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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중(輕重)

소요유 : 2018. 1. 7. 00:55


경중(輕重)


대저 사물엔 가볍고 무거움이 다르다.

때문에 인식의 차이가 생겨나고, 일을 행함에 차서(次序)가 따른다. 


내가 최근 한 일에 임하여,

이를 아지 못하는 인간들을 만났음이라,

이에 옛 말씀에 비추어,

저들을 다시 가늠하고자 한다.


夫水之性清,土者抇之,故不得清。人之性壽,物者抇之,故不得壽。物也者,所以養性也,非所以性養也。今世之人,惑者多以性養物,則不知輕重也。不知輕重,則重者為輕,輕者為重矣。若此,則每動無不敗。以此為君悖,以此為臣亂,以此為子狂。三者國有一焉,無幸必亡。

(呂氏春秋)


“무릇 물의 본성은 맑지만, 흙이 이를 어지럽히기에 맑지 않다.

사람도 본디 오래 살 수 있는 것이지만, 물질에 대한 욕망으로 인해,

본성이 어지럽혀져 오래 살지 못한다.

물질이라는 것이 본성을 기르는 것인 양 싶지만,

사람의 본성이란 본디 이로써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요즘 사람으로, 혹자는 본성으로써 물적 욕망을 기르는 바라,

이는 가볍고 무거운 것을 아지 못하고 있음이라.

경중을 모른다 함은,

무거운 것을 가볍게 여기고,

가벼운 것을 무겁게 여기는 것이임이라.


이와 같으면,

매 행동마다 실패하지 않음이 없다.

이러한 이가 왕이 되면 패륜을 일삼고,

이러한 이가 신하가 되면 난을 일으키고,

이러한 이가 자식이 되면 불효하며 미친 짓을 일 삼을 것이다.

이러한 자들이 하나라도 있으면,

요행이 없는 한 반듯시 망할 것이다.”


가령 해야 될 일 앞에 서있을 제,

선후(先後)를 뒤집고,

경중(輕重)을 헤아리지 못하여,

대사를 그르치게 된다.


이는 인식(認識) 능력에 큰 결함이 있기 때문일진대,

이 글에선 이를 물적 욕망으로 보았다.

物者抇之

본성이 물질에 의해 어지럽히지기에,

故不得清

맑은 본래의 본성이 흩뜨려진다고 하였음이다.


韓、魏相與爭侵地。子華子見昭釐侯,昭釐侯有憂色。子華子曰:「今使天下書銘於君之前,書之曰:『左手攫之則右手廢,右手攫之則左手廢,然而攫之必有天下。』君將攫之乎?亡其不與?」昭釐侯曰:「寡人不攫也。」子華子曰:「甚善。自是觀之,兩臂重於天下也,身又重於兩臂。韓之輕於天下遠,今之所爭者,其輕於韓又遠,君固愁身傷生以憂之臧不得也?」昭釐侯曰:「善。教寡人者眾矣,未嘗得聞此言也。」子華子可謂知輕重矣。知輕重,故論不過。

(呂氏春秋)


“한과 위가 서로 다투어 땅을 빼앗었다.

자화자가 한의 소리후를 뵈었다.

소리후는 근심하는 기색이 있었다.

자화자가 여쭈었다.


‘이제 천하에 글을 새겨 군주에게 내놓게 하는데,

그 글에 이르길,

‘왼손이 쥐면, 오른손이 놀게 되고,

오른손이 쥐면 왼손이 쓸모 없게 된다

그러나 이것을 잡으면 천하를 얻게 된다’고 하면,

왕께선 이를 움켜쥐시겠습니까?

아니면 움켜쥐지 않으시겠습니까?


소리후가 말하였다.


‘과인은 움켜쥐지 않을 것이다.


자화자가 말했다.


‘대단히 훌륭하십니다.

이로서 살펴보건대,

두 팔은 천하보다 중한 것이며,

몸은 또한 양 팔보다 중한 것입니다.


한나라는 천하보다 가벼우며, 먼데 있습니다.

지금 다투고 있는 것도 한나라보다 가볍고 먼데 있는 것입니다.


왕께서 진실로 몸을 괴롭히시고, 삶을 상케 하시면서, 

그것을 취하고자 근심하셔도 얻지 못하실 것입니다.’

소리후가 말하다.


‘어질구나.

나를 가르치려는 자가 많았지만,

아직 이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소다.’


자화자는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을 안다고 할 수 있다.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을 아니,

그가 논한 것은 허물이 없다 하겠다.”


본디 여씨춘추는 여불위(呂不韋)가 천하의 인재를 모아,

이십만 자에 이르는 책을 지은 것이다.

내용은 차치하고서라도, 

이 정도의 양이라면 당시로선 실로 어마어마한 과업을 이루었다 하겠다.

나의 개인적인 경험에 비춘다면,

서책이라든가, 혹은 프로그래밍 코딩일지라도,

십만 여자(라인)가 넘는 작품이라면,

실로 여간 간단치 않은 일이라 여기지 않을 수 없다.

내용은 차치하고서라도,

이 정도의 양이면 이를 종합적으로 엮고, 체계를 갖추는 것만 하여도,

어지간한 공력으로선 이루기 힘들다.

물경 삼천 식객(食客)을 거느린 여불위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이런 업적을 남길 수가 없다.

 

어쨌건, 그는 이를 자랑하여,

여기 이 책에 단 한 자라도 더 보탤 수 있다면,

천금을 내리겠다 하였다.

하여, 이를 일러 일자천금(一字千金)이라 한다.


兩臂重於天下也,身又重於兩臂


양 팔은 천하보다 무겁고,

몸은 양팔보다 무겁다 하였음이다.


그제,

한 일을 도모하고자 모였었다.

저들은 막상 그 일은 재껴놓고,

자신들의 심리적 만족을 위해, 

상대를 재끼고, 스스로에게 납득하기 위해, 

자신에게 봉사하기 급급하였다. 

본말이 전도되고,

선후가 뒤집힌 현장.

저들 어리석은 당체들.

이제야 저들의 그 진면목을 보게 되었다.


아니, 나는 원래 사람의 진면목은 알 수 없다고 생각하였기에,

평소 알려고 들지도 않는다.

다만 비상한 때까지 기다릴 뿐,

조바심을 내지 않는다.

때에 이르기까지의 유보(留保).

이게 내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다.

이 때라서야, 

비로소 검은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개이며,

산이 보이고 내가 드러날 뿐인 것임이라.

그 전엔 결코 진면목은 알 수 없는 법이다.


물론 이전에 이미 스스로 천박함을 드러내고,

차갑고, 무서운 모습을 보이는 인물도 적지 않다.

이런 인물은 안개가 개이길 기다려 더 물을 일이 아니다.


그제, 이러한 소인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헌즉 작폐(作弊)를 짓고,

끝내 일을 그르치게 되었다.


소리(小利)를 꾀하다,

대의(大義)를 놓친 격이다.


실로 소인배들을 이제야 처음으로 알아채게 되었음이라.

그러기에 내 누누이 말하지 않던가?

인물이란,

결코 평상시엔 제대로 알기 어렵다.

비상한 때에 이르러서야,

인간 됨됨이, 그 진면목을 제대로 알게 된다.


비상한 사태를 맞았을 때,

비로소 인간의 그릇 크기를 가늠할 수 있음이다.


평상시엔 다 좋은 게 좋은 것임이라,

붓커니 잣커니 하며,

웃음짓고 눙치며 살아들 간다.

손잡고, 어깨동무도 하고, 

그럴싸 하니 착한 사람인 양 지낸다.

하지만,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고, 땅이 갈라질 때,

처자식, 형제를 버리고, 저 살겠다고 모두 떠나기 바쁘다.

이 때라서야 사람의 본래 면목을 알게 된다.


무서운 일이다.

그런즉 두려워 할 일이다.

네 놈의 정체는 오늘이 아니라,

천지개벽하는 그날에야 밝혀지고 말리라.

네 녀석이 그리 착한 줄 알고 살아가는가?

어림없는 소리.

하늘에서 불벼락이 내리고,

땅이 갈라질 때라야,

네 본심을 드러내게 된다.   


실제 이런 마음이 없다고 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이런 자들과 다름없는 짓을 저지르고 만다.

헌즉 내 말하지 않던가?

무식한 것은 바로 죄에 다름 아니다라고.

(※ 참고 글 : ☞ 무식한 것은 죄다.)


계집은 짙은 화장으로 못난 얼굴 가리고, 짧은 치마 입고 나타나,

그대의 혼을 앗으며, 그대의 심장을 격동 시키고, 그대의 코를 낚시바늘로 걸어챈다.

요즘은 얼굴에 칼질까지 하며, 흉함을 가리니, 그 꾸밈이 되우 교활하다.

게다가 그대가 술 처먹으면, 더욱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엉뚱한 판단을 하게 된다.

사람의 진면목(眞面目)은 평소엔 온갖 채색 구름에 가려 있어 알기 어렵다.

나의 선의가 부정 당하고, 진심이 왜곡되자,

나는 절망에 빠져 관상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혹 얼굴로부터 숨겨진 진실을 살필 수 있을까 싶어서 말이다.

중국에선 관상이 아니라 면상(面相)이란 말을 더 자주 사용함은, 바로 이 때문이다.

내 미리 말하거니와,

나를 만나는 이는 얼굴을 탈바가지로 감추지 않는 한,

내게 근 칠 팔할은 진면목을 들어내놓고 있음을 알지라.

나의 관상 공부가 이미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미륵불이 나타날 때,

염부제 이 땅에 모든 초목은 다 타버리고,

맛 있는 다섯 과일로 덮이고,

땅이 평평해지며, 수목은 모두 크고 높이 자란다 하였다. 


이 때가 되면, 

사람들은 음심을 잃고, 분노와, 어리석움이 없어진다고 하였던가?

사람들에겐 세가지 큰 병이 있으니,

가지려는 욕심, 배고픔, 늙고 죽는 병.

하지만 미륵이 나타나실 때가 되면,

사람들의 면목(面目)은 모두 복숭아 빛으로 빛나고,

서로 존중하며 산다고 하였더라.


미륵이 나타날지 아닐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이것은 다 꿈같은 이야기,

결코 일어나지 않는 허구에 다름없다.

헌즉 사람들의 면목이란 언제나 어둡고 두텁게 가려져 있을 뿐이다.

오죽 하였으면 이종오(李宗吾) 선생은 후흑학(厚黑學)을 펼쳐내었을까나?


내 이르노니,

결코, 미륵을 기다릴 일이 아니다.

내가 미륵이 되면 될 일이다.


우라질.

툭하면,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너를 기도했다고 생색낼 일이 아니란 말이다.

그 값싼 부주를 사양한다.

되풀이 되는 일에 나는 구토를 일으킨다.


나는 기도를 하지 않는다.

그대가 기도를 하겠다면,

내가 말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나라면 기도 자체를 하지 않겠지만,

그대를 위해 한마디 한다면,

남이 아니라 오로지 그대를 위해 그대 자신에게 기도할 일이다.

(※ 참고 글 : ☞ 관음은 누구에게 참불하는가?)


내 기회가 있으면,

소리(小利)와 대의(大義)를 주제로 별도의 글을 쓰려고 한다.

여기 小는 그저 작다, 大는 크다는 뜻이 아니다.

대의를 저버린 저 지지리 궁상들의 유사이래 변치 않는 행로를 조명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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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 : 2018. 1. 7. 00:5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