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소요유 : 2019.05.05 09:37


南海之帝為儵,北海之帝為忽,中央之帝為渾沌。儵與忽時相與遇於渾沌之地,渾沌待之甚善。儵與忽謀報渾沌之德,曰:「人皆有七竅,以視聽食息,此獨無有,嘗試鑿之。」日鑿一竅,七日而渾沌死。

(莊子 應帝王)


"남해의 제왕을 숙이라 이르고, 북해의 제왕을 홀이라 이르며, 

중앙의 제왕을 혼돈이라고 이른다.

숙과 홀은 혼돈의 땅에서 서로 더불어 만나곤 했다.

혼돈은 이들을 지극히 잘 대접했다.

숙과 홀은 혼돈의 덕을 보답하고자 했다.


‘사람들은 모두 7개의 구멍이 있다. 이것으로써 보고, 듣고, 먹고, 숨을 쉰다.

하지만 그만은 홀로 그것들이 없다.

시험 삼아 그것을 뚫어주자.’


하루에 하나씩 뚫어주었는데,

칠일 만에 혼돈은 죽어버렸다."


분화 단계가 더욱 진행될수록,

저 혼돈처럼 더욱 죽을 날이 가까워 온다.

오늘날은 구멍을 더 뚫으려야 더 이상 여지(餘地)가 없을 정도다.

숙과 홀을 닮은 이들이 지구상엔 너무 많기 때문이다.


주역은 26 64에서 멈춰 염치를 차렸다.

인간은 욕심이 많은 존재이기에 易보다 하나 더 많은 七이 되기도 하고,

때론 十이 되기도 하며, 요즘엔 인공지능으로 十一로 나아가고 있다.


혼돈은 영어로 하자면 chaos쯤 된다.

카오스 이론, 나비효과 ...

이게 무엇인가?

모두 그 내용을 얼추 알고 있다.


이 이론의 핵심은 간단하다.

인지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자인(自認), 고백에 불과하다.

숙과 홀은,

혼돈에게,

코 하나 더 뚫어주면 냄새를 맡을 수 있고,

귀 하나 더 뚫어주면 소리를 듣겠거니 여긴다.


낙동강변 하우스 재배업자들은,

지하수를 끌어올려 겨울철 수막 난방을 한다.

농부 하나가 있어 이리 나서자,

이웃 김가도 따라 구멍을 파되 욕심이 승하여 하나 더 뚫었다.

그러자 박가도 뒤질세라 이를 흉내 내되,

김가보다 거듭 욕심을 내니 22를 뚫더라.

얼마 지나지 않아,

1+2+22+23+24 ...

가없이 많은 구멍이 땅에 뚫렸다.

이젠 저들이 주인이 되어 큰소리를 친다.


‘이명박이 만들어놓은 낙동강 댐 부수면,

그냥 묵과하지 않고 필사저항할 것이다.’


욕심은 멱승(冪乘)으로 커가지,

그저 단순히 선형(linear) 가법적(加法的)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카오스 이론은,

비선형 구조(nonlinear structures)를 갖는 자연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여기 인간의 멱법적(冪法的) 욕망 방정식이 더해지면,

그 종말이 속히 다가올 것이라는 것을 익히 알 수 있다.


애초 난방비를 절약하는데 마음이 기우러졌지만,

땅 속에 구멍을 뚫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그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다.


그저 구멍이지만,

九泉

저 깊은 곳의 사정은 아무도 모두 알 수 없다.


一變而為七,七變而為九。九變者,究也,


열자(列子)엔 易을 두고 이런 기술이 있다.


하나가 변해 일곱이 되고,

일곱이 변해 아홉이 된다.

아홉 번 변한 것을 究라 한다. 


究는 구멍혈 穴와 아홉 九로 되어 있다.


그 다음 말씀을 좀 더 쫓아볼까?


乃復變而為一。一者,形變之始也。清輕者上為天,濁重者下為地,沖和氣者為人;故天地含精,萬物化生。


이윽고 다시 변해 하나로 돌아간다.

하나는 변화의 시초요, 맑고 가벼운 것은 하늘로 올라가고,

탁하고 무거운 것은 땅으로 내려간다.

중간 기운의 것은 사람이 된다.

그런즉 천지는 精을 함장하고, 

만물을 생기게 한다.


현대인은 디지털 세계로 진입하여 살아들 가고 있다.

디지털은 숫자를 세며 세상의 구조를 구축해나간다.

1, 2, 22, 23, 24, 25, 26 ...

이 숫자 놀음은 밤을 패고 부절하니 이어진다.


낙동강 수막재배업자들이 판 굴뿐이 아니다.

온 인류가 판 굴은 이미 究를 넘어 만에 이르고 있다.



復變而為一


열자는 九가 변하면 一로 되돌아간다 하였다.

이 말은 새로운 시작을 뜻하기도 하지만,

세상의 종말을 이야기하고도 있는 것이다.

새로운 시작은 지금 세상이 망해야 오는 것이니까.

헌데, 지금은 百, 千, 萬을 넘어 서고 있다.


물론 九는,

究,窮也。임이라,

구극(究極)의 극한을 상징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시 묻고자 한다.

과연 그 극한은 어디쯤에 있는가?

지금 우리는 어느 단계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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