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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파미보와 암호화폐

decentralization : 2018. 8. 28. 19:51


능파미보와 암호화폐

내가 농사에 인연을 짓기 시작한 것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제법 세월이 흘렀다.

처음, 주말농사를 짓겠다고, 시골로 오가는데, 
게서, 한 인간을 만났다.
바로 이웃인데, 이이 역시 서울에 적을 두고,
시골을 오가며 농사를 짓는다 하였다.

헌데, 우연히 마주치자마자.
이 자가 졸졸 따라다니면 묻지도 않은 말을 부려놓는다.
제 깐에는 모처럼 서울 사람을 만났으니,
할 말이 많은가 보다.

헌데, 몇 마디 내놓는 말을 보니,
이것은 온통으로 (욕망에 찌든) 시뻘건 속물(俗物)이다.
집으로 돌아와, 
‘전형적인 속물이다.’
앞으로 교류하지 않겠다 선언하였다.
첫 대면부터 기분이 몹시 상하였던 것이다.

만나자마자 땅값, 돈 이야기에 혈안이 되어 입에 침을 튀기기 바빴다.
그는 나를 인간이 아닌, 재물 이야기 상대로 대하고 있었다.

헌데, 이웃인지라, 
도리 없이 보게 되고,
진드기처럼 들러붙는 통에 어쩔 수 없이 술자리도 같이 하는 경우가 생겼다.

이 자가 젊었을 때 니체를 읽었다 한다.
하는 행실을 보면, 니체는커녕? 
닳고 닳은 장돌뱅이라도 그리 셈을 이악스러히 밝히지는 못할 것이다.

(니체) 영원회귀가 삶의 긍정이 되기 위해서는 '나'를 비롯한 모든 고정불변한 실체를 지워야 하며, '익숙하지 않은 것'에 인과론을 들이대는 오랜 습관을 버려야 하며, 마침내 '나'의 죽음을 '나 아닌 나'의 탄생으로 상상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한마디로 이제까지의 내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수긍하면서도 저는 여전히 그 죽음이 두렵기만 합니다.
(출처 : pressian)

오늘, 이 글을 대하자,
인과관계는 없으며, 
원인-결과란 이성의 작용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습관에 의한 것이란 흄의 주장을 상기하게 된다.

불교는 인연을 특히 강조하며,
업보를 앞잡이 세워, 미망에 싸인 중생들을 겁박한다.
種善因得善果
착한 인연을 지으면 착한 과보를 얻는다.

파리 손 되어 불전에 엎드려,
싹싹 빌기 바쁜 아낙네들을 보면,
과연 천당이 멀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된다.

기독교라고 아니 그런가?
주일마다 열 일 재끼고, 빠짐없이 예배당에 나가,
연봇돈 던지기 바쁜 이들,
역시나 천국이 가까이 임박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種善因得善果

허나, 이 말을 흄은 부정한다.
그리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 관습, 일상의 습관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러니 앞에서 인용한 저 말,
'익숙하지 않은 것'에 인과론을 들이대는 오랜 습관을 버려야 하며
이는 흄의 철학에 기대고 있다 하겠다.

주식 투자나, 코인 투자에 있어,
기술적분석이라는 것은 善因善果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
이런 궤적을 그리고 있으니, 앞으로 이리 진행될 것이다.
이는 기본적으로는 외삽법(外揷法 extrapolation)에 기반하고 있다.

헌데, 흄은 이런 인과론적 기대는 그저 습관에 불과하다고 질타한다.
한마디로 인과론은 이성적이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흄에 따르면, 지각(知覺, perception)은 
인상(印象, impression)과 관념(觀念, idea)으로 이뤄져 있다고 한다.
인상은 관념보다 생생하다.
관념은 인상의 복사물에 불과하다.
그런즉 사람들의 지각이란 대개는 인상에 빠르게 매몰되어 있다.

인과율
원인과 결과를 기반으로 지식 체계가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흄은 원인과 결과는 증명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런즉, 인과관계는 없으며, 결국 이는 이성의 작용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만 일종의 관습에 불과하다고 흄은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기술적분석이라는 것은 이성적 신뢰가 아니라,
감성적 믿음에 기초한 것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지각이라는 것이 이성에 의지하지 않고,
인상과 관념에 의지한다고 한들,
기술적분석의 유용성은 낮아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바로 그런 지각, 경험에 의지하는 만큼,
거기에 기초하는 기술적분석의 믿음이란 그리 허황된 것이 아니게 된다.

선인(善因)이 선과(善果)를 낳고,
악인(惡因)이 악과(惡果)를 낳는다 하여도 문제는 남는다.

이런 인과율의 그물에 갇힌 이상,
도약(跳躍), 비상(飛翔)은 일어날 수 없다.
있다면, 그물은 찢어야 한다.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러 왔노라.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존재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말한 극복은 인과율에서도 빗겨갈 수 없다.

농장 이웃,
소싯적 니체에 경도되었다는 그 철저하니 시뻘건 속물은,
돈의 인과율에 예속된 동취(銅臭)나는 전노(錢奴)이다.

허나, 흄의 생각으로 그물이 과연 찢어질 것인가?
흄은 인과율을 회의하였지만, 우회하였을 뿐, 극복하지는 않았다.

내 생각을 더 펴느니,
그 밖에 것에 대하여는 각자의 몫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다.
바로, 불전으로 달려가 재를 지낼 아낙도 있을 터이며,
예배당에 가서 죄를 비는 남정네도 있을 터.
어찌 내 이야기를 강권할 수 있으랴?

다만 이 지점에서,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Jonathan Livingston Seagull)의 이야기를 소개해두고자 한다.

모든 갈매기들이 먹고사는 일에만 집착한 데 반하여,
조나단은 비행을 추구한다.

선인(善因), 악인(惡因)으로 구속된, 
선과(善果), 악과(惡果)의 세계는 질곡(桎梏)이다.
설혹 선과일지라도 보상임에 악과와 다름이 없다.

설혹, 선인을 쌓아, 선과를 얻는다한들,
해탈은 없다.
인과에 매이지 않아야 한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존재이다.
때문에 신은 죽여야 한다.

그렇다면, 선악에 어디에도 속하지 않거나,
그에 매이지 않은 무기(無記)라면 어떻겠는가?

무기라면, 굳이 삶을 잔인하게 옭아매는 그물을 찢을 필요도 없다.
애시당초, 선, 악 어느 양변에도 속하지 않고,
결과에 구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조나단이 추구한 비행은 바로,
먹고사는 문제, 즉 선악에 갇힌 삶의 그물을 버리고, 비상하는 천책(天策) 기획이다.

여기서, 잠깐.
참선을 할 때,
눈을 반은 뜨고, 반은 감은 상태로 임한다.
부처상을 보아도, 가르슴하게 반안반개(半眼半開)하고 계시다.
눈을 아주 감아 버리면, 흑산귀굴(黑山鬼窟)에 들게 된다.
의식을 아주 놓아버린 혼침한 상태에 들게 된다.
소위 무기공(無記空)에 빠지게 된다.
무기는 무기공과 다르다.
경계할 일이다.

무기를 자유자재로 넘나들게 되면,
귀신일지라도, 
설혹, 염라대왕이 쫓아온다한들,
어디에 숨은 지 찾아낼 수 없다.

중국무협소설에 등장하는 능파미보(凌波微步)처럼,
신출귀몰 물위를 떠다니듯 흔적을 남기지 않는 행법을 구사할 수 있다.

이것 김용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지만,
원래는 조식의 낙신부가 출전이다.
김용은 과시 귀신과 같으니,
고전의 보물 창고를 제 집처럼 드나들며,
호주머니에서 공깃돌 꺼내듯, 마음껏 훔쳐내어 무협지를 지어내었다.
그러면서도 창고지기에 한 번도 들켜 혼이 난 적이 없다.
이 역시 인과율에 매이지 않는 경지에 올랐다 하겠다.

休迅飛鳧,飄忽若神。淩波微步,羅襪生塵。動無常則,若危若安。進止難期,若往若還。轉眄流精,光潤玉顏。含辭未吐,氣若幽蘭。華容婀娜,令我忘餐。
(曹植 - 洛神賦)

흄은 인과율은 그저 습관에 불과하다 하였지만,
무기는 인과율이란 이름의 허울조차 제 몸에 걸치지 않는다.
그런즉, 선과, 악과에 매이지 않는다.

헌데, 이는 결코 不落因果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不昧因果를 이르고 있는 것이다.
흄은 不落因果를 말하고 있음이니,
그는 죽어 여우가 되었을 것이다.
무기를 불교에선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인다.
나는 지금 전통적 무기의 뜻에 매이지 않고,
이 말을 빌어, 不昧因果를 겨냥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 글을 소개하는 것으로 가름하고자 한다.

百丈和尚。凡參次有一老人。常隨眾聽法。眾人退老人亦退。忽一日不退。師遂問。面前立者復是何人。老人云。諾某甲非人也。於過去迦葉佛時。曾住此山。因學人問。大修行底人還落因果。也無。某甲對云。不落因果。五百生墮野狐身。今請和尚。代一轉語貴。脫野狐遂問。大修行底人還落因果。也無。師云。不昧因果。老人於言下大悟。作禮云。某甲已脫野狐身。住在山後。敢告和尚。乞依亡僧事例。師令無維那白槌告眾。食後送亡僧。大眾言議。一眾皆安涅槃堂。又無人病。何故如是。食後只見師領眾。至山後巖下。以杖挑出一死野狐。乃依火葬。師至晚上堂。舉前因緣。黃蘗便問。古人錯祇對一轉語。墮五百生野狐身。轉轉不錯。合作箇甚麼。師云。近前來與伊道。黃蘗遂近前。與師一掌。師拍手笑云。將謂。胡鬚赤更有赤鬚胡。

(無門關)


(출처 : 中国禅宗网)


백장 회해 선사가 설법할 때마다 한 노인이 와서 

늘 대중들 뒤에서 열심히 듣고 있다가 대중이 물러가면 함께 물러가곤 하더니 

어느 날은 설법이 끝나 대중이 다 물러갔는데도 그 노인만은 남아 서 있었다.


백장 선사가 이상히 여겨 물었다.


“앞에 있는 자는 어찌된 사람이냐?”


그러자 노인이 대답했다.


“저는 사람이 아닙니다. 

옛날 가섭불 당시에 이 절의 주지였습니다. 

그 때 어느 학인이 ‘대수행인은 인과에 떨어집니까, 안 떨어집니까?’ 하고 묻기에 

제가 ‘인과에 떨어지지 않느니라.’ (不落因果)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오백생 동안 여우의 몸이 되었으니 선사께서 한 말씀으로 

이 여우의 몸을 벗어나게 해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리고는 노인이 물었다.


“대수행인은 인과에 떨어집니까, 안 떨어집니까?”


백장 선사가 대답하였다.


“인과에 매(昧)하지 않느니라.” (不昧因果)


노인이 그 말에 크게 깨달아 인사하며 말하였다.


“제가 이미 벗어버린 여우의 몸이 뒷산에 있을 것입니다. 

스님께서 죽은 스님에게 하듯 장례를 치러 주시기 바랍니다.”


백장 선사가 유나를 시켜 ‘식후에 죽은 스님의 장례가 있다’고 대중에게 고하게 하니 

‘모두 평안하여 열반당에 한 사람의 병자도 없었는데 

어째서 죽은 스님의 장례가 있다고 하는가’ 하고 

대중이 수근대었다. 

식후 백장 선사가 대중을 데리고 뒷산 바위 밑에 이르러 

지팡이로 죽은 여우를 끄집어내어 화장을 하였다.


백장 선사가 저녁에 법당에 나와 앞의 인연을 이야기하였다. 

이 때 황벽이 일어나서 말하였다.


“고인(古人)이 잘못 대답하여 오백생 동안 여우의 몸이 되었는데 

만약 잘못 대답하지 않았다면 무엇이 되었겠습니까?”


백장 선사가 말하였다.


“앞으로 가까이 오라. 그대를 위해 가르쳐 주리라.”


황벽은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백장 선사의 뺨을 한 대 후려쳤다. 

백장 선사가 박수를 치고 웃으시며 말하였다.


“과연 그렇구나. 오랑캐의 수염은 붉다더니 붉은 수염 오랑캐가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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