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을밀농철 1

농사 : 2017. 11. 25. 15:09


파스퇴르(Louis Pasteur)를 모르는 이는 드물다.

학교 교육 시 이를 가르친다.

설혹 교육을 받지 않은 이라도,

하다못해 ‘파스퇴르 우유’란 상품을 접해본 기억은 있을 터이다.


네덜란드의 얀센(Jansen)이 1590년 경에 돋보기를 발명하였고, 

그 후 17세기에 판 레이벤훅(van Leeuwenhoek)이 현미경을 발명하였다.

이로서 극미의 세계에 사는 미생물을 관찰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아마도 현미경이 발명되지 않았다면,

미생물 연구는 거의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프랑스의 파스퇴르(Louis Pasteur)는 흔히 면역학의 아버지(the father of immunology)로 떠받들려지곤 한다.

게다가 pasteurisation으로 널리 알려진 저온살균법은 그의 탁월한 공적으로 인정된다.

우리는 익히 안다.

구부러진 플라스크(swan-necked flask)를 이용하여,

당시 널리 퍼졌던 세균의 자연발생설을 깨뜨리고,

대기를 통해 유입된다는 것을 밝혔다.

하니까 미생물을 열로 죽이면,

세균 감염은 일어날 수 없다고 보았다.

이게 오늘날엔 공업적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어,

우유는 이 방법을 통해 멸균을 하여 세상에 유통된다.


나는 이 지점에서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하고자 한다.


흔히 창조론자들은 이를 들어,

자연발생설은 부정되었고,

신에 의한 창조가 입증되었다고 말한다.

저들은 묻지도 않고 임의로 파스퇴르를 창조론자라 제멋대로 규정하여 끌어들이고 있다.

이는 견강부회(牽强附會)에 불과하다.

그는 원시 생명의 기원에 대하여 실험을 한 것이 아니라,

다만 세균이 자체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유입되어 발효가 일어났다는 사실만 밝혔을 뿐이다.

유입된 세균의 최초 원인 발생에 대하여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두 번째는, 세균의 박멸을 통해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믿음은 옳지 않다는 점이다.


이상적(理想的)인 방법은 대기 중에 있는 모든 세균을 없애버려야 한다.


파스퇴르가 주장한 이런 말은 플레밍(W, Flemming)에 의해 바로 전복되었다.


플레밍은 주지하다시피 페니실린을 발견하였다.

그는 특정 곰팡이와 동서(同棲)하는 균들이 사멸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가령 포도상구균, 연쇄상구균, 디프텔리아균, 장티푸스균, 대장균 등과 함께 특정 곰팡이를 함께 놔두었는데, 

장티푸스, 대장균을 제외하고는 다른 균들은 모조리 사멸하고 말았다.

이 특정 곰팡이는 Penicillium notatum라 불리는데,

페니실린이란 살균성 물질을 내놓아, 세균을 죽이는 것이다.


만약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세균을 죽였다면,

페니실린을 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모든 세균을 죽일 수나 있는가?

하지만, 사람들이 세균이 만병의 원인 인자라 여기는 한,

세균을 모조리 죽이려는 기도(企圖)는 쉬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설혹 Penicillium은 유익하니까,

이것은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죽여 버리겠다는 생각을 한다하여도,

이는 결코 올바른 생각이 되지 못한다.

나머지 세균이 모두 없어질 터인데,

Penicillium인들 인간에게 무슨 소용이 닿겠음인가?


가령 무당벌레가 익충(益蟲)인고로 이만은 남겨두고,

밭에 있는 모든 벌레들을 해롭다고 모두 죽여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가사(假使) 모든 벌레들을 잡아 죽였다 한다면,

이들을 잡아먹고 사는 무당벌레인들 살아남을 수 있겠음인가?

무당벌레를 살리려면 외려 해충이 남아 있어야만 한다.


살균제나, 살충제 따위의 소독약, 농약은,

기실 이해(利害)를 따지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주위 환경에 작용한다.


하니까 해충을 박멸하고 말겠다는 시도는,

종국엔 익충, 해충 가리지 않고,

생명 모두를 죽여 버리는 만용(蠻勇), 우(愚)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오늘날 선택적 농약, 제초제 따위가 만들어지고 있으나,

이 또한 완벽하지 않다.

아무리 뛰어난 약제라도 작물을 해치게 되어 있다.

원하지 않는 잡초, 작물을 죽이지는 않는다지만,

이들 뿌리의 발달을 저해하고, 과실의 맛을 떨어뜨리고, 식품 안정성을 해친다.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pasteurisation(저온살균)이라는 것이 지고지선(至高至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물론 우유에 들어있는 결핵균과 같은 유해한 세균이 죽을 수는 있으니,

이 처리를 거친 우유는 일응 안전하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세균이 없어진 멸균 상태의 우유가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하여는,

나는 의문을 갖는다.


초원에서 건강하게 뛰놀던 소에서 나온 우유라면,

굳이 pasteurisation 이런 처리를 거칠 이유가 없다.

여기엔 유해 세균이 별로 들어 있지 않을 것이며,

설혹 들어 있더라도, Penicillium notatum과 같이 이들을 제어하는 다른 균들이 들어 있을 것이다.

게다가 비록 저온살균이라지만, pasteurisation에 따라,

다른 물질들의 변성(變性)이 아니 된다는 보장이 없다.


우리가 수돗물을 불신하고 생수(生水)를 선호하는 것은,

단순히 수돗물 원수인 강물의 오염만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다.

화학적 처리 과정 중에 수중 생물들이 모두 죽어 버리게 되는,

그야말로 사수(死水)를 꺼리는 것이다.

오늘날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소위 생수라는 것도,

멸균처리를 하기에 기실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생수라 하기엔 부족함이 많다.

아무려면, 깊은 산속 옹달샘에서 길러온 약수를,

굳이 끓여 먹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pasteurisation을 거친 우유 역시,

나는 이게 결코 진짜배기 생우유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오늘날 같이 열악한 환경에서 사육되고 있는 소들을 볼 때,

그나마 pasteurisation을 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식품으로서의 안전 위험을 참아 내기 힘들 것이다.


내가 키우는 블루베리는 ‘pasteurisation을 거친 우유’ 따위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내년엔 올해보다 더욱 풀이 더 자라도록 할 예정이다.

예초작업조차 더욱 삼가며,

밭에 모든 생명들이 제 각각, 제 재주대로 자라며,

역동적인 삶을 영위하며, 자유롭게 제 삶의 노래를 구가(謳歌)하길 바란다.

거기 고통이 따르고, 갈등이 있을지언정,

제 운명을 슬퍼하고, 즐거워할 일이니,

이는 저들의 명운(命運)이다.

나는 그저 가만히 공수(拱手)코,

저들을 훼방하지 않고,

은밀히 지켜보려 할 따름이다.


노파심에서 한마디 첨언해둔다.


그렇다면, 나는 플레밍, 파스퇴르의 업적을 폄훼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일까 저어된다.

나는 이들의 인류사적 위대한 공헌을 외면하고 있지 않다.


가령 콜레라가 창궐하고 있다면,

의당 이 병원균을 물리칠 의학적 조치를 취할 노릇이지,

마냥 자연에 맡길 일이 아니다.

다만, 콜레라가 그리 기승을 벌이지 않을 환경은,

每일상에서 pasteurisation과 같은 살균 조치만으로는,

결코 이뤄지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건강한 생체란 자극이 있으면 반응을 일으킨다.

만약 자극이 없는 환경에 상당기간 노출되면 반응 능력 자체가 약화 되거나 소멸되고 만다.

따라서 예컨대 pasteurisation 처리된 멸균 음식을 평생 취하게 되면,

외부 병원체에 대항하는 면역 기능이 덩달아 약화될 것이다. 

이런 상태에 놓인 생체를 우리는 병들었다고 말한다.


강아지를 어린 아이와 함께 지내게 하면 각종 질병에 노출될 우려가 많으니,

격리하여야 한다는 염려가 있다.

하지만 한 연구에 따르면, 어려서부터 강아지와 함께 생활한 아이가 외려,

우려하였던 질병에 잘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자연계엔 수많은 생물이 살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이들을 이해득실(利害得失)을 셈하고,

선악(善惡)에 따라 가르고,

시비(是非)를 따지며, 

나아가 제 선호(選好)에 따라,

줄을 세우며, 

경계를 두어 나눠 차별한다.


인간 세상처럼,

어둡고 험한 곳이 어디에 있으랴?

이리 적(敵)을 상정하고,

저들을 경계함이 무엇이 잘못이랴?


허나,

본디 약한 이는 적을 두어 방비하고,

환자는 약을 먹어 병을 막는 법.


강한 이에겐 적이 없고,

건강한 자에겐 병이 없다.

아니 적이나 병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있어도 이게 문제가 되지 않으며,

외려 이들이 있음으로,

더욱 더 단련을 받아 강해진다.


聲聞厭諠求靜。猶如棄麫求餅。餅即從來是麫。造作隨人百變。煩惱即是菩提。

(景德傳燈錄)


“성문(聲聞)은 시끄러운 소리를 꺼려, 고요한 곳을 구한다.

이는 보릿가루를 버리고 떡을 구하는 것만 같다.

떡이란 본디 보릿가루로부터 만들어지는 것.

가지가지 만들어내는 짓거리는 사람 따라 각양각색인 법.

번뇌가 곧 보리인 것임이니.”


智者無心求佛。愚人執邪執正。


"지혜로운 이는 구태여 부처를 구하지 않고 무심할 뿐이다.

어리석은 이는 삿된 것에도 집착하고, 바른 것에도 집착한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는 천식으로 평생 고통 속에서 살았다.

외부 공기를 차단하기 위해 코르크로 막은 방 속에서 고독한 글쓰기를 하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환자도 아닌 건강한 이가,

평생 클린룸에 갇히고, pasteurisation 처리된 멸균 음식을 먹고 산다면,

이는 환자보다 더 불쌍한 노릇이 아닌가?

허나 실상인즉 그리 아니 하려 하여도,

도리 없이 pasteurisation 이리 처리하지 않으면 아니 될 형편에 놓여 있는,

현대인들의 음식 문화 환경을 탓할 수밖에 없으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이 아니랴?


나의 을밀농철은,

일그러진 현대의 農문화, 생산환경에 대한 근원적 회의로부터 출발한다.

우리 밭에 자라는 블루베리만큼은 인위(人爲)를 벗어나,

태초 자연의 품에 안겨,

그리 그렇게 자연스럽게 자라기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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