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둔(遯)

소요유 : 2017. 10. 30. 17:00


어제 새벽길을 떠나는데 앞서,

일순(一瞬) 망설이다가 점을 쳐보았다.

나는 애시당초 점치는 것하고는 친하지 않은 사람인데,

그 떠남이 예와 다른지라,

떠오른 마음의 끄달림에 이끌리는 데로 나를 놔두었다.

 

원래 주역 점은 그 작괘법이 간단치 않다.

시초(蓍草) 줄기를 쥐고, 던지고, 나누고, 배열하는 18법의 복잡함은 물론이거니와,

용신(用神) 하는 법도 법식대로 잘 헤아려야 하는 즉,

나처럼 게으른 이는 도시 이처럼 번거로운 작법, 해석 체계를 따르는 것이 용이치 않다.

 

뇌 속에 떠오른 갖은 의식들은 내 게 아니다.

 

是法即生即住即滅,即有即空,

剎那剎那亦如是法生法住法滅。

何以故?九十剎那為一念,一念中一剎那經九百生滅。

(仁王般若經)

 

한 생각 속에 81,000번의 생멸이 있다는 말씀인 바라,

나는 다만 잠자리채 하나 들고,

의식의 허공중을 날아다니는 생멸하는 하나를,

낚시 하듯 건져 올릴 뿐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제대로 점을 잘 치려면,

내 의식에 떠오르는 실오라기 같은 단 하나의 의식 단편일지라도,

그게 내 것이 아니라, 

마치 하늘가를 맴도는 뜬구름처럼,

내 것이 아니라 여겨야 한다.

 

허나 그렇다한들,

내 마음의 뜨락에,

잠자리 떼가 날아듦은,

다른 이와 다를 터인즉,

이는 마당 주인과 나뉠 일이,

결코 아닌 것이 아닌가?

 

나는 이런 생각을 소싯적 해 본적이 있다.

그런데,

다시 마음을 추스려 생각해보자면,

그 마당이 진정 네 것이냐?

이리 묻고 나면,

결코 내 마당이라 강변할 것도 아님을 알겠더라.

 

그 마당은 내 것이 아니며, 

거기 노니는 잠자리 떼 역시 내 것이 아님을 알겠음임이라.

허나, 그것들이,

내 것이 아님을 알고 모르고는, 천양지차임이라,

이에 너와 나의 갈림이 있음이라.

 

내 것이라 여기는 것과,

내 것이 아니라 여김엔,

다름이 있다는 말이다.

이 양자의 차이를 알 때,

사람은 자유를 얻게 된다.

지 아무리 어려운 일에 처하였을 때라도.

 

이리, 제법(諸法)이 모두 인연소산인 바라, 

그날, 그 때, 내가 처한 상황에 마주친 기이한 맺음이라 여기고,

그리 맞고, 모실 일이다.

 

그러한즉,

내 의식의 허공중을,

가을하늘의 잠자리처럼 나돌아 다니는 온갖 것을,

하찮다 여겨 내다 버릴 일도 아니오,

모두 챙겨 품 안에 담글 일도 아니다.

다만 인연 따라 맺고 푸는 일을

그저 담담히 지켜 볼 일이다.

煩惱卽菩提

본디 청령(蜻蛉)은 번뇌이기도 하지만,

이게 지혜이기도 한 바라,

도대체 나눠,

솎아 내버리고, 

솎아 취할 일이 아니다.

 

하여, 나는 구태여, 주역의 전통 작법체계를 따르지 않고,

그날, 그 당시 내 뇌 속을 흐르는 의식의 구름 한 조각을 무심히 취하여,

득괘(得卦) 과정을 대신한다.

어제 새벽,

내 뇌 속을 흐르는 수많은 의식의 흐름 한가운데,

내 잠자리채에 걸린 괘는 33번째인 바임이라.

 

이는 나만의 독특한 작법 체계일 뿐이다.

이리 나는 내 거울을 통해 주역을 만날 뿐이다.

 

 

주역 총 64괘중 33번째 괘는,

天山遯이라,

遯은 달아날 둔이라,

그가 이른즉,

이것은 다음을 예고함이 아니라,

오늘을 다만 지적하고 있을 뿐임이라,

오늘 나의 갈증을 재우지는 못하고 있다.

 

본디 재삼독(再三瀆)이라,

점은 거푸 치는 것이 아니다.

初筮,告。再三瀆,瀆則不告。

처음 한 번은 일러주지만,

거푸 여러 번 치면 결코 알려주지 않는 법이다.

 

나는 점을 믿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는 이인데,

이에 더 나가 아쉽다고,

내 만족을 채우기 위해,

새로 점을 재우쳐 칠 일은 아니다. 

 

다시 점을 치려고 한다면,

아마 제 자신의 마음에 쏙 들 때까지,

새벽이 돋도록,

손을 괴롭히리라.

그러하다면,

구태여 점을 칠 일이 어디에 있으랴?

 

주희(朱熹)가 국사로 있었을 때,

권력을 쥔 한차주(韓侘胄)의 횡포를 규탄하는 상소를 하려 하였던 적이 있었다.

이를 안 제자들이 스승의 위험을 염려하여 만류하였다.

이에 점을 쳐서 결정하기로 하였다.

그 때 나온 괘가 바로 이 천산둔괘였다.

이제,

주희는 물러나 상소문을 태우고 은퇴하였다.

 

도대체가 일을 앞두고,

자신의 판단을 믿지 못하여,

한낱 점에 의지할 수 있음인가?

 

나는 이런 일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도대체 좌우 어떤 길로도 결단을 내리기 어려웠을 때,

이리 외부의 힘에 의지하여, 처결하여야 하였음이라.

앞일을 그 누가 있어 알랴?

이리라도 외부의 권위에 복속하면,

최소한 마음의 평안은 구할 수 있었을 터이다.

 

고심 끝에 구한 그 마음의 평안은 알겠음이나,

주역점이 사물의 궁극 최선해임을 과연 보증해줄 수 있는가?

나는 회의적이다.

 

나 역시 새벽길에 주역 점을 쳤음이나,

이로써 나를 구하리란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다만,

한 개별적 물음에 대하여,

객관적, 우주적, 세계사적,

대답을 할 수 있으리란, 

일반적, 역사적 막연한 기대의,

그 전망, 창(窓)을 통해,

장난삼아 그 예지력을 시험하였을 뿐,

어찌 그에 구속되랴?

 

하지만,

天山遯이라,

이는 어쩌면,

현실을 너무도 잘 지적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1980년대 존 케이지란 작곡가가 스즈끼의 영향을 받아 주역에 심취하였다.

그는 주역 점을 쳐서 작곡을 하고 이를 chance operation(任意性)이라 했다.

곧 괘를 무작위로 얻어내고, 이를 토대로 음표, 악기 등을 선택해서 작곡을 하였다.

하니, 이것은 실제론 주역을 난수(亂數)발생기로 이용하였을 뿐,

참다운 주역의 경계에 들지는 못하였던 유치한 노름에 다름 아니다.

산가지가 아니라, 윷으로, 공깃돌로는 왜 아니 우연성(chance)을 만들어내지 못하겠는가?

미아리 점집에 틀어박힌 설 배운 점쟁이라 한들, 

하다못해 점치로 온, 아낙네 치마폭이라도 들추고, 

수심에 찬 얼굴의 깨알 기미라도 헤아려 점사를 농단하지 않는가?

케이지는 주역을 빙자하여 그저 컴퓨터로 random number를 만들어내었을 뿐이니,

그는 미아리 점복자(占卜者)보다 더 주체적인 성의가 없었다 하겠다.

 

나는 그의 경건함이 부재한 태도, 기계적 모방 등,

연기를 의식한 행위 예술에 대하여는 비판적이다.

다만 chance operation이란 용어는 참신하여 과히 보아줄 만하다 여긴다.  

 

과연 나의 chance operation, 

그 천산둔은,

장차 어디까지 괘가 변하여

그 변괘(變卦)의 극을 달려 나갈 것인가?

 

내가 어제 지나온 곳은,

살둔 못지않은 곳이다.

(※ 참고 글 : ☞ 살둔)

매번 느끼지만,

오색약수는 다시는 들리지 않으리라,

특히 제철엔 거긴 사람들로 가득 채워져,

쓰리기터처럼 버림을 받은 지역이다.

 

도대체가 너무 고와,

뭇 사람들에게 유린 당하고 말았다니,

너무 아프고, 서글픈 일이다.

이를 슬퍼하여,

나는 다시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는,

멀리서 지켜보며,

홀로 애태우고 말,

나의 안타까운,

아니 비겁한 마음을 알리라.

 

한계령 역시 차량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도시의 번잡함이 공간이동되어 옮겨져 왔다.

저이들이 다 떠난 겨울,

가을 단풍도 다 떨어져도 좋을,

그날,

내 처와 함께 다시 오리라.

 

가을 설악은,

내 영혼이 너무 더러움을 일깨우고 있다.

그만,

이제는,

세상을 떠나려 하여도,

너무 죄스러워,

저,

맑은 영혼,

가을 설악 앞에 서면,

그저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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