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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理解)와 이해(利害)

소요유 : 2020. 8. 20. 11:32


이해(理解)와 이해(利害)


어느 일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그 소이연(所以然)을 알고 싶어진다.


세상엔 수없이 많은 사람이 있다.

이들 모두는 각자의 생각이 다르고, 나와 똑같을 수 없다.

하기에 저 일에 앞서, 극도로 긴장하며, 객관성을 유지하며,

사태를 분석하려고 노력하여야 사물에 대한 바른 이해에 도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러함인데도, 오리무중이라, 도무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을 때가 적지 않다.

아무리 이성을 벼려, 냉정하게 사태를, 그리고 그를 이해(理解)하려고 하여도,

납득할 근거를 찾아내지 못할 때가 있다.


가령 전광훈의 발호(跋扈)를 두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행태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여, 급기야는, 광인이라든가, 몹쓸 인간으로 치부하며,

걸쭉하게 욕설을 퍼부으며, 화를 삭이는 게 다이다.

그 밖에 더는 무엇을 할 방도가 없는 것이다.


理解란 무엇인가?

사물의 이치를 풀어내어 해석하고 요득(了得)하는 일이다.

반면, 利害는 이치와는 상관없이,

이익이 되느냐, 손해가 되느냐만이 문제의 대상이 된다.

이 자리, 사물의 이치나 사람 간의 도리가 아니라,

나의 욕망, 그리고 그 충족만이 중요 관심사가 된다. 


이제, 나의 옛글의 한 토막을 빌어,

理와 利의 차이를 더 살펴보자.


수리공학(水利工學)이라 할 때는 水利라고 쓰니,

이는 水理에 비해서는 물을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다르다. 

水利인즉, 물(水)을 그저 단순한 물적객체로 대하며 인간을 위한,

요익(饒益)을 꾀하고자 하는 수단, 방편적인 인식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수리학(水理學, 水力學, hydraulics)이라야,

비로소 순수한 물의 본성을 연구하려는 의지를 읽게 된다.


물리학(物理學)에서는 수리(水利)의 예에서처럼 물리(物理)라는 쓰임이 애초부터 없다.

이론물리학(理論物理學)이 아닌 응용물리학(應用物理學)일지라도

수리공학(水利工學)처럼 응용물리학(應用物利學)이라 하지 않는다.

이런 쓰임말로 미루어 본시 물리학이 점잖은 학문임을 짐작한다면, 너무 지나친 억탁일까?


나름대로 짐작하건데 수리(水利)라는 말의 쓰임이,

물리(物理)처럼 부자연스럽지 않고 널리 쓰이게 된 까닭은 이러한 것이 아닐까 싶다.

즉, 고대부터 치산치수는 삶의 중요한 과업(課業)이자 역사(役事)이었으니,

이는 곧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는 禹王의 9년 치수의 예에서 보듯이 물이란 다스리면,

인간에게 이로우나, 그렇지 못하면 홍수가 나서 모두 휩쓸려 가고 만다.

하니 물은 가장 중요한 이해(利害)의 대상으로 인간에게 인식되었음을 의미한다.


바로 어제 이 땅에선,

수리(水利)를 앞장 세워 온 국토를 유린하고자 욕심이 등천하던 시절이 있었다.

우왕 시절이야, 장강의 범람을 막지 못하면 생존 자체가 위협을 당했다.

당시엔 수방(水防)을 통해 수리(水利)를 도모하지 않을 수 없는 긴박한 사정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온 천하가 모리(謀利)의 대상일 뿐이다.

자연이 파괴되든, 인간의 심성이 이지러지든 그저 돈만 벌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차고 넘친다.

참으로 경박스런 세태다.


수리(水利)인즉 우왕의 홍익(弘益)이 아니라,

그저 온 나라 사람이 사리(私利) 도모하기에 급급, 사리(邪理)가 횡행하고 있음이다.

시랑(豺狼, 승냥이와 이리)인들 차마 이리 사나우랴.

사갈(蛇蝎, 뱀과 전갈)이란들 저리 독할손가?

하기사 시랑, 사갈이 본디 제 성품이 어찌 흉하리요,

이 모두 인간이 지어낸 말에 불과한즉,

정작은 인간의 본성이 그러한 것임이랴.


각설하고,

본론으로 바로 들어간다.


어느 사태에 임하여,

자신의 머리, 위치에선, 도저히 이해(理解)할 수 없을 때,

이치를 따질 생각을 돌려,

상대의 이해(利害) 관계를 더듬고, 헤집어 보면,

아연 구름 벗긴 햇살처럼 밝아 보인다.


전광훈이 누군가에게 분노하고, 신도들을 격앙시켜 이끈다 할 때,

대개의 상식인에겐 저것이 그저 몹쓸 짓으로만 보이는가?

실상은 그게 아닐 것이다.

저들이라고 바보 멍청이나 광인은 아닌 것이다.


저들은 저것을 빌러 무엇을 꾀하고 있는가?

저들의 이해(利害)는 과연 무엇인가?

이런 물음을 던지면

이제야, 저들을 바로 이해(理解)할 수 있는 교두보가 확보된다.


2006년 재개발지역으로 지정된 장위10구역에 터를 잡고 있는 사랑제일교회는 그간 ‘알박기’ 논란을 빚어왔다. 재개발로 이주가 시작된 뒤 주민의 90% 이상이 지역을 떠났으나 교회는 서울시가 산정한 감정가 82억원의 6배가 넘는 536억원을 보상해달라고 요구하며 버텨왔기 때문이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58408.html#csidx2b8131540f7145185a6cf053bb8a342)


세상에 별별 일들이 다 벌어진다.

하지만 일, 사태의 근거는 거룩한 의거(義擧)라기보다,

사적 이해(利害)에 터할 때가 더 많다.


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


“군자는 의(義)를 밝히고,

소인은 이(利)를 밝힌다.”


세상에 군자는 드물고, 소인은 많은 법.


때문에 사태를 이해(理解)하려 할진대,

그 이치를 궁구하기보다,

차라리 이해(利害)에 기초하여 밟아 들어가면,

거기 숨은 곡절, 시비를 알아챌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세상을 잘 이해하려면,

理나, 義가 아니라, 利에 의지함이 더 나은 성과를 내곤 한다.


이해득실(利害得失)의 세계에 거(居)하는 이들에겐 멈춤이란 없다.

욕망의 점화식에 불붙인 순간, 그 타들어감이 쉬이 그칠 것을 기대할 수 없다.


이게 시비곡직(是非曲直)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이해득실(利害得失)이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염치 접고 뻔뻔하게 살아가는 모습의 실상이다.


목사는 연봇돈을 챙길 수 있고,

신도들은 천국행 티켓을 독점적으로 향유할 수 있다.


그러면 이들의 궁합은 우선 당장은 찰떡보다 더 차지게 된다.

저들 기대란,

orgasm의 절정보다 더 달콤하고,

접신(接神)의 ecstasy보다 더 황홀하다.


남이 어떻게 되든지 알 바 없다.

자신의 욕망은 끈 떨어진 풍선처럼,

저 푸른 창공을 향하여 마냥 날아 올라간다.

이 얼마나 벅찬 일인가? 


그 누가 있어,

말릴 수 있으랴?


이해득실(利害得失)은 사정이 변함에 따라 언제고 뒤집힐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시비곡직(是非曲直)은 언제 어디서 간에 그 내용이 바뀔 까닭이 없다.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를 뿐이다.

시간에 따라, 여건에 따라, 옳고 그름이 바뀐다면,

이는 애저녁에 옳다거나 그른 것이 아니라,

잘못 보았을 뿐이리라.

반복하거니와,

이해득실(利害得失)은 찰나간 짬(暫)에도 108번 변개(變改)가 일쑤이나,

시비곡직(是非曲直)은 오래도록(久) 여전한 것임이라.


어느 날, 이런 이해관계의 기반이 흐뜨러지고,

바위처럼 단단해보였던 결속력이 와해되면,

돌 집어내자 흩어지는 가재 때처럼 산지사방으로 흩어질 것이다.


다만, 문제는 망상이다.


망상의 접착력은 오공본드보다 더 차지고,

고황에 든 병처럼 깊은 것.

어느 명의가 있어,

저들 병을 고칠 것인가?

죽어야 치료가 될런가?


아,

삶이란 얼마나 미망인가?

미망 속에 갇혀 사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냥 미망의 당체일 뿐인 것을.


是故君子戒慎乎其所不睹,恐懼乎其所不聞。莫見乎隱,莫顯乎微。故君子慎其獨也。

(中庸)


“그러므로, 군자는,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 경계하고,

남이 듣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 두려워해야 한다. 

숨겨진 것처럼 잘 드러나는 것은 없으며

미세한 것처럼 잘 나타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홀로 있을 때도 삼간다.”


莫見乎隱,莫顯乎微。

항차 이러함인데,

천지사방에, 꽹과리 치고, 나팔 불면, 나대는 저들의 속셈을 어찌 모를 수 있으랴?


정리한다.


이성적으로 판단할 때,

누군가의 주장이 납득이 되지 않을 경우,

백이면 백, 그것은 저들 자신의 이해에 관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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