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정명론(正名論)

소요유 : 2019.02.06 13:52


내가 어제 먹거리X파일이란 프로그램을 유튜브로 보았다.

이 프로그램을 나는 이번에 처음 본다.

대략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리도 우리네 먹거리 현장이 전방위적 거짓으로 채워져 있다니 놀랍다.


(utube, 채널A 이영돈PD의 먹거리X파일 87회 2013.10.04)


대개, 이 거짓의 현장은, 

그 이름과 실질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고 있다.

가령 방금 본 영상에선,

이름은 고춧가루라 하되,

실제는 가짜인 경우를 다루고 있다.



(utube, 채널A 이영돈PD의 먹거리X파일 87회 2013.10.04)


나는 이제 막 사이비(似而非)란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린다.


孔子曰:‘惡似而非者:惡莠,恐其亂苗也;惡佞,恐其亂義也;惡利口,恐其亂信也;惡鄭聲,恐其亂樂也;惡紫,恐其亂朱也;惡鄉原,恐其亂德也。’君子反經而已矣。經正,則庶民興;庶民興,斯無邪慝矣。


“공자 왈 :

나는 같은 듯하면서 같지 않은 것을 미워한다.

강아지풀을 미워함은 곡식의 싹과 헷갈릴까 두려워함이요,

아첨을 미워함은 義를 어지럽힐까 두려워함이요,

말 잘하는 자를 미워함은 信을 어지럽힐까 두려워함이요,

정나라 음악을 미워함은 바른 음악을 어지럽힐까 두려워함이요,

자색(紫色)을 미워함은 주색(朱色-바른 색, 정색)을 어지럽힐까 두려워함이요,

鄉原을 미워함은 德을 어지럽힐까 두려워함임이라.

군자는 상도(常道)로 돌아갈 뿐이라,

바른 상도로 들어서면 서민이 흥할 것이요,

서민이 흥하면 사특한 것이 없어질 것임이라.”


자색(紫色) 빛을 아는가?

자색은 기실 보기엔 주색(朱色)보다 더 현혹적이다.

붉은 빛 속에 검은 빛이 감춰져 있음에,

화려한듯 슬프고,

슬픈 가운데 아름답다.


  (※ 동양에선 황색을 귀히 여기지만,

      서양에선 자색(적+청)은 귀족을 상징하는 색이다.


      오방색(五方正色),

      즉 흑(黑), 청(靑), 적(赤),백(白), 황(黃)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삼원색을 기본으로 한다.

      반면 이들 간의 조합으로 만들어지는 간색(間色)은 

      정색이 양(陽), 귀(貴)하다면

      음(陰), 천(賤)한 것으로 배대하고 있다.)


하지만 이게 정색(正色)은 아니지 않은가?

공자는 준엄히 묻는 것이다.

바르지 않은 빛 - 간색(間色) 속에 숨은 검은 위험을 말이다.

얼핏 눈을 속이고 마음을 앗아가지만,

그게 한 때의 사랑이고, 속임임이라,

위험할진저!


서민 위한다는 말을 쉽게 뱉는 정치인들이나,

촛불 정신을 365일 마냥 되새기고 있다는 위정자를,

독사를 보듯 의심하고,

범을 보듯 경계하라.


행으로 입증되지 않는,

말은 칼보다 사뭇 위험하다.


사이비란 말을 이리 다시금 상기하고 있음인데,

헌데, 때 마침, 내 블로그에 댓글이 달렸다.

이 댓글 내용이, 

이와 빗대어 보기에, 알맞은 사례가 되기에,

이를 이 자리에 등장시켜 다뤄보려고 한다.


그 댓글이 달린 나의 본글을 먼저 밝혀둔다.

☞ 병자각?


여기 댓글을 보면,

이런 주장이 펼쳐지고 있다.


“'병자각' 이라는 말 자체도 굳이 한자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한자를 찾기보다는 '병자각'이라는게

뭔지 공부하면 될 일입니다.

한자는 부수적인 것이지 꼭 필요한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먹거리X파일의 영상에선,

이름과 내용이 다른 것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이 댓글주(主)는 이름은 중요하지 않고 내용만 살피면 된다는 주장이다.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나는 이 시의 해석 공간을 넘어,

어디선가 비판적 생각을 편 적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차원의 논의인즉,

더 이상은 이 자리에서 자세히 언급하지 않고,

설명의 편의 한도 내에서 필요한 정도만 기술할 것이다.


우리의 일상의 세계에선,

사물에 이름을 지어, 

실재 또는, 사물의 위치(지위)를 바르게 한다.


其正者,正其所實也。正其所實者,正其名也。

其名正,則唯乎其彼此焉。

(公孫龍子)


“그 바른 것은 그 실질을 바르게 함이다. 

그 실질을 바르게 한다는 것은 그 이름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그 이름이 바르게 되면, 그 그것과 이것을 (명확히 한정하여) 부르게 된다.”


나는 타자로부터 이름 지어져 불려짐을 원하지 않는다.

그 어떠한 이름으로든 특정된 한정자로 규정되기를 원치 않는다.

따지고 보면, 주민등록이란 제도는,

국가가 개인을 번호를 부여하여, 한정하고, 라벨링하고, 줄을 세워, 

관리의 편의를 도모하고, 세금과 역을 부과하기 위한 술책의 하나이다.

이 때, 개인의 주체적 인격은 제한되거나, 사라지고,

국가내지는 권력의 객체로 전락하게 된다.

마치 소의 귀를 뚫어 하얀 표지를 달듯이,

저것은 소를 위함이 아니라,

이를 동원, 착취하고 있는 인간의 소용에 닿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체는 외부로부터 강요되는 객체화 시도에,

단호히, 그리고 줄기차게 맞대응하며 저항하여야 한다.


참고로 이 자리에 결론부에 이를 이야기를 먼저 부려놓고자 한다.

이하의 내 글을 마저 읽으면 조금 더 명확해지겠지만,

세상엔 이 글에서 주로 다룰 정명론(正名論)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 유가의 정명론은 반듯하여,

마치 제상에 올리는 기명(器皿) 그릇처럼 정갈하다.

하지만, 상명론(常名論), 무명론(無名論)도 있으며,

오명(汚名), 훼명(毁名)을 일삼는 불한당 무리도 적지 않은 것이며,

불용명(不用名)의 어리석은 이들로 드물지 않은 것이다.

이것들을 지금 모두 다 다룰 수는 없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의 인연을 기다린다.


공손룡은 실질을 바르게 하는 것이 이름을 바르게 하는 것이라 하고 있다.

이제 그 바름이 이뤄지면, 이것과 저것을 바로, 명확히, 한정하여, 부를 수 있다.

그는 이리 주장하고 있다.

서술된 문장 구조에 비추면,

정명(正名)을 정실(正實)의 선행 존재론적 가치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실질을 바르게 하는 것은,

그 이름을 바르게 하는 것이라 하고 있는 것이다.


공손룡의 글은 툭 던져진 글귀만 있고, 소략(疏略)하여, 조금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공자의 소위 정명론(正名論)은 보다 뚜렷하다.


子路曰:「衛君待子而為政,子將奚先?」子曰:「必也正名乎!」子路曰:「有是哉,子之迂也!奚其正?」子曰:「野哉由也!君子於其所不知,蓋闕如也。名不正,則言不順;言不順,則事不成;事不成,則禮樂不興;禮樂不興,則刑罰不中;刑罰不中,則民無所措手足。故君子名之必可言也,言之必可行也。君子於其言,無所苟而已矣。」

(論語)


“자로가 공자께 여쭙다.


‘위나라 임금이 선생님을 맞아들여 정치를 하게 한다면,

선생님께서는 장차 무엇을 가장 우선으로 하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다.


‘필히 이름을 바로 세울(正名) 것이다.’


자로가 말하다.


그렇다면, 이 점에 있어선,

선생님께선 (현실과 동떨어진) 우활(迂闊)한 부분이 있다 하겠습니다.

어찌 (이로써) 바로 세울 수 있단 말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다.


‘조야(粗野-천하고 상스럽다)하구나.

군자는 아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는 함구하느니라.

이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불순해지며(이치에 어긋나고),

말이 불순해지면, 일이 이뤄지지 않으며,

일이 이뤄지지 않으면, 예악이 일어나지 않으며,

예악이 일어나지 않으면, 형벌이 딱 맞아 떨어지지 않게 되며,

형벌이 딱 맞아 떨어지지 않게 되면, 

백성이 수족을 둘 곳이 없어진다.(어찌 처신할 줄 모르게 된다는 뜻)


그런즉, 군자는 이름을 바로 세우면, 반드시 말이 서고,

말이 서면 반드시 행해진다.

따라서 군자는 그 말을 함에 있어, 

구차하지 않다.(그저 형편대로 건성건성 소홀히 하지 않는다)’”


순자의 정명론에 대하여는 다른 곳에서 진작에 언급한 적이 있는데,

이번엔 공자의 정명론을 다시 끌어내본다.

공자는 말(言)에 앞서 이름(名)이 발라야 한다고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로는 실질 내용, 즉 말로서 드러낼 생각, 전할 생각을 바로 하면,

그 뿐이지, 구태여 이름까지 그러할 까닭이 있는가?

이런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공자가 말(言)에 앞서 정명(正名)을 앞세우는 일이,

현실의 실정을 모르고, 너무 먼 곳을 돌아가는 일이라 빈정대고 있는 것이다.


앞서의 댓글主의 태도는,

바로 이 장면에서의 자로와 비슷하지 않은가?


그런데,

기실 현실에선 어떠한가?

저 가짜 고춧가루의 사례에서 보듯,

고춧가루도 아닌 물건에 고춧가루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에서부터,

사회가 혼란이 오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너와 내가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되고,

음식을 먹을 때, 전전긍긍하며 먹어야 하다니,

이 얼마나 기가 찰 노릇인가?


이름이라는 것이 그저 어떠하든,

단순히 실질 내용을 서술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것을 이 사례를 통해 통감하며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공자에게 있어 정명(正名)은 정언(正言), 정실(正實)의 성립 조건인 것이다.


공자는 그러하므로, 말(言)에 앞서,

선행적으로 이름(名)이 발라야 한다고 언명하고 있는 것이다.


자, 이제 다시 문제의 댓글을 끌어다놓고 검토해본다.


“'병자각' 이라는 말 자체도 굳이 한자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한자를 찾기보다는 '병자각'이라는게

뭔지 공부하면 될 일입니다.

한자는 부수적인 것이지 꼭 필요한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보면, 댓글主는 이름을 재끼고,

다만 그 내용만 알면 족하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정명(正名)을 바로 세우기는커녕,

아예 이름 따위는 필요 없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만의 성곽에 갇혀서,

언어소통이 필요 없는 상황이라면,

혹 그러할 수도 있다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병자각이란 말은 댓글主에 앞서 누군가가,

던져놓은 말이 아닌가?

이를 접하여 소비하는 순간,

저 말은 이미 언어를 통한 소통의 도구로 쓰이고 있다. 


그래 백번 양보하여,

말이 소통이나, 일방적 전달에 그치는 것이라면,

품은 뜻이나 전할 생각을 바르게 말하면(正言)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와는 상관없이,

공자는 작정하고 바로 正名 없이는 正言도 불가능하다고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名不正),

말이 이치에 맞지 않게 된다.(言不順)


나아가,

일도 이룰 수 없고(事不成), 

예악도 일으킬 수 없고(禮樂不興), 

형벌도 바로 맞춰 행해지지 않고(刑罰不中),

결국 백성이 처신을 어찌 해야될지 모르게 된다.(無所措手足)

이리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아마도 정명(正名)을,

언어의 전제 조건이자, 사유의 구성 요건으로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는 왜 그러한지에 대하여는,

더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순자의 정명론은 공자의 정명론에 비해,

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며, 게다가 친절하기까지 하다.


故王者之制名,名定而實辨,道行而志通,則慎率民而一焉。故析辭擅作名,以亂正名,使民疑惑,人多辨訟,則謂之大姦。其罪猶為符節度量之罪也。故其民莫敢託為奇辭以亂正名,故其民愨;愨則易使,易使則公。其民莫敢託為奇辭以亂正名,故壹於道法,而謹於循令矣。如是則其跡長矣。跡長功成,治之極也。是謹於守名約之功也。今聖王沒,名守慢,奇辭起,名實亂,是非之形不明,則雖守法之吏,誦數之儒,亦皆亂也。若有王者起,必將有循於舊名,有作於新名。然則所為有名,與所緣以同異,與制名之樞要,不可不察也。

(荀子)


“고로 왕자는 이름을 지으니, 

이름이 정해지면 바르게 분별이 되고, 도가 행해져 뜻이 통한다. 

그런즉 백성을 하나로 신중히 통솔할 수 있게 된다. 

그런고로 말을 분석하여 제 마음대로 설명을 만들어 이름을 혼란시키고, 

사람들을 의혹하게 하고 쟁송을 일으키는 것을 대간(大姦)이라 하는 것이니, 

이것은 부절이나 도량형을 속이는 죄와 같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기괴한 말에 따라 바른 이름을 혼란시키지 아니하므로 성실하고, 

성실하므로 부리기가 쉽고, 부리기 쉬우면 공업을 이룰 것이다. 

그 백성들이 기괴한 말로 이름을 혼란시키지 아니하므로,

오직 법을 따르고 영을 좇을 것이니, 그러면 치적은 오래 지속될 것이다. 

치적의 영속과 공업의 완성은 다스림의 궁극이요, 

이것이 이름을 하나의 약속으로 지킨 공이다. 

이제 성왕이 없고, 이름 지킴을 태만히 하고, 

기괴한 말로 이름과 실의 일치가 어지럽고, 

옳고 그름의 구별이 분명하지 못하여,

법률을 다루는 관리나 경서를 외는 유자조차 모두 혼란 중에 있다.


만약 왕자가 (새로) 일어난다면, 

반드시 옛 이름을 따라서, 새로운 이름을 짓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름이 있게 된 바와, 

같고 다른 연유와,

이름을 지은 가장 중요한 요체를, 

가히 살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 여기 이 부분을 보라.


故析辭擅作名,以亂正名,使民疑惑,人多辨訟,則謂之大姦。其罪猶為符節度量之罪也。


“그런고로 말을 분석하여 제 마음대로 설명을 만들어 이름을 혼란시키고, 

사람들을 의혹하게 하고 쟁송을 일으키는 것을 대간(大姦)이라 하는 것이니, 

이것은 부절이나 도량형을 속이는 죄와 같다.”


제멋대로 말을 분석하고 이름 지어(作名),

바른 이름을 어지럽히는(亂正名) 짓을,

부절이나 도량형을 속이는 죄와 같다고 이르고 있다.


고춧가루도 아닌 것을 두고,

고춧가루라 이름하여,

온 천하를 속이는 짓을,

어찌 부절이나 도량형을 속이는 죄와 다르다 할 수 있겠음인가?


이리 되면,

천하에 난(亂)이 일어나고 만다.


이제 소개한 순자의 글을 대하면, 

정명(正名) 즉 바른 이름을 확립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보다 확실해졌을 것이다.


여기서 순자의 정명론 일부만을 소개하고 있지만,

내가 친절하다고 말하였듯,

순자는 이에 그치지 않고, 말씀을 더욱 전개하고 있다.


故知者為之分別制名以指實 ...

고로 지자(知者)가 분별하여, 이름을 지어, 실상을 가르치고 ...

貴賤明,同異別 ...

귀하고 천한 것이 분명해지고,

같음과 다름이 구별되고 ...

如是則志無不喻之患,事無困廢之禍,此所為有名也。

이와 같이 되면, 깨우치지 못하는 근심이 없어지고,

일에서 곤궁하여 피폐해지는 화가 없어지는데,

이것이 이름이 있어야 하는 소이인 것이다. 


바로 이 문구가 등장하는 장면,

志無不喻之患

여기에 이르러,

나는 무릎을 치며 크게 탄성을 지른다.


내가 애초 ‘병자각’이란 단어를 접하고서는,

이게 무슨 뜻인가 의아해하며, 

아지 못함을 근심하였음이라,

헌데, 순자는 바로 이를 정확히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게 이름이 바로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갈파하고 있는 것이다.

‘병자각’

이 덩그란히 던져진 글자들의 행렬은,

아직 이름의 기능을 제대로 행치 못하고 있다.

柄子殼

이리 그 글자 뜻이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밝혀지자,

아연 내 마음에 근심의 구름이 사라지고,

앎(지식)의 깨우침이 가능해지고,

일(事)이 성사가 되었다.


이는 이름이 바로 제 자리(位)를 얻었기 때문이다.


순자엔,

이어 이름을 짓는 주체, 이름을 바로 짓는 법, 성인의 변설 ....

등 다양한 주제의식으로 정명에 대하여 논설하고 있다.

이제 가짜 고춧가루를 의식하면서,

순자의 형권(衡權) 이야기를 음미하며 그의 문을 나가고자 한다.


衡不正,則重縣於仰,而人以為輕;輕縣於俛,而人以為重;此人所以惑於輕重也。
權不正,則禍託於欲,而人以為福;福託於惡,而人以為禍;此亦人所以惑於禍福也。

道者,古今之正權也;離道而內自擇,則不知禍福之所託。


"저울대가 바르지 않아,

무거운 것이 달렸으되 대가 치켜 올라가면, 사람들은 가볍다 할 것이며,

가벼운 것이 달렸으되 대가 아래로 숙이면, 사람들은 무겁다 할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가볍고 무거운 것에 현혹되어 있기 때문이다.


저울추가 바르지 않아,

화(禍)가 욕심에 붙어와도, 사람들은 복으로 여기고,

복이 흉악한 것에 붙어와도, 사람들은 화로 여긴다.

이는 사람들이 화와 복에 혹하기 때문이다.


도란 고금의 바른 저울추인 것이다.

도를 떠나서 안으로 스스로 택하게 되면,

화와 복이 의탁한 바를 모르게 된다."


가짜 이름으로,

상인은 돈을 벌고, 소비자를 속인다.

하지만, 소비자를 일방적 피해자로 설정할 수만도 없다.

소비자는 싼 것, 거죽으로 예쁜 것만을 찾으니, 

사기꾼은 이러한 물건들을 만들어내어,

저들을 일편 만족 시키며, 가짜를 천하에 유통시킨다.

물건뿐이 아니고, 급기야 흉한 생각과 비열한 행동까지,

세상에 퍼뜨리는 것이다.

그리고, 소비자는 음양으로 이들을 일변 부추기고, 도와주고 있음이다.

헌즉, 이들을 가려 하나만을 죄가 있다 하겠음인가?


게다가, 소비자 중에는 이 사정을 알면서도,

당장의 편익과 경제적 이유로 이를 취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양두구육(羊頭狗肉)

양 머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파는 일에,

상인, 소비자는 모두 공범으로 밀어주고 당겨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이런 의심을 거둘 수 없는 것이다.


가령, 곶감을 만들 때,

대부분의 상인들은 황을 태워 훈증한다.

이로써, 곰팡이가 생기지 않고,

선명한 색깔을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다.


시장에선, 이런 상품에 대한 기호도가 높기에,

상인들은 거개가 이 짓을 자행한다.

황을 훈증할 때,

소위 아황산가스가 발생한다.

이게 사람에게 무엇이 좋으랴?

특히 알레르기가 있는 이에겐 큰 탈을 일으키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제 눈의 만족을 위해,

도대체가 좀 검은 그 자연스런 색감의 곶감을 외면한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시장엔 더 이상 양화가 남아 있지 못하게 된다.

헌즉 어찌 상인 탓만 할 수 있겠음인가?


상인을 사기꾼이라 매도할 수 있으려면,

상품 내용을 바로 파악하려는 노력을 기우려야 하며,

가짜를 내치고, 바람직한 물건을 소비하려는, 

건전한 자각, 이를 갖춘 주체적 인격이 확립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당장의 편익만을 구하고,

사적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 더렵혀진 세태를 추수(追隨)하며,

천하의 바름을 돌보지 않게 된다.

나는 이런 자들을 괴물이라고 부른다.

저들의 모습은 그 얼마나 흉한가?


이야기가 길어지고 있다.

하지만, 여기 마지막으로 한비자의 말씀에 기대어,

그 끝을 마감하고자 한다.


虛則知實之情,靜則知動者正。有言者自為名,有事者自為形,形名參同,君乃無事焉,歸之其情。

(韓非子)


“마음을 비우면 실제의 정황을 알 수 있고,

고요히 머무르면 움직이는 것의 정체를 알 수 있다.

말할 것이 있는 자는 스스로 말하게 되고,

일하려는 자는 스스로 업적이 드러나게 된다.

말과 실적의 일치 여부를 대조하면,

군주는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그 실정을 바로 알게 된다.”


여기 형명참동(形名參同)이란,

명분과 실적의 일치 여부를 대조한다는 뜻이다.


하니까, 신하가 내세운 말,

즉 주장한 명분과,

실제 그 말대로 실현된 실적.

이 둘을 대조한다는 뜻이다.


이게 제대로 아니 되면,

어찌 하는가?

신상필벌(信賞必罰)

따지고 보면 한비자의 변설 중 현실적 실천 요술(要術)은 바로 이 네 마디로 집약된다.

形名이 함께 맞으면 상을 주고,

다르면 벌을 줄 뿐이다.


形名


이를 가짜 고춧가루 사태에 대비하면 이러하다.


名은 고춧가루이되,

形은 가짜 고춧가루가 된다.


이게 서로 대조해보니(參)

같지(同) 않다.


어찌 죄가 아닐 터이며,

벌을 주지 않을 수 있으랴?


예타면 역시 形名이 어긋난 것이고,

(※ 참고 글 : ☞ 예타면)


명명백백한 일을 두고,

김경수 구속을 부당하다고 외치고 있는 이들 역시,

形名이 같지 않은 짓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홍준표는 이를 넘어,

오명(汚名)이라,

세상의 바른 이름을 무차별적으로 더럽히고 있다 하겠다.

이이는 정도가 너무 심하다.

이들 모두는 천하를 어지럽히고 있는 죄인이라 할 밖에.


이어 한비자엔 이런 말이 등장하고 있다.


不謹其閉,不固其門,虎乃將存。


"문빗장을 거는 일을 신중하게 하지 않고,

그 문을 굳게 지키지 않으면,

호랑이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가짜 고춧가루가 나도는 일은,

상인들만 탓할 일도 아니며,

소비자가 거죽으로 흠집 없고, 때깔 고은 것만 취하려 하는,

그 헛된 욕심만을 나무랄 일만도 아니며,

바로 이들을 선도하고, 단속할,

즉 그 정도(正道)의 문빗장을 책임지고 있는 군주 자신이라고,

한비자는 갈파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식약청내지는 보건안전을 담당하고 있는 관서는 물론이거니와,

바른 말을 지키고, 사용을 선양할 주체인 문교 당국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말이다.


이를 소홀히 하고 있는 이들에게도 역시,

그에 상응하는 벌이 하늘에서 내리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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