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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아와 암호화폐

decentralization : 2018. 10. 13. 14:36


가즈아와 암호화폐


가즈아처럼 심히 천박한 말이 또 있을까?


블럭체인 기술로 구현된 탈중앙화된 신뢰체계를 고안한 사토시.

그의 위대한 사상에 이끌려 암호화폐를 알게 되었다.

하여, 암호화폐 시장에 쓰이는 저 천박한 말을 절로 듣게 되었다.

요즘, 개나 소나 스스럼없이 쓰고 있다.

급기야,

이게 퍼져, 

사회 전 영역에 걸쳐, 전방위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천박한 세태다.


나는 왜 이를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천박하다고 말하고 있는가?

저 말은 제 믿음, 소망을 말하고 있을 뿐,

세상의 실상을 한 줌도 그려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증권투자에 있어 매매는 하나의 게임이다.』


즉 투자자와 이 투자자를 끊임없이 그릇되게 유혹하는,

시장과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戰略的, 知的 게임인 것이다. 

시중에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투자서적들은,

하나 같이 법칙, 원칙, 규칙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시세는 투자자를 속이기 위해 온갖 전략을 사용하여,

법칙을 깨고 원칙을 위반하며 또 규칙에 예외를 만든다.


Joseph E. Granville의 말이다.


투자자는 시장을 상대하고 있다.

하지만, 시장이란 거대하고도, 강력한 괴물은,

투자자를 흔들고, 속이고, 빼앗고,

장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만다.


Joseph E. Granville은 이런 시장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기술적분석(technical analysis)밖에 없다고 외친다.

과시 그는 기술적분석의 비조(鼻祖)라 할 만하다.

과연 기술적분석이 그러한 역할을 감내할 수 있음인가?

이를 믿고, 아니 하고를 떠나,

저이의 말은 ‘가즈아’보다는 몇 곱은 낫다.

아니, 저들은 차원이 아예 다르니 비교할 가치도 없다.


왜, 그런가?


저것은, 제 믿음, 소망에 의지하는 게 아니라,

시장의 본 모습을 보기를 기도한다는 점에서,

접근 태도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가즈아’  


이 말을 뱉어내는 한,

시장은 이 자를 짚단처럼, 힘 하나 들이지 않고, 

바로 거꾸로 쓰러뜨리고 말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말이다.

저 허접한 자는,

시장을 외면하고,

오로지 마빡에 부적 하나 붙이고,

적군에 돌진하는 ‘들림 당한’ 병사와 무엇이 다른가?


장수는,

나약한 병졸들을 불러놓고 말한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선,

너희들의 충성심이 필요하다.

나라가 있고 나서야,

백성들이 있는 법이다.’


그래놓고는,

쉬어터진 탁주 한 사발 먹이고는,

눈을 부라리며, 적진 속으로 밀어 넣는다.

아, 정말로, 저 어린 병사들이란.

얼마나, 가여운가? 


그리고 등 뒤에선,

징을 두드리고,

칼을 높이 흔들며,

눈을 부라려 겁박하며,

저들을 독려한다.


‘돌격 앞으로!’


저들 중, 살아 돌아온 이는,

만 명 중 하나가 있다 하여도 많다.

아니, 돌아온다면,

나는 다시 들로 쫓아 버릴 것이다.

저 하찮은 말에 속은 죗값은,

들녘에 나자빠져 까마귀밥이 되어, 갚아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헌데,


‘가즈아’


이 말은 장수가 졸개들을 꾀는,

‘돌격 앞으로’

이 말보다 몇 곱절은 더 싸구려다.


왜냐?


‘돌격 앞으로’


이 말에 속는다한들,

최소 술 한잔은 받아먹질 않는가 말이다.


하지만,

‘가즈아’

이 자가발전, 자기도취적 말엔,

그저 갈바람에 제풀로 움직이는 허재비들의,

우쭐거림 말고는,

아무런 믿음의 실현 기약이 없지 않은가 말이다.


‘안 되면 되게 하라.’


군바리들이 만들어낸,

이 천박한 말과 무엇이 다른가?


아니 되는 일은,

귀신이 떼거지로 달려들어도 아니 될 수밖에 없는 법이다.

하지만, 저들은 아니 된다한들, 되게 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거짓 선지자가 되어,

순진한 병사들을 제 신앙의 도구로 부리고 있음이다.

만약 저 문법을 암호화폐 시장에 끌어 들이면 어찌 될 것인가?

불문가지(不問可知), 백전백패(百戰百敗)하고 말 것이다.


시장이,

일개 장수의 외침대로 굴러 가는가?

또한 일개 투자자가 뱉어낸 ‘가즈아’란 말대로 상승 일변도로 나아가는가?


동쪽에 있는 집으로 귀가하려면 동쪽으로 가야 한다.

간밤에 아무리 술에 취하여 있다한들,

아침에 일어나 보면, 용하게도 제 집 안방에 대짜로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엊저녁,

상사 녀석은 말했다.

네 집은 서쪽에 있으니, 서쪽으로 돌아가라!

만약 저 말을 믿고 서쪽으로 갔으면,

그대는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헌즉,

서쪽으로 가라고 아무리 외친들,

그대의 집은 동쪽에 있음인즉,

저 외침만으론, 결코 동쪽에 있는 집을 서쪽으로 옮기지 못한다.

아니, 혹, 그대 몰래 기중기로 들어 올리고, 트레일러로 옮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상사가 그런 능력이 있다한들,

결코 지구 전체를 뱅그르 반 바퀴 돌려,

동을 서로, 서를 동으로 바꿔놓을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가즈아’란 말로써,

시장의 질서를 단 일 푼이라도 바꿀 수는 없다.


그러함이니,

시장을 믿어야 하지,

네 말을 믿어서는 아니 된다.


절집마다 모셔진 불상도,

땡중들은 저마다 게거품 물며, 제 절집 것이 용하다 선전해대지만,

믿음을 생산하는 것은 어쩌다 우연히 들어맞힌 하나 둘 뿐이다.

헌데, 꾀죄죄한 네 녀석이 뱉은 '가즈아'란 말이 신통력이 어찌 있을 턱이 있는가?


그대 대가리는 그 대 발보다 더 미덥지 않다.

그대 발은 고주망태가 되어도, 

신통하게도 제 집을 찾아 동으로 간다.

하지만, 취하지도 않은 그대는,

자나 깨나 ‘가즈아’란,

이 허깨비보다 더 못한 말을 허공에 대고 주야장천 외치고 있다.

이것은 술 취한 그대 발보다 더 못났지 않은가?

그대 대가리는 그대 발보다 더 엉터리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라.’


내가 병사를 지휘할 처지에 놓인다면,

궁할 때, 아마 이 말을 써먹을런지도 모른다.

꼭 그런다는 말은 아니다.


그런즉, 이 말은,

그대를 속여 먹는 장수가 써 먹을 말이지,

결코 제 목숨을 아끼는 병사가 의지할 말이 아닌 것이다.


마찬가지로,

‘가즈아’란 말은 네가 의지할 말이 아니라,

그대를 사지를 몰아넣는 말임을 알아야 한다.

혹 쓸모가 있다면,

남을 속여 먹는 데나 소용이 될까나? 


(출처 : 網絡圖片)


五色令人目盲;五音令人耳聾;五味令人口爽;馳騁田獵,令人心發狂;難得之貨,令人行妨。是以聖人為腹不為目,故去彼取此。

(道德經)


“오색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오음은 사람의 귀를 멀게 하며, ......

그러니, 성인은 눈을 위하지 않고, 배를 위한다.

고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흔히, 오색, 오음을 두고,

사치하거나, 음란한 생각, 음악 등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말로 새긴다.

이것 순전히 엉터리 해석이다.

노자의 말을 아전인수, 유가(儒家)식으로 해석하고 있으니,

망발을 넘어, 세상을 그르치는 죄를 짓고 있다 하겠다.


세상의 색이 오색뿐인가?

그럼 무지갯빛 칠색인가?

색깔의 수효는 헤아릴 수 없이 무한대로 많다.

아니, 결코 하나, 둘 숫자로 헤아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하겠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색을 두고, 오색이니 칠색이니 하며 나눠 분절한다.

세상을 이리 분절하여, 개념화하고, 정의하고, 규정하며, 질서를 만든다.

그리고, 다시 이에 기꺼이 복속하고 만다.

슬픈 일이다.

색은 무한대로되, 오색으로 규정된 세계 안으로 스스로를 제한하고 만다.

그리고 그 존재의 집 속으로 자진하여 들어가 편안함을 느낀다.

비 오고, 바람 불 때,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면,

안전이 보장되고, 

눈이 즐겁고, 

귀가 간지럽다.


‘가즈아’


이리 불러보면,

그리움이 봄철 아지랑이처럼 눈앞에 아른거리며,

입 안엔 달달한 침이 고이고,

이내, 몸은 새털처럼 가벼워지며 하늘을 난다.

곧 님을 만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웃기고 있네,

깨몽이다.

허망한 생각이다.


과연 색이 오색뿐인가?

암호화폐 시장에서 시세가 오르기만 하던가?

너의 규정, 

네 꿈대로 움직이는가?


시장은, 

그리고, 자연은,

너의 원망(願望), 

네 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바로 말하자면,

그와는 전혀 무관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러니, 오음, 오색이 네 눈, 귀를 멀게 할 것이라, 

노자가 말하고 있는 것이며,

‘가즈아’ 이 말이 엉터리라고,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聖人為腹不為目


그러니, 성인은 눈을 위하지 않고, 배를 위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爲腹 ↔ 不為目

腹 ↔ 目

內 ↔ 外

무분별 ↔ 분별

통찰 ↔ 개념 ...


여기 눈은 불교식으로 말한다면,

분별지(分別智), 차별지(差別智)를 지칭한다고 보면 좋다.

배를 위한다는 말은, 

이를 여윈 무분별지, 무차별지에 배대시켜 보면 재미있다.

전자를 불교에선 여량지(如量智)라고도 하는데,

이는 세상을 양화(量化) 즉, 분절하여 재단하는 지혜를 말한다.

기실 오늘날 컴퓨터라이징(computerizing)된 기술적 지식, 지혜가,

온 세상을 뒤덮고 있다.

그리고 이게 일정분 성과를 내고 있기도 하다.

반면, 후자를 여리지(如理智)라고도 한다.


‘가즈아’를 외치는 자가 그리는 세상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본으로 하고 있다.

자신이 헤아린대로 세상이 굴러가길 원한다.

그러함이니, 이를 여량지(如量智)라 한다.

한역(漢譯)치고는 여간 잘 번역된 말이 아니다.


개중엔 열심히 남의 말을 제 머리에 주어 담아,

그를 따르며, 세상이 그리 될 것이라 믿는 이도 적지 않다.

핫바지, 저고리들은,

쉬이,

땡중 말을 믿고,

사이비 개독 목사 말을 따른다.


여기 뼈 바르고, 살 져며, 엎어지며, 치마 걷어, 따르는 이들은 의외로 많다.

예전 종말론이 퍼질 때,

다미선교회 이장림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서는,

제 재산을 전부 넘기고, 혼자서만 휴거되리란 달콤한 꿈을 꿨다.


제가 그리는 세상,

남이 권하는 세상,


세상은 이 따위로 굴러가지 않는다.


세상은 어찌 굴러갈지 실로 알기 어렵다.

헌즉, 미치지 못하는 주제라면, 

참으로 보이는 대로 따를 일이지,

지레 짐작으로 망령되게 짓지를 말 일이다.

그러함이니, 노자는 눈을 위하지 말고, 배를 위하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함인데, 

오색, 오음을 두고 사치, 음란하지 말라는 식으로 해석을 한다면,

노자를 한낱 윤리 선생으로 전락시키고 마는 짓이라 하겠음이다. 


去彼取此


이 말은 무엇인가?


별도로 밖에서 구하지 말라는 말이다.

저기 부처, 하느님이 따로 있다고 믿지 말고,

네가 서있는 이 땅의 실상을 바로 보라는 말이다.

이게 불교의 팔정도(八正道) 중 하나인 정견(正見)이다.

천국, 천당이 저 멀리 따로 있다고 믿기에,

하늘을 향해 기도를 하고,

허공중에 ‘가즈아’ 이리 한 맺힌 소리를 질러대고 것이다.

미친 것이다.

하지만, 노자는 말하고 있다.

천국은 저기 없다.

천당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바로 여기가 천당이고, 불국토라고 이르고 있는 것이다.


반야심경의,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 사바하’에서,

바라아제를 두고 흔히 도피안(到彼岸)으로 번역을 하곤 한다.


그렇다면, 노자의 去彼取此가 아니고,

불교는 去此取彼가 되고 만다.

한껏 공(空)을 말하고 있다가,

저쪽 언덕으로 빨리 넘어가자고 외친다면,

이는, 반각도 지나지 않아,

바로 제 말을 부정하고 있는 격이라 하겠다.


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i svaha


바라아제에 해당되는 한자어는 波羅揭諦고,

범어는 paragate에 상당한다.

para는 영어 beyond, 한문의 超越, 究竟에,

gate는 영어 gone, 한문의 來自, 往, 到에 당한다.


그러니, paragate는 얼핏 도피안(到彼岸)으로 번역될 만도 하다 여기게 된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불교의 교리에 입각하자면,

이는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다분하다.


이는, 공간적 여기를 벗어나, 

천당과 같은 별개의 저 장소로 옮겨 가자는 말이 아니다.


‘가즈아’ 외쳐대며, 내 생각대로 세상이 굴러 갈 것이라 기대하는 망상,

공자, 부처, 예수와 같은 성인이 가르치는 말씀을 좇는 맹신,

para는 이런 망령된 관점, 생각을 벗어나자는 의미이지,

결코 물리적 공간 이탈을 지시하고 있는 게 아니다.


하니까, 도피안(到彼岸)에서의 안(岸)이 언덕으로 읽혀지는데,

여기에 눈이 사로잡혀, 이게 마치 장소라 여겨지기에,

바른 깨우침에 도달하는데 커다란 장애가 되고 있는 것이다.


철원에 도피안사(到彼岸寺)란 명찰이 하나 있다.

전에 들린 적이 있다.

당시 주지 스님이 개를 키우고 계셔,

잠시 말씀을 나눈 적이 있었다.


헌데, 도피안이란 말을 쓰고 있는 한,

도피안 교회와 무엇이 다른가?

혹인(或人, 惑人) 하나 있어, 

도피안(到彼岸)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여,

피안, 즉 천국으로 건너가길 신앙의 내용으로 하며,

저 절집을 출입한다면,

저게 불교가 아니고, 기독교라 이른들,

나는 둘 사이가 하나도 다르지 않음을 의심하지 않겠다.


五色令人目盲이라,

실로 도피안이란 말은,

못난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고 마는 것이다.


paragate는 실로,

파안이 별도로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마음조차, 

건너 뛰어 넘자고 이르고 있는 것이다.

하니까, paragate는 

도도피안(到到彼岸), 도도도피안(到到到彼岸), 도도도도피안(到到到到彼岸) ...

이런 무한차(無限次) 구경(究竟) 즉 궁극의 경지로,

거듭 부정되는 주문(呪文)인 것이다.

para - para - para - para .....

그대 여기 무한차열(無限次列) 자기부정의 행렬들을 보는가?

(※ 참고 글 : ☞ 화두(話頭)의 미학(美學) 구조)


paragate는 그런즉,

노자의 去彼取此와 다를 것이 없다.


저기에 별도로 있는 상을 구하지 말고,

사물의 실상을 바로 이 자리에서 깨우쳐야 한다는 말씀인 것이다.


다만, 

parasamgate라는 말이 덧붙여 있으니.


이는 sam이 同, 類의 뜻을 갖고 있듯,

함께 동사(同事)하여, 그리 하자는 것이 노자와 다르다.


반야심경은 대승불교 경전이다.

소승처럼 나 홀로 깨닫고자 하지 않고,

대중이 모두 더불어 깨우침의 길로 나아가자고 하고 있는 것이다.


노자는 하지만,

이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코 그 이후에도 그리 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그가 아니지만, 그를 안다.


聖人為腹不為目,故去彼取此。


이 말은 남을 의식하고 있지 않다.

각자는 제 각자가 자기가 되면, 족할 일이지,

그는 구질구질하게 남하고 손잡고, 어깨동무하고 길을 떠날 위인이 아니다.


정리하자면,

‘가즈아’란 말은 용렬하기 짝이 없는 말이다.

비겁하고도 천박한 말이다.


자신의 원망(願望), 

성인의 전망(展望)에 기대지 말고,

다만, 시장(세상)의 실상을 바로 볼 일이다.

시장이 전해주는 신호, 가르침에 충실할 일이다.

이게 바로 為腹不為目, 去彼取此의 함의(含意)인 것이다.


馳騁田獵,令人心發狂;難得之貨,令人行妨。


“말달리기, 사냥하기는 사람의 마음을 발광케 하고,

얻기 어려운 재물은 사람으로 하여금, 행동을 그르게 한다.”


그런즉, ‘가즈아’란 말을 주야장천 목 터져라 외치며,

세상을 어지럽히고, 자신을 속이는 짓을,

부끄러움도 모르고 연신 반복하는 것이다.

실로, 천박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라 하겠다.


녀석이 곁에 있다면,

산부인과에서 쓰는 겸자(鉗子) 빌려다,

아가리 열어젖히고, 혓바닥을 뽑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 때가 있었다.

이리하면, 세상의 화평이 이뤄지리라.

하지만,

이제는 마음을 놓아버렸다.

하고 많은 이를 내가 어찌 하겠음인가?


설혹 너무 바빠 침석(寢席)을 잊는다한들,

술 먹을 틈은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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