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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걸과 빠돌이

소요유 : 2017. 8. 24. 15:46


빠걸과 빠돌이


내 소싯적 바로 옆집엔 마음씨 좋게 생긴 아저씨가 살았다.

이 분이 상처(喪妻)를 하셨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후취(後娶)를 들였다.

동네 골목 따라, 참새 소리처럼 재빠르게, 소문이 파다하게 휘돌았다.

그녀의 출신이 빠걸이라는 것이다.


흉한 일이라는 듯,

코를 찡끗거리며,

그러나 몹시 재미롭다는 듯,

입도 벙끗거리며,

이야기를 퍼 나르기 바빴다.


동네 아주머니는 물론,

어린 아이들까지,

이 일에 열심히 종사했다.


빠걸이란 무엇인가?

요즘엔 이 말을 잘 모르는 이가 많으리라.

빠(bar)란, 이제 전용(轉用)되어 술집을 가리키나,

원래는 술집에 주인과 손님을 가로질러 길게 설치된 접객 테이블을 말한다.

여느 테이블은 이동이 가능하나 이 바는 고정되어,

서비스하는 이와 서비스 받는 이를 슬쩍 가른다.

이 바를 가운데 두고 양자는 주객으로 나뉘되,

가까이에서 달콤한 서비스와 친밀한 말을 교환하고 소비한다.


하지만, 빠란 본디 형식에 불과한 것이라,

사람의 욕망은 곧잘 이를 넘어,

사단을 일으키곤 한다. 


빠걸이란 이 빠에 매여,

손님들 술시중을 드는 여자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어디 술시중만 들고 말뿐인가?

빠에서 술은 그저 매개(媒介)일 뿐,

연기처럼 농담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다,

끝내는 모닥불처럼 언약의 말씀이 타오르기도 할 것이며,

이게 가슴에 옮겨 붙으면 별별 희한한 일이 다 일어나고 만다.


술이 핑계가 되어,

손목을 잡고 잡히우며, 홀 정면에 설치된 무대에서 춤을 추게 되고,

급기야는 살을 맞대고, 뼈를 태워 녹이는 일이 생기곤 한다.


그녀가 일하는 곳은 중앙시장 입구 큰길가에 있었다.

동무들과 거기를 지날 때는 가슴이 쿵쾅거려,

감히 쳐다도 보지 못하고 바삐 지나치곤 하였다.

요란한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고,

요망스런 네온사인이 어린 혼을 후렸다.


후취라지만,

그녀는 저녁때가 되면,

지분(脂粉)을 얼굴에 짙게 바르고,

입술을 싯뻘겋게 칠하고는 빠로 일을 나갔다.


동무들과 놀이를 하는 한가운데를,

그녀가 가르고 지나면,

자르르 지분 냄새가 흘렀다.


이 냄새에 취하여,

한동안 놀이는 건공중에 붕떠서,

아이들은 집중을 못하고,

헛발질에, 넘어지고 자빠지곤 하였다.


당시엔 빠걸 외엔 입술연지를 그렇게 강렬하게 칠하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색이 짙으면 천하다 질타를 받았다.

요즘엔 나 어린 중학생도 시뻘겋게 칠하고 다닌다.

여기 시골 농장 가까이에 중학교가 있는데,

지나는 계집아이들을 볼작시면,

이 빠걸보다도 입술연지가 더 진하면 진하지 못하지 않다.

남의 아이들 보고 못할 말이지만,

아이들을 아무리 보아도,

청순한 맛이 없고,

질질 욕기(慾氣)만 흐른다.

그 순결한 얼굴들에,

욕망을 처바르고 나대니,

요즘 계집아이들은 참으로 불쌍코나.


요즘엔 빠걸이란 말은 사라졌지만,

대신 빠돌이는 사뭇 많다.


호스트빠에서 몸 파는 녀석들이 있다.

빠돌이는 그 하는 짓거리가 그 녀석들보다 덜 할 것도 없지만,

대개는 정치적 신념 아니 망상이 골수에 든 이들을 가리킨다.

연예인을 추종하는 광팬을 두고 빠순이, 빠돌이라고도 하지만,

이들이 여론을 휘젓는다든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애초엔 미미했다.

하지만, 요즘엔 'Wag the dog'라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데 까지 이르곤 한다.

고집멸도(苦集滅道)라, 아아 집착이야말로 실로 고(苦)의 원인인 것을.


나는 개인의 정치적, 종교적 신념을 존중한다.

하지만, 그 신념의 형식으로 타자를 괴롭히고,

그 내용을 타인에게 강매(强賣)하는 것은 용납하지 못하겠다.


어느 날 손님 하나가 내게 은밀히 다가와 전화번호를 알려 달란다.

그 후 그자는 시도 때도 없이 내게 문자를 보냈다.

자기가 한 번 문자를 보내면, 오천 명에게 보낸다고 떠벌린다.

조잡한 성화(聖畵)가 그려져 있고,

유치한 종교 세일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그에게 다시는 보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하지만 알았다하고는 연신 다시 보내길 세 차례나 이어지고 있다.


이 사람은 과연 제가 믿는 종교를 잘 따르고 있는 것일까?

그는 스스로 제가 참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믿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까지 그리 인정해준다고 믿어서는 곤란하다.

이런 사람을 흔히 광신도(狂信徒)라고 하지만,

외려 자애(自愛)가 심해지면 이리 되지 않을까 싶다.


힌두 사원 앞에는 꽃을 파는 가게가 있다.

신을 향해 향을 피우고 꽃을 바친다.

신에게 헌화(獻花), 헌다(獻茶)하며 공양을 하는 까닭은,

신을 찬양하기 때문이다.

인도의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는 

성스러운 신에 대한 기타(Gita, 歌頌)란 뜻인데,

사원에 꽃을 바치는 것은, 이 가르침에 따라

신애(信愛) 즉 믿음과 사랑을 통해 구원에 이르고자 함이다. 

이를 박티 요가(Bhakti Yoga)라 한다.


신을 찬양하는 것도 좋지만,

사람은 도리 없이 구체적 현실을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이 현실에서 살아가려면 행위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행위는 진실과 충돌하고, 개인적 욕망과 갈등을 일으키곤 한다.


행위는 개인의 욕망에서 비롯된다.

이 욕망이 일으키는 행위에 따라,

윤회의 쇠사슬에 묶이게 되고 고통을 일으킨다.

하지만 이것은 행위 그 자체에서 오는 문제라기보다는,

행위로서 꾀하는 결과와 그 기대하는 결과에 대한 집착에서 온다.

따라서 행위를 포기할 것이 아니라,

행위의 결과에 대한 집착에서 놓여나야 한다.


행위는 그 자체만으로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다만 집착을 버린 행위는 순수하며 성스럽다.

바가바드 기타에선 욕망과 집착을 여윈 행위가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했다.

이를 카르마 요가(Karma Yoga)라고 한다.


흔히들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생리적 요가인 하타 요가(Hatha Yoga)외에도,

요가엔 분파가 많다.


내게 연신 문자를 보내는 저이를 겪으면서,

나는 카르마 요가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내가 그를 두고 광신도조차도 아니  되고,

그저 자기애에 빠진 이라고 보는 것은,

그의 과도한 집착 때문이다.


그는 참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집착에 빠져 있을 뿐이다.

이러할 때는 그저 사원이나 교회에 가서,

혼자서 가만히 꽃을 바치는 것이 낫다.

지 아무리 문자를 오천 명 아니 오만 명에게 보낸들,

그에게 구원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보는 빠돌이들의 가장 큰 문제 역시 집착이다.


노무현빠, 이명박빠, 박근혜빠, 문재인빠 ...

빠돌이는 이들에게 헌신한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구원하지 못한다.

나아가 헌신의 대상인 이에게도 누(累)를 끼치고 만다.

한 때 극성 노무현빠를 두고,

진보진영조차에서도 노무현은 노빠들이 망치고 있다는 말이 나오기까지 하였다.

온 세상을 평화롭게 한다면서도,

저들 종류가 다른 빠들은 서로 간 극렬하게 충돌하며 불화를 일으킨다.


이들 빠들의 행동은 그 자체로는 외부에서 참견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빠들은 대개 자신 바깥에 대하여 적대적이다.

특별히 적대 진영에 대하여 날을 세우는 것을 넘어,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신앙 노선, 정치적 신념이 다르면,

일반인들에게까지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한다.


자신이 추종하는 이에 대한 과도한 편집증적 집착 역시,

자기 자신으로 향하는 전도된 자기애의 발현으로 나는 본다.

저들은 자기보다 강한 사물에 기대어 자신을 강화시키고 있을 뿐이다.

자신에 충실하며, 자신감이 넉넉한 이는,

외물에 과도히 기울어지지 않는다.

내가 중심에 서면 될 일을,

구태여 밖에서 구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음인가?

(※ 참고 글 : ☞ 관음은 누구에게 참불하는가?)


自燈明 法燈明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을 일인 것임을.


이에 대하여 내가 진작에 새겨둔 글이 있으니,

다시금 이끌어 두려고 한다.


『 佛說長阿含經卷第二 』


是故,

阿難!當自熾燃,熾燃於法,勿他熾燃;當自歸依,歸依於法,勿他歸依。

云何自熾燃,熾燃於法,勿他熾燃;當自歸依,歸依於法,勿他歸依?


阿難!比丘觀內身精勤無懈,

憶念不忘,除世貪憂;觀外身、觀內外身,

精勤不懈,憶念不忘,除世貪憂。受、意、法觀,

亦復如是。是謂,阿難!自熾燃,熾燃於法,

勿他熾燃;當自歸依,歸依於法,勿他歸依。

佛告阿難:「吾滅度後,能有修行此法者,

則為真我弟子第一學者。」


그런고로, 

아난이여! 

마땅히 자기를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할 뿐, 다른 것을 등불로 하지 말아야 하느니.

마땅히 자기 스스로에게 의지하고, 법에 귀의할 뿐, 남에게 의지하지 않아야 하느니라.


이르길 그럼 어찌,

자기를 등불로 하고, 법을 등불로 하며, 다른 것을 등불로 하지 않는 것인가?

또한 마땅히 스스로에게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며,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는 것인가?


아난이여, 비구는 몸 안을 관(觀)함에 부지런히 힘써, 게으름을 부리지 않으며,

단단히 챙겨,  잊지 않으며, 세간의 욕망과 근심을 없앤다.

몸 밖과 몸 안팎을 관(觀)함에 부지런히 힘써, 게으름을 부리지 않으며,

단단히 챙겨, 잊지 않으며, 세간의 욕망과 근심을 없앤다.


受、意、法을 관(觀)함도 역시 이와 같으니,

아난이여, 

또한 이와 같으니 이것을 이른바,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으며 그 외 다른 것을 등불로 삼지 않는 것이요.

마땅히 자기에게 의지하며, 법에 의지하며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이르신다.

「내가 열반에 든 뒤에 능히 이법을 수행하는 자는 곧 진실된 나의 제자이며,

제일 으뜸가는 배움에 (힘쓰는) 자가 되리라.」


(※ 自熾燃,熾燃於法

     熾燃於法을 法熾燃이라 하지 않은 것은,

     自와 다르게 法은 熾燃의 외적 객체가 되기 때문이다.

     즉 自의 경우는 자기자신의 身, 受, 意를 觀하는 것이지만,

     法은 자신 바깥의 존재를 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기사 法에 내외가 따로 있겠음이나, 글을 짓자니 이리 구별하였으리.)


흔히 알려진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이란 말은 기실 경전에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自熾燃,熾燃於法’ 이런 말만 있을 뿐이다.

熾燃이란 불꽃이 치열하게 타오르는 모습을 뜻한다.

우리가 초파일 연등을 보면 마음이 온화해지며 절로 경건해진다.

하지만 熾燃이란 말은 사뭇 격렬하여 역동적이다.

마음을 온화하니 가지는 것도 좋지만,

역시나 공부(工夫)란 불같이 치열하게 하여야 하는 것임인가?

자기에게, 법을 구함에,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하는 마음의 각오가 없다면 뜻을 이루기 어렵다.

그러한 의미에서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도 좋지만,

‘자치연(自熾燃),치연어법(熾燃於法)’이란 말은, 

수행을 자연스레 강조하여 실천적인 노력을 일깨우고 있어 더욱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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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 : 2017. 8. 24. 15:4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