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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ⅱ

소요유 : 2019. 11. 9. 10:19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ⅱ


내가 어느 날, 일일시호일이란 말을 뱉어내었더니,

이를 듣던 한 분이 응대를 한다.


혹, 이 말을 모르는 이가 있다면,

마침 내가 전에 써두었던 글이 여기에 있다.

(※ 참고 글 : ☞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헌데, 그 뜻을 빗겨 새길까 염려가 된다.

그는 하루하루를 그저 즐겁게 보내자는 정도로 여기고 있다.

이리되면, 운문(雲門)의 뜻과는 천리를 격(隔)하여 떨어져 있다 하겠다.

하여, 여기 잠깐 살펴보려고 한다. 


관세음보살은 그저 피흉추길(避凶趨吉)을 위해 비는 대상이 아니다.

당신 자신은 아마 세상에서 제일 바쁘실 것이다.

천수천안(千手千眼)

손도 천, 눈도 천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중생들을 환난구휼하시려면 천만도 부족하고 몇천억도 모자랄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시며 피를 흘리시듯, 관음은 슬픔으로 진종일 바쁘시다.


절집 앞 사천왕은 마찬가지로 중생을 향해 눈을 부릅뜨며 분노하시고 계시다.

예수께서 성전을 휩쓸어버리시듯 사천왕은 분노를 일으키신다.


만약 중생 하나 있어,

매일 매일을 웃으며 호일을 맞이하고 있다면,

이는 모두 예수의 사랑, 관음의 자비 공덕 때문일 것이다.


그런즉 호일이란 언제나 슬픔과 분노를 전제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한 사람이 있어 예수와 관음을 진정 따르고 사랑한다면,

진종일 호일이 아니라 365일 매양 슬픔과 분노를 여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예수나 관음은 슬픔과 분노와 함께 매일을 맞으시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이를 저들이 맞는 호일의 양식(樣式)이라고 본다.


아직 한참 부족하지만, 때로,

기실 슬픔과 분노를 일으키는 날 나는 하루가 충실해지며 보람을 느끼곤 한다.

진정.


외면하지 않고,

남의 아픔에 슬퍼하고, 불의에 분노를 일으키고 있음은,

곧 저 예수나 관음의 역사에 동참하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아니 이런 행위자를 이름하여 관음이라 칭하는 것일 것이다.

나 밖에 별도로 관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럼으로써 곧 관음이 된다.


헌즉 호일이란,

슬픔, 분노, 그리고 기쁨.

이 삼박자가 제대로 맞아 들어갈 때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호일이란 그저 마음이 편한 상태가 아니라,

예수, 관음의 역사 현장을 내가 직접 온전히 경험하는 날일 것이다.

이를 불교 용어론 증득(證得)이라고 한다.

슬픔과 분노를 ecstasy, 망아(忘我)의 경지까지 이끌어내는,

그런 충일한 상태를 호일이라 부르고 싶다.


자신의 삶을 잘 돌아보라.

불의를 보고도 비겁하게 외면하고 돌아가지 않았던가?

일신의 안위를 위해, 현장을 늘 떠나고 있는 우리들.


명철보신(明哲保身)


명심보감(明心寶鑑)을 그래서 나는 깊이 신뢰하지 않는다.

그럴싸한 말을 여기저기서 긁어모아,

깊은 통찰을 말하고 있는 양 싶지만,

내가 보기엔 반수 이상이,

일신의 안녕을 위해,

어찌 세상과 타협하고,

숨을 곳을 찾는가 하는 얄팍한 술수를 다루고 있다.


게다가, 토막 친 글들, 그 오합지졸들의 행진을 보고 있자면,

때때로 욕지기가 일기도 한다.

이런 생각에 대하여는 내가 명심보감을 두고,

진작에 몇 편의 글을 쓴 폭이다.


이것이 어찌 관음보살의 행과 같은가?

관음은 환난에 빠진 이들이, 

그의 명호를 부르면,

물, 불을 가리지 않고,

손을 내어 잡아주시지 않던가?


밀교에 보면 부동명왕(不動明王)이라고 계신 데,

이 부처는 분노상을 하고 있다.

위세로써 항마(降魔)하는 것이다.

이 불위(佛位)를 가리키는 이칭(異稱)들

大力, 大欲, 不動, 忿怒 ...

따위는 실상은 모두 하나인 것이다.


일전에 말하였듯, 

대신(大信), 대의(大疑), 대분(大憤) 이게 함께 하듯 말이다.


(金剛吼菩薩)


나의 글 金剛吼菩薩

여기 후(吼)가 노호(怒號)하여 울부짖는 모습을 그린 것인데,

이는 곧 위노(威怒)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가 위엄으로써 노하지 않으면 악을 조복(調伏)시킬 수 없다.


한비자는 구체적 실천 현실 속에서,

악을 법으로써 의율(擬律)하고자 한다.

한비자는 바로 忿怒明王, 金剛吼菩薩인 것이다.


세인들이 한비자를 두고,

동양의 마키아벨리니 하면서 저이를 능멸하려드나,

이는 배움이 일천하기 때문에 야살을 부리며 해망(駭妄)을 떨고들 있을 뿐이다.


성전정화사건 당시의 예수를 두고서는,

나는 바로 금강후보살을 떠올린다.

물론 기독교도들의 생각은 다를 터이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사설이 길어졌다.


日日是好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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