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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전승 유감

소요유 : 2018. 9. 18. 17:00


나는 앞에서 쓴 글 非理法權天에서

한비자는 權이 法의 상위가 아니라,

法이 權의 상위 층위에서 사회를 규율하는 세상을 꿈꿨다 이야기 했다.

 

그런데, 이 양자는 단순히 상하 층위 서열이 바로 잡히기만 하면, 족한 것이 아니다.

 

權은 대단히 폐쇄적이라, 그것을 타자와 나누지 않고, 소수 또는 일인이 독점한다.

하니까 권리 행사를 누구의 간섭 없이 다수에게 일방적으로 작용시킨다.

본디 권력의 속성 자체가 독점적, 배타적이다.

헌즉, 민주사회인 오늘날에도 선출 권력의 형식을 통해,

권력을 시간적으로 분산 시키며, 삼권 분립을 통해 공간적으로 분배한다.

이렇듯, 권력이 가진 위험 요소를 적절히 제한하는 장치가 채비되어 있다.

그렇다하여 안전이 완벽히 보장되지는 못한다.

하기에, 사회적 제 이해관계 집단은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권력 행사 기관을 감시, 평가, 제재하며, 그 일탈을 경계한다.

 

반면 法이란 본질적으로 만인에게 공개되어,

만인(萬人)을 규율한다.

이 때 공평무사하게 만인에게 작동하여야 한다.

 

法.權은 층위 서열도 중요하지만,

이런 속성에 대한 충분한 이해의 바탕위에,

적절히 통제되거나 원활히 작동되어야 한다.

 

(※ 法

이하 불교 관련 글에 나오는 法은 위에서 말한 law가 아니라,

dharma를 지칭하는 즉,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부처의 교설 또는 진리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흔히 염화시중(拈華示眾)의 미소의 이야기에 기대어,

부처의 法이 최초 마하가섭에게 전해졌다고 생각한다.

잠시 그 장면을 여기 이끌어 둔다.

 

爾時如來。坐此寶座。受此蓮華。無說無言。但拈蓮華。入大會中。八萬四千人天時大眾。皆止默然。於時長老摩訶迦葉。見佛拈華示眾佛事。即今廓然。破顏微笑。佛即告言是也。我有正法眼藏涅槃妙心。實相無相微妙法門。不立文字。教外別傳。總持任持。凡夫成佛。第一義諦。今方付屬摩訶迦葉。

(大梵天王問佛決疑經)

 

그리고 28조 달마가 중국으로 건너가 초조(初祖)가 되고,

마지막 육조(六祖) 혜능까지 차례로 전법(傳法)되었다 생각한다.

 

이리 특정한 사람에게만 법이 전수되는 방식은,

불교의 본질을 거스른다.

사자전승(師資傳承) 방식은 사실 문제가 적지 않다.

 

유교무류(有教無類)라,

본디 가르침엔, 사람을 가리지 않는 법이다.

이는 공자도, 부처도 이를 따랐다.

물론 가르친다하여 모두 한결 같은 깨우침을 얻는 것은 아니다.

그런즉 사자전승(師資傳承)이라 할 때,

이를 확인하고 가리는 장치가 요구되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의발을 전수한다든가, 게송을 읊도록 하여 인가하는 방식을 취하기도 하고,

때론 임종게로써 사자전승이 이뤄지곤 한다.

 

하지만, 사자전승 방식은 계보를 중시하고, 문중 계파를 형성케 되며,

그 밖의 사람들을 격리하고, 타자화하며, 배척한다.

이에 따라, 법(진리)은 하나로 고착화되고, 창의적이며 발전적인,

내적 전개가 제한을 받을 위험이 크다.

 

법을 전승받은 자는 권력을 차지하게 된다.

이것 남과 공유하면, 위력은 떨어지고, 단물이 나뉜다.

그런즉, 스승으로부터 나 혼자만 법을 받아야 수지가 남는 장사가 된다.

 

유교무류란, 가르침에 차별이 없다는 뜻이다.

헌즉 부처는 결코 사자전승의 형식을 빌어 특정인에게 법을 전하고자 하지 않았다.

모든 이가 차별없이 가르침을 받고, 깨닫기를 바랐다.

그러함인데, 사자전승의 형식을 빌어,

교의가, 진리가, 법이 제한적으로 전해지기를 바랐을 리가 없다.

 

맹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孟子之滕,館於上宮。有業屨於牖上,館人求之弗得。

或問之曰 若是乎從者之廀也?

曰 子以是為竊屨來與?

曰 殆非也。夫子之設科也,往者不追,來者不距(拒)。苟以是心至,斯受之而已矣。

(孟子 盡心下)

"맹자가 등나라 상궁(별궁)의 여관에 들었다. 

여관 사람이 창문 위에 삼던 신을 두었는데, 찾다 못 찾았다.

어떤 이가 맹자에게 물었다.

 

'종자가 가져간 것이 아닐까요?'

 

맹자가 답하길 이러 하였다.

 

'너는 그들이 신발을 도둑질하러 왔겠다 생각하는가?'

 

그 자가 말하다.

 

'그게 아닙니다. 선생은 학문을 가르치시는데 가는 자는 붙들지 않고, 오는 자는 막지 않는다 하시니,

진실로 이리 도둑질하려는 마음으로 온 이도 그냥 받아들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往者不追,來者不拒。

 

"가는 자 붙잡지 않고, 오는 자 막질 않는다."

 

그저 그를 그리 맞을 뿐이다.

 

우파니샤드(उपनिषद्, Upaniṣad)는 

'가까이에 앉는다'란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게 무엇인가?

스승 가까이 제자가 앉는다는 뜻이다.

그런즉, 남에게는 개방되어 있지 않다.

하기에 우파니사드는 오의서(奧義書)라 번역되기도 한다.

교의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은밀히 전승된다.

이것이야말로 사자전승의 전형을 이룬다 하겠다.

 

하지만, 불교의 위대한 점은,

이런 인도의, 비인부전(非人不傳)의 철학적 전통을 깨고,

중생을 향한 유교무류의 무차별적 실천적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물론 그 근거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存),

즉 모두다 불성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부처가 열반하시고 난 후, 불경이 여러 차 결집된다.

말씀을 그릇에 담고, 기억하며, 뜻을 따르고자 함이니,

이 어찌 아름답다 하지 않을쏜가?

하지만, 율(律)이 만들어짐으로써, 따르는 무리들은,

그 질서에 기속(羈束)되고, 행동이 타율적으로 억압되는 측면이 있다.

경(經)도 마찬가지로, 사상적으로 하나로 단속(團束)되고 만다.

헌즉 심심치 않게 다른 무리와 다투고, 때론 갈라져 살림을 별도로 차리는 일이 생긴다.

 

이에 따라, 뜻을 달리하는 이들 간 계파를 형성하여 대립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때 이르러, 사자전승의 적통(嫡統)은 어느 무리가 되는가?

이것 대단히 어려운 과제가 된다.

 

하기에 왕권 같으면 옥새(玉璽), 

무협의 세계에선 스승의 보도(寶刀),

불가에선 의발(衣鉢) 등에 의지하여,

이를 인증(認證)받고자 한다.

 

헌데, 따지고 보면 이것들은 모두 물질에 불과하지 않은가?

의발을 받지 못한 신수(神秀)는 북으로 가서 딴 살림을 차리고,

이를 전해 받은 혜능(慧能)은 남으로 가서 법을 편다.

과연 법이란 게 까짓 한낱 의발에 실려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쟁론(諍論)에만 의지할 일이 아니다.

자신이 직접 옥새를 만들어 왕이 되면 될 터이고,

의발을 만들어 종파를 창설하면 될 일이 아니겠음인가?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이,

타자의 옥새, 의발을 부정하였으면서,

자신은 스스로 이를 만들고,

사자전승의 증표로 다시 이에 의지한다는 점이다.

 

불경의 결집이라는 것도, 3, 4차 또는 5, 6차로 이어짐은,

부처의 말씀에 대한 해석, 주장이 갈림에 그침이 아니다.

기실, 일단의 무리들 중심으로 이해가 갈리고, 

부파 간 헤게머니 쟁탈의, 외적 표상으로써, 

불경 결집이 일어난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기 계파의  주장이 경으로 확정되면,
힘을 얻고, 세상을 향해 큰소리 칠 수 있다.

문자는 곧 권력의 원천인 것이다.

이 때 법(dharma)은 권력(權力)이 되고 만다.

 

본디 權은 저울추라, 무게를 단다는 의미가 있다.

법(law) 역시 사물의 무게를 달아 시비를 가린다.
하지만, 저울추가 칭량도 하기 전에, 어느 특정 사건, 인물 앞에서 한쪽으로 기울면,

법(law)는 이미 제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그런즉 권력 앞에 구부러지지 않고 만인을 대함에 공평무사하여,

파사현정, 삿됨을 깨뜨리고 정의를 드러내야 한다.

 

실제 3차 결집 당시엔, 부파분열 때는 이미 심각한 지경에 있었다.

이에 아쇼카 왕은 상좌부 계통의 교리를 취하고,

대중부 계통의 무리들은 흰옷을 입혀 추방을 했다.

불멸 후 200여년이 흘렀기 때문에, 

불설을 정확히 담보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헌즉 당대의 사람들 간 입이 큰 사람의 입김이 어찌 영향이 없었을 터인가?

 

이 3차 결집 때에는,

재미있는 일이 하나 있다.

후기에 등장한 부파들이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역사적 사실들을 자신의 전등사(傳燈史)에 삽입하는 일이 일어나곤 하였다.

이것은 마치 중국철학사에서, 보이는 가상설(加上說)과 엇비슷하다.

즉 공자가 주공에 기대자,

묵가(墨家)는 제 철학의 계보를 주공보다 앞선 우()를 앞세워 갖다 붙이고,

농가(農家)는 신농(神農)에 의지하고,

맹자는 우보다 앞선 요순(堯舜)을 끌어들여 앞세웠다.

나중에 도가는 더욱 거슬러 올라가 황제(黃帝)에 가탁(假託)하였다.

이리 자신들의 사상에 권위를 외부 성왕에서 구하는 일을,

가상설이라 한다.

 

권위에 기대고, 비밀주의로 무장하고,

외부인을 배제하는 형식을 빌리는 한,

결코 완전하다 할 수 없다.

부족하니까, 감추고 싶은 것이 있으니까,

이리 외부자들의 시선을 차폐하며 자신들만의 리그를 벌이는 것이다.

 

노파심에서 하나 짚고 넘어가고자 하는데,

나는 지금 불경 결집이 엉터리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외려, 이들의 피나는 노력에 의해 불설이 결집되어,

후대에 전승된 일에 놀랍고도 무한한 존경심을 갖고 있다.

다만, 간과되어서는 아니 될, 한 측면만을 특별히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사자전승이라 할 때, 

전승엔, 필연적으로 앞선 스승의 말씀과 가르침이 확정되어야 하고,

이게 어떠한 방법으로, 어떤 제자에게 전해졌는가 하는 문제가 따른다.

 

따라서 법(法, dharma)이라는 것이 사자전승의 형식을 빌어,

전해진다고 하면, 스승의 사상이 온전히 하나로 보존되어, 이어지고,

교리란 분파될 수 없는 노릇이 되고 만다.

 

하지만, 불교엔 수많은 분파가 일어났고,

저마다의 분파는 독자적 의발 전수가 행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종 분파간 의발 전수는 부정되거나, 의심될 수밖에 없는 사건이 되고 만다.

 

나는 사자전승을 절대 가치로 여기지 않는다.

학문이든, 종교든 열려 있어,

누구나 자신의 식견으로 기존 사상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으며,

자신의 사상을 새로 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즉 사자전승의 이름하에,

타자를 격리시키고, 배타적으로 배척하는 일을 경계한다.

 

성경 밖에 하나님의 말씀은 없는가?

그 좁아터진 그릇이 모든 진리를 담보할 수 있는가?

팔만대장경이라 이르지만,

그게 지 아무리 방대하다한들,

이것이 진리 전체를 담지할 수 있는가?

그 밖의 것이 내 눈으로 증거될 수 있고,

내 머릿속의 사상, 철학으로 새로 전개될 수 있다.

그런즉 성경 무오류라든가, 일종(一宗) 고수 원리주의자를 나는 멀리한다.

 

수없이 많은 부파 불교가 일어난 일을 나는 즐겁고, 재미있는 일로 본다.

각행기로(各行己路)

각자는 모두 다 자기 나름의 길을 갈 일이다.

천인천색(千人千色)

모든 사람들은 제 각각 자신의 색을 재주껏 뿜어낼 일이다.

 

부처가 팔만사천 장광설을 토해내었다면,

우리는 모두 각자 팔십사만 장광설을 쏟아내어야 한다.

풀숲에 가보아라,

하나라도 같은 것이 있는가?

팔십사만 기화요초가 제 각각 제 자신을 뽐내고 있다.

 

그러므로, 당파주의, 순혈주의, 근원주의자들을 나는 부정한다.

사자전승이라는 것도,

스승의 뜻을 받들고, 깨우침을 일으키는 것은 좋으나,

이에 고착되어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자유롭게 펴는 것이 방해되어서는 아니 된다.

 

6조 혜능 이후 의발 전수는 폐하였졌다.

이는 5조인 홍인(弘忍)이 혜능에게 더 이상 그리하지 말라는 유지라 한다.

 

혜능이 홍인으로부터 의발을 전수 받고,

신수의 무리들 추적을 피하여 달아나고 있었다.

그들 중 진혜명(陳惠明)이라는 자가 들이닥쳤다.

이에 혜능은 의발을 바위 위에 놔두고는 풀밭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는 이리 말하였다.

 

‘我為法來,不為衣鉢來。’

 

‘나는 법을 위해 왔지, 의발을 위해 온 것이 아니다.’

 

기실 인도엔 의발로 법을 전하는 전통은 없다.

이는 중국의 선종에서부터 비롯된다.

앞에서 인용한 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에도 보면,

가섭이 미소를 보였다는 말만 있을 뿐,

결코 의발을 전수해주었다는 말은 나오지 않고 있다.

어디에 의지하여, 법통을 전하고 받는 일은,

불교처럼, 외물에 매이지 않은 입장에선,

더욱 더 해괴한 일이다.

 

이것 모두 중국 선종사에서만 보이는 모두 허풍에 불과하다.

여기에 한눈을 파는 일은, 귀신에게 혼을 팔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출처 : 國立交通大學資訊技術服務中心)

 

헌데, 눈에 보이는 의발만 있는가?

세상엔 수많은 의발이 존재한다.

 

가령 법대 나오면 이 나라 법을 좌지우지 하는 무리들에 속하여,

그 밖의 사람들을 노리개처럼 가지고 논다.

사법 농단의 무리들.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게다가, 특정 지역, 특정 대학, 특정 정파에 속하면,

그 밖의 사람들을 더욱 잘게 나눠 차별하고, 배제하며,

무리끼리 이익을 놔누고, 법을 농단한다.

 

재벌들은 돈을 가지고,

법을 구부리고, 정의를 재물로 구매한다.

 

정치 모리배들은, 돼지 저금통 팔아 권력을 사고,

촛불 정신에 편승하여 정권을 쟁취한다.

그리고 나서는 재벌의 시녀가 되고, 서민을 속여가며,

권력의 단물을 빠는데 취하여 있다.

 

오늘, 우리가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저들에게 하늘의 주벌(誅罰)이 벼락불처럼 떨어지길 바란다.

 

이것 모두 의발과 매 한가지다.

 

그런즉 의발이란 결코 의지할 것이 아니다.

 

非理法權天

 

애초 여기 法을 이야기 하다가,

문득 이게 특정 무리들에 의해 자의적으로 개폐되고,

구부러져 적용되고 마는 이 땅의 현실에 생각이 미쳤다.

하여 사자전승, 의발의 예에 비추어 보고 싶었다.

 

헌즉, 이리 한참 돌아와 이제 여기에 서고 마누나.

法(law)도 그렇고, 法(dharma)의 영역에서,

사자전승이란 비릿한 것이다.

의발 전수라는 것도 도대체가 의젓한 것이 아니다.

 

法(law)의 공정성, 

法(dharma)의 진리

 

이 모두는 결코 기득권, 파벌, 의발 따위에 매인 것이 아니다.

조폭의 노리개 감이 아닌 것이다.

결코, 줄을 세울 일이 아니란 말이다.

 

‘我為法來,不為衣鉢來。’

 

혜능의 이 말이 들리는가?

당신들에겐.

 

이하, 부파불교의 수많은 사자전승의 예를 보인다.

권위를 부수고, 저마다의 목소리로 제 노래를 불러야 한다.

더 많이 쪼개지고, 나뉘어, 깨알처럼 많은 부파가 생기길 기원한다.

 

(출처 : 十八部派及後期部派的藏文及梵文名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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