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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낫츠로 이 길을 떠나가나

소요유 : 2019. 8. 5. 15:17


무슨 낫츠로 이 길을 떠나가나


내가 사람을 평가하는 한 가지 척도가 있다.


가령, 적군에게 쫓기고 있는데,

혼자 살겠다고, 남을 버리고 도망을 가고도 남을 위인이라든가,

일제 강점기 때, 왜인들에게 들러붙어,

그들이 던져주는 단물 빨아 먹으며,

동포를 핍박하고, 서슴지 않고 저들의 주구(走狗) 노릇을 자청할 만한 자가 있을 것이다.


이게 평온무사한 일상에서는,

비상 상황이 닥치지 않아, 재현이 되지 않았은즉, 

그의 본심이 확인되지 않고 은폐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헌즉,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갈 수도 있다.


(※ 참고 글 : ☞ 비상지공(非常之功)

                    ☞ 경중(輕重)

                    ☞ 일구견인심(日久見人心)

                    .....)


하지만,

나는 전부터 이러한 평가 척도에 따라,

평소 의심스런 자를 유심히 관찰하곤 하였다.


아닌 게가 아니라,

이런 자들은 위험에 처하였거나,

제 이해를 시험하는 크리티칼한 상황이 닥치면,

아낌없이 제 본색을 드러내며,

좌고우면 돌보지 않고, 제 일에 종사하였다.


이번 왜인들이 저지른 폭거를 접하면서,

나는 구한말의 시대 상황에 작금의 현실을 대비하며,

오늘을 점검하고 있다.


이 간단치 않은 사태에 접하며,

연신 일본을 변호하며, 그들의 샅을 핥아대는 족속들, 

그리고 교묘한 언술로, 아닌 척 꾸미지만, 

결국은 왜인들 앞에서 요령(搖鈴)을 연신 딸랑이는 일단의 군상들을 본다.


한말 때,

바로 이완용은 바로 이런 인간 유형의 정점에 서있다.

보신(保身)에 급급한 기회주의자들의 전형을 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09년 벨기에 레오폴 2세의 명동성당 추도미사에 참석 차,

길을 떠났던 이완용은, 성당 정문 근처에서, 

군밤장수로 변장한 이재명(李在明)의 기습으로 쓰러진다.

만고 매국노 이완용은 죽지 않고 살아났지만,

이재명의 의기는 하늘을 찔렀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고대 죽어도,

이재명과 같은 이를 본받고,

그런 이와 사귈 일이다.


이완용이 죽자,

그에 대한 논설이 동아일보에 실렸다.

이것은 나중에 일제의 검열에 따라 삭제되었다.


“그도 갓다. 그도 필경 붓들려갔다. 보호순사의 겹겹 파수와 금성철벽의 견고한 엄호도 저승차사의 달려듬 한아는(하나는) 어찌하지를 못하였으며~ 누가 팔지 못할 것을 팔아서 능히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 자냐.~ 살아서 누린 것이 얼마나 대단하엿든지 이제부터는 받을 일, 이것이 진실로 기막히지 아니하랴. ~어허! 부둥켰든 그 재물은 그만하면 내노핫지(내놓지)! 앙랄(악랄)하든 이 책벌을 인제부터는 영원히 바다야지(받아야지)!”


(출처 : 동아일보 이완용 사망 보도)


친일파들과 한데 어울려, 

자신들만의 울을 치고,

나라와 시민들을 속이고,

나라라도 팔아재낄 태세로, 

일신의 안일을 위해 

요설을 펴고 있는 저들.


‘구문공신(口文功臣) 이완용은 염라국에 입적하였으니, 염라국의 장래가, 가려(可慮)’


이완용이 죽자 그를 두고 평한 신문기사를 저들에게 다시 들려주고 싶다.


이 내용인즉슨, 구문 받고 나라를 팔아재낀 이완용을 조롱한 것이라,

염라국에 가서도 이완용이 제 손에 익은 재주를 부려 염라국을 팔아재낄 것을 염려한 것이다.

(※ 口文: 흥정을 붙여 주고받는 돈)


이 땅엔 친일파들이 대명천지 밝은 세상에서,

아직도 득세하여 갖은 요설을 뱉어내고 있다.

해방 후, 저들의 과오를 단죄하지 않은 후과로,

이리 더러운 짓거리가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미처 척결하지 못한 역사의 오물 잔존분자들을 잘 가려 볼 기회가 온 것이다.

아울러 자신도 역시 이 냉정한 평가의 재단(齋壇)에 올려두고 살필 일이다.

나는 과연 자신의 이해와 처지에 구속되어,

역사와 민족을 저버리고 있지나 않은가?

스스로를 엄정하게 평가해 볼 일이다.


대저, 재단이란 거기 올려진 희생양이 아니라,

정작은 죄 많은 자신을 눕혀야 하는 법.

거울로 남을 비추는 것도 좋지만,

정작은 자신을 먼저 비출 일이다.

업경대(業鏡臺)는 그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음이다.


불교엔 업경(業鏡)이란 거울이 있다.

이를 얼경(孽鏡)이라고도 하는데, 그 뜻은 거의 같다.


죽어 염라국에 들면,

이 거울에 지난 날 살아생전 지은 업이 모두 거울에 비춘다 하였다.


十者訟習交諠發於藏覆。如是故有鑒見照燭。如於日中不能藏影。故有惡友業鏡

火珠披露宿業對驗諸事。是故十方一切如來。色目覆藏同名陰賊。菩薩觀覆如戴高山

覆於巨海。云何六報。阿難。一切眾生六識造業。所招惡報從六根出。云何惡報從六

根出。一者見報招引惡果。此見業交則臨終時。先見猛火滿十方界。亡者神識飛墜乘

煙。入無間獄發明二相

(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등불에 비춰 환히 보듯,

또한 햇빛에 그림자를 감출 수 없듯이,

갖가지 지은 악업이 피로(披露), 즉 낱낱이 파헤쳐져 노출되니,

이를 업경(業鏡) 화주(火珠)라 한다.

여기 화주란 환히 모든 것을 밝히 비추는 구슬이란 뜻이다.

(※ 火珠 - 舊唐書·南蠻西南蠻傳·林邑

貞觀初,遣使貢馴犀。四年,其王范頭黎遣使獻火珠,大如雞卵,圓白皎潔,光照數尺,狀如水精,正午向日。以艾蒸之,即火燃。)


본문 가운데 피로(披露)란 말이 등장하는데,

이 말 뜻은 내가 예전에 자세히 밝힌 적이 있다.


그 중에서 피로연(披露宴)이란 말만 다시 음미함으로써,

피로란 뜻의 이해를 보다 확실히 하고자 한다.


이게 얼핏 잘 헤아려지지 않는 조어인 듯 보인다.

무엇을 드러내 보이는 연회인가 말이다.

사전적인 뜻은 “기쁜 일을 피로(披露)하기 위해 베푸는 연회”라고 한다.

기쁜 일이 있는 사람으로서는 홀라당 다 드러내놓고 잔치 벌일 만하다 하겠다.


남의 기쁜 일을 함께 축하해준다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노릇이다.

그러나, 거기 참예(參預)한 사람 모두 그럴까?

개중엔 낯 세우려고 억지로 참석한 이도 있을 것이다.

한참 부어라, 자셔라 하며 즐긴 뒷끝,

저들이 먹다 흘린 무시루떡 고물이라도 얻어먹을까 고개를 디민이도 있을 것이다.


한편, 휴일에 남의 잔치에 동원된 이들에겐 後次로 이어지는

피로연(披露宴)은 피로연(疲勞宴)이 되기 십상이다.


업경 역시 지난날을 모두 까발려 놓고 벌을 주려 함이니,

죄 많은 이들에겐 여간 피로한 일이 아니리라.


야간에 만난 호랑이 눈은,

마치 화등잔 같아 활활 타오르며,

나그네를 겁박하며 두려움의 구덩이로 몰아간다.


마찬가지로,

이번 왜국인들이 벌인 야비한 짓거리,

또한, 이를 틈타 다시 구문을 챙기려는 친일파 도당들,

그리고, 쉽게 자신의 이해에 따라, 양심을 파는 어떤 그대 당신들.


산속에서 만난 호랑이 눈보다,

몇 천만 곱은 더 무서운 업경이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말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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