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카운슬링의 실제

소요유 : 2019. 3. 5. 20:00


내가 최근 접하게 된 utube 동영상이 하나 있다.


거기 한 사연이 소개되고 있다.


이를 보자,

한 생각 일어 적어본다.


헌데, 남의 내밀한 이야기를 이리 공개해도 되는가 싶다.

친전(親展, Confidential) 표시가 없다한들,

이러한 이야기는 상대를 신뢰하기에 보낸 것일 터인데,

전세계인이 함께 하는 자리에 까놓을 수 있는가?

이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온당한 일이 아니라 판단된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차후를 위해 부득불 해당 메일 내용을 갈무리하여 두었으나,

감히 전문을 공개할 용기는 없다.

왜냐하면 고민녀의 신분을 보호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다만, 내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해당 동영상 url을 잠시 여기 걸어둔다.

때에 이르면, 이를 저이에게 일러,

이를 경계하고도 싶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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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바람난 남친, 용서***)


아니다.

이리 알릴 일이 아니다.

삼가, 감춰두겠다.


사신(私信)의 내용을 최대한 간단히 정리해둔다.


고민녀가 조언을 구하는 내용은 이러하다.


남자 친구가 하나 있다.

명문대 출신, 좋은 직장에 다닌다.

그와 교제하며, 이십대 초반부터 결혼할거라 생각했다.

내년 봄 예식을 올리려 결혼 준비를 하던 중,

그가 대학 동기와 잠자리를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연애 초반 비슷한 사건이 두어번 있었다.

그는 죽을 죄를 지었다면 용서해달라고 하고 있다.

몇 달 후 결혼할 사람이 그런 짓을 했다는 사실이 소름이 끼친다.

슬픈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다.

언니 전 어쩌면 좋을까요? 어떻게 잊고 용서할 수 있을까요?


나는 본디 이런 상담 일에 별반 흥미를 일으키지 않는다.

게다가 남의 일에 깊은 통찰력을 발휘하여 인도할 능력도 없다.


다만 드라이하게 이런 일에 대해 조감(鳥瞰)을 해볼 수는 있겠다.

아울러 조금 더 나아가 해석학적 분석을 가하는 일은 서투나마 해 볼 수는 있다.

이로써, 이런 문제에 대한 새로운 조망(眺望)이 가능하다면 다행이겠다.


폐일언하고,

 

나는 마지막 글에 이미 답은 나와 있다고 생각한다.


까뮤가 그랬던가?


카운슬링을 받는 이(counsellee)는,

이미 그가 원하는 답을 카운슬러(counsellor) 이전에 알고 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상담을 구하는 이는 정작 도움을 받고자 하기 이전에,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정해두고 있다는 말이다.

헌즉, 이미 답은 정해져 있고,

다만 카운슬러에게 자신이 바라는 말을 듣고 싶어할 따름이다.


언니 전 어쩌면 좋을까요? 어떻게 잊고 용서할 수 있을까요?


그의 상담 이메일 구조를 보면,

상대를 이미 완벽한 이로 상정하고 있으며,

잊고 용서할 것을 예정하고 있다.


그러함인데,

그는 왜 애써 상담을 요청하고 있는 것인가?


그는 상담을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작은 자신의 생각을 확인해주고, 동의해줄 사람을 구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유튜버는 상대를 나무라다시피 하며,

남자 친구를 버리라 주문하고 있다.


카운슬링이라는 것이 과연 옳고 그름을 판가름 하는 행위인가?

그게 당위(當爲)를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하다면,

고민녀는 주소를 잘못 찾은 것이리라.


고민녀는 자신의 내적 결정을 부조(扶助)하고 응원해줄 이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함인데, 시비를 가리고, 자신의 정조(情操)를 거스리는 주문을 하는 이가,

나타난다면 이를 어찌 달가와 하리?


한편, 저 카운슬러는 고민녀를 도우려고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정조(情操) 또는 이성적 판단을 기술내지는 주장하고 있음인가?

이 드러난 사태에 대한 판단과 실제 그의 행위가 같으리란 보장도 없다.

막상 카운슬러가 고민녀의 처지에 있다할 때,

그가 어떠한 판단과 행동을 할지 알 수 없다는 말이다.


凡說之難:非吾知之,有以說之之難也;又非吾辯之,能明吾意之難也;又非吾敢橫失,而能盡之難也。凡說之難,在知所說之心,可以吾說當之。

(韓非子)


“무릇 설득의 어려움이란, 

자신의 지식으로 남을 설득하기 어렵다는 것이 아니다.

또한 나의 변론술로써, 자신의 뜻을 밝히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또한 나의 종횡무진한 솜씨로 능히 다 펼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무릇 설득의 어려움이란,

그 설득시키려는 (상대의) 마음을 알아내어,

자기의 말을 맞추는데 있다.”


이 말씀은 천하의 절창(絶唱)이다.

내가 이 말씀을 처음 접하고는,

북한산에 올라 너럭 바위 위에 앉아,

수십번이고 되뇌이며 이 구절을 외우고 또 외웠음이라.


나는 여기 시골 땅에 와서,

검디 검은 인간들을 너무도 많이 만나,

한비자를 새삼 소환하여, 평생 스승으로 삼고 공부를 하고 있지만,

서울 땅 예전부터 그가 놀라운 인물을 임을 익히 알고 있었음이라,

바로 이 세난 편을 대하고는,

그의 예리하며 깊은 통찰력에 탄식을 금치 못하였다.


물론, 여기 전개되는 현실 상황 구조는,

왕과 신하란 강잉히 짜여진 철 구축물에 갇혀 있다.


하지만, 이 양자에 흐르는 긴장 구도는,

철이 아닌 종이 관계망일지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이 통한다.


저 고민녀는 카운슬러를 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실상은 자신을 위로해줄 광대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공적 상담 사회적 기관이 있다면,

마치 저 유튜버처럼 판에 박힌 이야기를 늘어놓았을 것이다.

이것 아무런 하자가 없다.


마침 유투버 그 동영상에서도 하자 운운하는 말이 나온다.

고민녀 남자 친구를 두고 하자라 하고 있는데,

이게 하자(下者)는 아니고 필시 하자(瑕疵) 를 뜻할 것이다.

이게 무엇인가 어원상으로는 옥에도 티가 있다는 말인데,

기실 저자는 티 있는 옥은커녕 그냥 쓰레기에 불과하다.


어쨌건, 사회적 공적 상담원이라면,

저런 이상으로 더 나아가기는 벅찰 것이다.

만에 하나 깨인 이가 있어,

그 이상 나아갔다 할 때,

혹여 예기치 않은 일이라도 일어난다면,

책임이 따르고, 실직할 수도 있다.

허니, 무엇을 더 기대하리.


허나, 만약 상담소가 돈을 지불해야 하는 민간 회사라면 어떠할까?

저런 판에 박힌 루틴(routine)한 짓을 넘는 모험을 할 수 있으리라.

만약 상담소 소장이,

고객의 마음을 달콤한 말로 어루만지며,

효과를 얻고자 한다면,

저 유튜버처럼 판에 박힌 말을 하지 않고,

외려 고민녀를 도와 적당한 말로 꾸며.

‘잊고 용서하라’ 권할 수도 있으리라.

아마 그리 그이를 위무하면,

상담료 외에 두둑한 사례금이 따를지도 모른다.


고민녀가 진정 원하는 것은,

바로,


언니 전 어쩌면 좋을까요? 어떻게 잊고 용서할 수 있을까요?


이 말에 이미 다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미아리 점집도 실로 명성이 나는 것은 간단하다.


실인즉, 신에게 묻고 얻는 점괘가 아니라,

구하는 자의 마음을 얼마나 잘 맞춰,

점복(占卜)을 이리로 잘 꿰어 맞추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음식점도 명성을 얻으려면,

정직한 건강식을 제공할 일이 아니라,

실인즉, 고객들의 혓바닥이 원하는 바에 맞추는 데 있음이라.

공연히 정직하게, 우직하게, 옳은 음식을 만든다한들,

고객들은 이를 원치 않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당장 맛있고, 보기 좋은 것임이라,

그것 먹고 석달 열흘 후에 죽을 몹쓸 것으로 만들든,

시궁창에서 오수(汚水)를 걸러 만든 중국 간장을 쓰든,

가짜 고추가루로 요리를 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다만 당장 저들의 혓바닥에 충실하면 될 일이다.

단, 들키지만 아니 하면 된다.


만약 내가 그 상담소 소장이라면,

고민녀에게 이런 내용을 다 까발리며,

그대 당신이 진정 원하는 바를 선택하라 이를 것이다.

자신에게 솔직하라 주문할 것이다.


그대가,

진정 남자 친구의 ‘명문대 출신, 좋은 직장’ 이게 좋다면,

그를 택할 것이다.

다만, 이게 진정 그를 용서하기 때문인지 아닌지는,

그대가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게 용서인지 아니면 핑계인지,

제대로 알게 된다면,

그 어떠한 선택일지라도,

그 누구도 그대를 비난하거나 칭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때에 이르르면,

그것은 남이 아닌 오로지 자신의 정직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대가 진정 원하는 것을 택하였을 뿐이니,

이제 그대의 앞날에 축복이 내리길 빈다.



그러하니, 좌로 가느냐, 우로 가느냐가 아니라,

그게 핑계가 아니라, 명확히 깨어있는 의식적 행동에 달려 있다.

나는 그대의 선택에 관여하거나, 도와주려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깨어 있는 상태에 놓이기를 도와주려 할 뿐이다.

그 어떠한 선택이든 고객을 비난하지도, 칭찬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하니,

오직 그대 자신에게 솔직해질 일이다.


현실에서,

감당하기 벅찬 일, 용납하기 힘든 일을 마주할 때,

사람들은 곧잘, 신불(神佛)을 찾거나, 하늘에 기대어, 

간절히 기도를 한다.

때론, 갖은 핑계를 대고,

고깔 모자를 쓰며, 광대(가 되기)를 자처한다.

또는 카운슬러를 찾아 자신의 위치를 강화하고 싶어 한다.

만약, 점쟁이, 카운슬러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제 마음에 맞춤한 말을 하는 이를 찾아 다닐 것이다.

열 집을 방문하면, 적어도 그 중 하나는 자신이 원하는 말을 내놓을 것이다.

그리고 아홉을 모두 버리고 하나를 구하여,

자기 신념을 강화하는데 쓸 것이다.

그 신념이 거짓이든, 진짜이든 무관하게.


이런 전도(顚倒, 轉倒), 위장, 은폐를 통해,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스트레스를 일시 옆길에다 쓸어버린다.


그렇다 하여, 문제가 없어진 것은 아니로되,

이리 맨홀 뚜껑으로 덮어 일시 문제를 봉합함으로써,

자신을 구제한다.

아,

가여운 이들.

나는 이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 고양이들처럼,

당당히 덫에 맞서길 바란다.

(※ 참고 글 : ☞ 고양이와 깃발)


용감해지기를, 

당당해지길 바란다.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자신한테 부끄럽지는 않을 테다.


이는 아무나 성취할 수 있는 경지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아무도 이 길을 방해하는 외부 세력은 결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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