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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카

소요유 : 2020. 4. 29. 11:50


셀카


사람들은 왜 그리 사진 찍기에 몰입하는가?


관광, 여행을 가서,

풍경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연신 사진 찍는데 몰두하여,

정작 마음으로 감흥을 길어 올릴 틈이 없다.


음식을 앞에 두고도,

미각을 충족시키는 일에 앞서,

사진 찍는 일을 더 서두른다.


모두가 기자는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인상(印象)은 육근(六根)을 통해 심상(心像)이 드리워진다.

굳이 차가운 촬상관(撮像管)내지는 CCD(Charge-Couple Device)에 의지할 일이 아니다.

심상에 충실할 일이다.

이야말로 진실로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거니와,

세상을, 사물을 옳게 보는 첫걸음이 된다.

(※ 참고 글 : ‘추억 만들기’ 유감.)


나는 12년 전에 디카질을 고발한 적이 있다.

(※ 참고 글 : ☞ 디카는 총구다.)

(※ 참고 글 : ☞ 밑줄 긋기, 점사(點射))


그 때는 디카였는데,

그 사이 세상이 변하여,

디지털 카메라가 아니라 스마트폰이 이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당시는 원치도 않은 채, 남의 피사체로 전락하고 마는 일을 걱정하였다.

헌데, 이제는 셀카(selfy, selfie)로 진화하여,

스스로를 기꺼이 피사체로 등장시키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왜, 사람들은 사진 찍는 일에 헌신하여 종사하고 있으며,

특히 자신을 찍어 sns에 올려 드러내는 일에 집중하고 있는가?


셀카는 자신감의 발로(發露)이자,

이로써, sns에 올려 타자와의 관계를 개선하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주목도를 높이려, 남들과 경쟁한다.

급기야, 과대 포장으로 자신을 꾸미며,

도를 넘는 만족을 구한다.


현실의 좌절과 실패를 보상받기 위해,

셀카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경우도 많다.

셀카 안에서는 멋지게 웃고 있지만,

가슴 속에서는 우울한 비가 내린다.


至人無己

至人無為

至人不聞

至人無夢


지인(至人) 즉 지극한 경지에 이른 이는,

자기 자신을 의식하지 않으며,

작위로 일을 짓지 아니하며,

외물에 귀를 기우리지 않으며,

꿈을 꾸지 않는다 하였음이다.


무당은 영매(靈媒)인지라,

귀신과 사람들을 중개하여야 한다.

그런즉, 언제나 꿈이란 조각배를 타고, 

연신 이들 간 사연을 배달한다.


연예인 역시 매 한가지다.

자신이 아닌 사람이 되어,

극중 인격을 연출하여야 한다.

그러함이니 꿈을 많이 꾸지 않을 수 없다.


(※ 하기에, 예로부터, 사회는 이들을 천시하고, 소외시켰다.

외물에 매여, 자신을 돌볼 여가가 없다면,

자신의 내적 충실을 기하기 어렵다. 

하지만 오늘 날엔, 별이라 부르며, 뭇사람이 꽃다발 엮어 바치기 바쁜 세상이 되었다.

아마 이는 저들이 외려 일반인의 삶보다 더 그 역할에 충실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가령, 극중 역을 그들은 현실을 살아가는 일반인들보다 더 리얼하게 재현하고 있으니,

저들이야말로 천, 만의 VR을 모두 현실태로 맞고 있는 것이다.

이를 현대인들은 재평가하고 있는 게 아닌가?)


셀카질 역시,

자신을 꾸며가며 타자화하게 되면,

다중 인격 사이를 오가며,

꿈놀이를 즐기게 된다.


그러함이니,

이들은 지인(至人)과 정반대의 삶을 산다.


有己

有為

多聞

有夢


VR(virtual reality)


이를 흔히 가상현실이라 번역한다.

이 번역은 충분치 않다.

가상(假想)이라 하면, 

사실이 아닌 가정, 가짜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virtual이란 그보다는 가능성(potency)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가령 주사위를 던졌을 때, 1에서 6사이에 있는 어떠한 숫자가 나올 것이다.

현실에선 그 중 하나가 나타난다.

하지만, 던지기 전, 1에서 6사이에 있는 숫자들은,

실현 가능성을 보지(保持)한다.

그러함이니, 가능성을 가진 이들, 즉 그 가능태를 가짜라 할 수는 없다.


1에서 6사이의 그 어떠한 숫자도 차별없이 efficacy를 내어,

주사위를 던진 이를 행복의 구름 다리 위로 올릴 수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현실에선 그 중 하나만 구체화된다.

가능태와 실현태는 운명적으로 갈린다.

나머지는 봄바람에 미처 피지도 못하고 스러지는 꽃잎처럼 우리를 떠나간다.


virtual을 그런 가능성, 효과성(efficacy)으로 이해를 하면,

VR이란 의미를 좀 더 옳게 확충할 수 있다.


셀카질은 VR처럼 가능성을, 아니 그러리란 믿음을, 

사진 안으로 끌어들여 자작으로 현실화(≠현실)한다.

하지만, 곧잘 거기 과장된 몸짓이 따르고,

꾸민 표정으로 미화되며,

포토샾으로 왜곡되기도 한다.

사진 상으로 현실화된 그 세상은,

이제야말로 가상(假想)이다.


진짜배기 현실은, 그 가상과 유리되어 있다.

이 양자 사이에 놓여진 다리의 거리는,

셀카질에 몰두할수록 더욱 늘어난다.

그리고 흔들거리는 이 불안의 간격을 메우려고,

셀카질은 더욱 기괴한 모습으로 진화하지 않을 수 없다.


至人無己

至人無為

至人不聞

至人無夢


지인은 꿈을 꾸지 않는다.

불안을 모른다.


그러기에,

만약 지인(至人)이 셀카질을 한다면,

거침없이, 그 누구보다도 멋진 VR의 세계를 창출할 것이다.

하지만, 無己, 無夢이기에, 그에 속박되지 않는다.

이를 불매(不昧)라 한다.

마음껏 노닐되,

그는 불안을 경험하지 않는다.

이 경지를 소요유(逍遙遊)라 한다.


여기,

불매(不昧)란,

지인이기에 반드시 셀카질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하고, 아니하고에 매이지 않으며,

한다한들, 그 안에 매몰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 참고 글 : ☞ 백장야호(百丈野狐))


부처는 천상유아독존(天上唯我獨尊)이라 외쳤다.

하지만, narcissist는 자기애(self love)에 빠졌을 뿐,

객관적 수준에 비춰 자신을 평가하지 않는다.

하기에 이들은 타자와의 만남에서,

고단수인 경우 impression management에 능숙하다.

때론, 상대를 무시하고, 자신만의 동굴 안에 갇혀,

스스로 지은 환상에 도취되기도 한다.

나르키소스(Narcissus)는 연못에 비친 제 모습에 빠져,

종내는 파멸하고 만다.

셀카족들 역시 스마트폰이란 연못에 비친,

자신에 구애를 하는 나르키소스들이다.

가엽다.



백설공주 그림 이야기에서,

왕비는 거울 앞에서 아름다운 사람에 대해 묻는다.


‘왕비마마보다 아름다운 사람은 없습니다.’


(출처 : utube)


셀카족 역시 왕비가 되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이가 누구냐며 폰에 대고 매양 묻는다.


하지만, 백설공주가 자라자,

거울의 대답은 달라진다.


‘백설공주가 더 아름답습니다.’


왕비와 부처가 다른 점은,

나르키소스(Narcissus)나 왕비는 모두 연못이나 거울에 대고,

자신의 미모를 확인하나,

부처는 외물에 기대지 않고 홀로 독존(獨尊)함을 안다.


舉世皆濁我獨清,衆人皆醉我獨醒,...


이는 마치 굴원처럼,

獨清, 獨醒

홀로 맑고, 깨어있음을 아는 것과 같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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