가릴 까닭이 도시(都是) 없음이다.
이게 와탈(臥脫)을 넘어
좌탈(坐脫), 입탈(立脫), 도탈(倒脫)하는 법행(法行)이자 범행(梵行)이 아니겠는가 ?

저들이 염치 차리느라고,
양지 바른 곳만 가려 복전함을 두었을 리는 없다.
또한 그들이 겸손하여,
위광어린 부처 앞에만 시주공양코자 함이었을 텐가 ?

부처님전이 아니라,
처처(處處)가 복밭 아닌 곳이 없음이다.
그러하니, 뒷간에도, 사천왕각에서도 ...
따비밭, 뻘밭, 비탈밭, 쑥대밭, 삼밭, 풀밭 가리지 말고
쟁기질, 따비질, 호미질로 복을 일구자는 얘기인 게다.

大黑天이라고도 불리는
마하카라(maha-kala,大時)는 힌두의 신이다.
시간의 신. 파괴의 신으로서,
이 신에 기도하려는 사람은 발가벗고 본존을 대하여야 하며, 해골로 탈을 만들어 쓰고,
인골로 단주(單珠)를 만들어 들고, 인육을 태우며, 사람의 피를 이겨서 향을 만들고,
머리를 풀고 임한다.

지금 우리는 진흙 이긴 흙덩이에도 금박 올려 입히고,
나무조각에도 한껏 단청 올려 장엄하고,
어여쁘고, 거룩한 님만을 좇아 기릴 뿐이다.

힌두의 위대함은 저런 게 아닐까 ?
저리 험하고, 흉하신 신까지 모실 수 있는 마음.
빛 뿐이 아니라,
어둠까지 깍듯이 섬기는 정성.

시간의 신 앞에 만물은 파괴되고 만다.
하지만, 또한 시간의 축복 속에 새 생명이 태어나기도 한다.
파괴 뒤엔 생성이 있고,
생성 뒤엔 사멸이 있다.

마찬가지로 사랑 뒤엔 분노가 계시옵고,
환희 밑엔 슬픔이 저리도록 흐르고 있음이다.
어둠과 광명은 양성적이다.

나는 앞의 글 ‘사천왕’에서
이를 일깨웠음이다.
이게 묵언(黙言)의 도리로 다해질까 ?
듣느니, 보느니,
청맹과니 당달봉사들임에랴.

***

내 짐작커니,
신도 입장에서는 빌어 복을 얻을 만한 곳,
사찰 입장에서는 시주를 걷기 그럴싸 한 곳을 가려,
그리 한 것이 아닌가 싶은 게다.

하니,
형편이 그러하다면,
차라리 나는 이리 제안한다.

삭망(朔望)을 기준으로,
즉 초하루에서 보름까지는 이제껏처럼 부처님 앞에,
보름에서 그믐까지는 사천왕 앞에,
이리 번갈아 가며 복전함을 두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천왕 앞에 두었던 복전함은
거둘 제, 모두 가난하고 불쌍한 중생을 위하여
자비희사, 회향하였으면 싶은 것이다.

이미 빛내려 밝고 높은 부처가 아니라,
어둠과 고통속에서 노역을 불사하시는 사천왕께
복을 비는 것도 가히 아름다운 일이 아닐까 ?

이리되면,
차츰 차츰 복덕(福德)이 빛과 어둠에 안분될 터이니,
최소 사찰 재정의 50%는 사회에 환원되는
아름다운 역사가 이 땅에 깃들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리 한다고 스님들이 설마 굶어 돌아가실까 ?
IMF 시절,
숱한 이가 굶어 죽고, 스스로 명을 끊었지만,
과문인지 몰라도, 스님이 밥 굶고 돌아가셨다는 말 들은 적이 없고,
목사님이, 신부님이 궁핍하셔서 자살하셨다는 얘기 접한 적 없다.

게다가,
저 사천왕님이야 말로,
달님이심이라,
달님이 햇님의 은총을 받아 어둠 속에서 저리 은은하시듯이,
사천왕 역시 달님처럼 부처의 가피 속에 은근히 어둠을 지켜주고 계심이랴 !
달님 이슬 머금은 복밭이야말로 포근하니 자애롭다.

***

나는 黙이 아니요,
喝도
棒도 아님이니,

밑 터진 계집 싸갈기듯,
뭇 낯짝에
토혈(吐血)코자 하노라.

덕산, 임제는 할, 방으로 천하를 공연히 휘저었지만,
나는 지금 이리 접동새인 양
목구멍 찢어 대함(大喊)을 토해내,
천하를 구휼코져 함이다.

그러하니,
정작 내 말은 할, 방이 아니라,

如時雨,
如時風

은빛 바람 소리로 흐른다.
듣는가 ?

ps)
며칠전 이 글에 참고될 만한 다른 글을 읽었다.
하여 이리 링크를 새겨둔다.

똑같은 스님인데 참 천양지차 ☞ http://kr.blog.yahoo.com/jhkey0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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