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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인은 없다

소요유 : 2020. 10. 6. 11:37


자연인은 없다.


小隱隱陵藪,大隱隱朝市。

(王康琚)


‘소은은 초야에 숨고, 대은은 조시에 숨는다.’


오늘은 이 말을 우선 앞세우고,

이야기를 펴고자 한다.


‘자연인’ 운운의 영상 프로그램이 있다.

이것들을 보면 풀숲, 무인도 등에 들어 사는 이들이 소개되고 있다.

얼핏 느끼기에, 자연에 깃들어 사니 자연인이라 이를 만하다.


헌데, 조금만 주의를 기우려 보면,

저 영상 내용이 과연,

자연 그리고 자연인을 제대로 그려내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하나도 아니고, 둘, 셋, 넷 ...

수편의 영상마다 그려지는 포맷이 거의 흡사하다.

영상이 어찌 만들어지는 모르는 이라 하더라도,

저기엔 꾸밈이 따르고, 밑자락에 연출이 펼쳐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담 프로’에 나오는 배우들을 두고는

박남현이 영상에서 이리 말했다.


‘배우들은 다 가면 쓰고 사는 거에요.’



(utube, 연기자 박남현이 말하는 배우이야기 15:19/17:57)


그가 말하는 취의는 영상을 보면 바로 확인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대담이 기획에 따라 연출되고,

깎고, 붙이고, 가리는 등의 손질이 가해진다는 것이리라.

그런즉, 정작 그 배우의 진면목은 가려지고,

분단장하고, 꾸며진 가짜가 송출되고 마는 것이다.

대중은 이런 상품을 즐겨 구매하고, 웃으며 소비한다.


연출자 입장에선,

이런 상품이 잘 팔리고,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는데 유리하니,

저 짓을 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자리는 자연인 연출을 하는 이들을 나무라고자 함이 아니다.

외려 저기 출연한 자연인이야말로, 저기 출연함으로써,

자신이 자연인이 아니라는 것을 만천하에 폭로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함이다.


카메라를 들이대면,

대개는 상대를 의식하게 된다.

그 영상을 소비하는 시청자를 고려,

무대를 설치하고, 현실을 왜곡시키며,

적절한 상황, 장면을 꾸며 만들게 된다.


무대 배우라면,

그게 업이니, 각본대로,

분당장하고, 가상현실을 그려 내야 한다.

하니, 그들의 꾸밈을 나무랄 일은 아니다.


하지만, 자연인이란 타이틀을 들고 나선 개인 주체가,

그리고 대담프로에 나타난 개별 인격 배우가,

자신의 본 모습을 적당히 꾸며,

무대 연출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다면, 꼭두각시가 되고 마는 것이다.


예전 오마이뉴스에 시민기자로 활동하던 이가 하나 있었다.

그가 제법 알려지자 급기야 TV에까지 나오게 되었다.

헌데,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절필을 선언하고, TV출연을 거절하였다.

왜인고 하니, TV엔 자신의 본모습과 다른 내용이 그려지고 있었음이다.

게다가 가만히 돌아다보니, 자기가 쓰는 글에도 거짓이 숨어들고,

자신이 스스로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데에 깨우침이 미치게 되었다.

하여 과감히 문을 닫아걸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해괴한 일이 벌어졌음으니,

저 문제의 그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매체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것 마치 담배나 마약처럼 중독이 된 것이더냐?


유튜브도 이젠 조금씩 식상이 되어간다.

사적 생활을 기록하는 영상들,

초기의 순수함과 열정이 다하고, 헤지자,

이젠 역력히 영상 제작, 송출에 목을 매어,

억지와 과장된 연출이 질펀해지기 시작한다.

게다가 글 제목은 객손을 자극하고, 제 집 안뜰로 끌어들이기 위한,

요란한 표정과 손짓으로 포장되고 만다.


네 이녀석들아,
주막집 주기(酒旗)도 그저 소박하니 비뚤비뚤 갈겨 쓴 酒자 하나가 다일 뿐이다.

다만, 그 안에 들어가 앉으면, 술이 달고, 교태가 넘치는 주모(酒母)가 나타날 뿐이다.

너희들은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리라.


아아, 그러함이니,

내가 늘 말하지 않았던가?

‘소통’ 운운하는 것은 죄다 엉터리라고.

기실 소통을 구실로, 꾸며진 자신을 팔고,

무엇인가 도모하고자 하는 바를 선전하고자 함이 대다수가 아니던가?


박남현은 앞서의 영상에서 말한다.

대담 프로에서 배우들의 실제 모습을 그리고 싶다 하였다.

‘그대로 그 모습을 다 내보내고 싶거든.’

바로 이런 태도, 문제의식이 귀하다 생각한다.


‘대담 프로에 나오지 말라,

자연인 프로가 가짜이니 가치가 없다.’


나는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 아니다.


진짜배기 자연인은,

숲속에, 아니 그게 어디가 되었든,

어딘가에 숨어 계시오되,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게 아닌가?

이런 문제의식을 가져봤으면 하는 것이다.


小隱隱陵藪,大隱隱朝市。


‘소은은 초야에 숨고, 대은은 조시에 숨는다.’


왕강거(王康琚)는 서진(西晋) 사람이다.

그의 내력은 그다지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소개한 그의 시는 특별하다.


당시 사회가 혼란해지자,

정치적 입지를 잃은 이들은 은자(隱者)가 되곤 하였다.

하지만, 양두구육(羊頭狗肉)이라,

기실은 산야에 숨어들어,

때를 기다리며, 기회를 엿보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소위 죽림칠현도 대다수가 이런 이들이다.

이에 대하여는 내가 언젠가 다룬 적이 있다.

(※ 참고 글 : ☞ 찬종취전(鑽種取錢))


왕강거는 저런 따위의 가짜배기 은사(隱士)들의 행동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숲에 숨든, 아니든,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

다만 품은 심회(心懷)가 얼마나 심원(深遠)가 더 중요하다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인이라는 프로를 그저 오락 정도로 보고 소비하자고 하면,

그저 그리 할 일이다.

하지만, 자연인이란 그 뜻을 제대로 살피자면,

저것은 언어를 오용하고, 

자연인이란 본의를 외려 희화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의문을 가질 만하지 않은가?


中山公子牟謂瞻子曰:「身在江海之上,心居乎魏闕之下,奈何?」瞻子曰:「重生。重生則利輕。」中山公子牟曰:「雖知之,未能自勝也。」瞻子曰:「不能自勝則從,神無惡乎?不能自勝而強不從者,此之謂重傷。重傷之人,無壽類矣。」魏牟,萬乘之公子也,其隱巖穴也,難為於布衣之士,雖未至乎道,可謂有其意矣。

(莊子)


“중산의 공자 모가 첨자에게 말했다.


‘몸은 강과 바닷가에 살면서도,

마음은 위나라 궁궐 아래에 가 있으니, 어쩌면 좋겠습니까?’


첨자가 말했다.


‘삶을 중하게 여기십시오.

삶을 중히 여기면, 이익은 가볍게 느껴집니다.’


공자 모가 말했다.


‘비록 그것을 알고 있지만,

스스로를 이겨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첨자가 말했다.


‘스스로 이겨내지 못하겠거든, 그대로 따르시오.

그러면, 정신적으로 고뇌가 없을 것이오.

스스로 이겨내지 못하면서도, 억지로 마음을 따르지 않으면,

거듭 자신을 상하게 하다 이르는 것입니다.

거듭 자신을 손상케 하는 사람 중엔 오래 사는 이가 없습니다.’


위나라의 공자 모는 만승(萬乘)의 군자다.

따라서 그가 바위굴에 숨는데 있어,

포의지사(布衣之士)보다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비록 도에는 이르지 못했지만,그 뜻은 가지고 있었다 할 것이다.”


이것이 소위 심신분리설(身心分離說)이다.

하니까 몸 따로, 정신 따로,

제 처지나 형편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후대 당나라 시대에 오면,

심신합일설(身心合一說)이 등장하게 된다.

남종선(南宗禪)의 ‘平常心是道’처럼,

심신을 따로 나눌 게 없다.

비록 조시(朝市)에 살더라도, 도를 실답게 닦을 수 있음이라.


헌데, 백거이(白居易)에 이르면 또 다른 제3의 경계가 나타난다.

이름하여 이를 중은설(中隱說)이라 한다.

재미있지 않은가?


大隱住朝市,小隱入丘樊。丘樊太冷落,朝市太囂喧。不如作中隱,隱在留司官。


대은이 사는 조시라는 게 얼마나 시끄러운가?

똥물 튀고, 거짓과 위선이 질펀하지 않은가?

그 안에서 청정(清靜)하게 사는 것은 쉽지 않다.

한편 소은이 산다는 산림이라는 것도,

이것 여간 외롭고 쓸쓸한 것이 아니다.


하니까 백거이는 이리 읊고 있는 것이다.

즉 사관(司官)이 되어 여기 숨어 지낸다는 말이다.

사관은 부(府)의 낭중(郎中) 정도이니,

적당히 녹을 받고 살면서 포부를 펴고,

스스로를 격려하며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 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오늘날로 치면,

공무원이나, 선생님쯤 되겠다.


하기에 요즘 사람들은,

이 시험에 들려고, 기를 쓰고들 있지 않은가 말이다.


문재인은 인기에 영합하려는지,

내가 보기엔 반으로 줄여도 시원치 않을,

공무원 숫자를 팍팍 늘리고 있다.

이처럼 쉬운 일이 어디에 있는가?

그는 중은(中隱)을 늘리는데 열심이라,

백거이가 동무하자고 환생하겠음이다.

 

중은(中隱)이라.


시대의 흐름에 따라,

대은(大隱), 중은(中隱), 소은(小隱)이 등장하고 있다.


그대 당신은,

어디에 방점을 찍을 것인가?


삼세개공(三世皆空)이라 하였음인데,

점심(點心)이라,

과연 어디에 마음의 점을 찍을 것인가?


金剛經云。過去心不可得。現在心不可得。未來心不可得。上座欲點那箇心。


‘금강경에 이르길,

과거심은 얻을 수 없고,

현재심도 얻을 수 없고,

미래심도 얻을 수 없다. 하였는데,

스님은 어느 마음에 점을 찍으시렵니까?’


금강경엔,

길에서 만난 떡장수 할머니가,

금강경 책만 파던 덕산(德山)에게 내놓은 이런 물음이 나온다.


그런데, 과연,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

대은(大隱), 중은(中隱), 소은(小隱).


이런 나뉨이 성립이 되는가?


금강경만이 아니라, 반야부 전체를 읽었다면,

그 해답을 쉬이 찾을 수 있으리라.


아니면, 용수(龍樹)의 중관학파(中觀學派)를 따라가다 보면,

관념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외려 더 쉽게 깨우칠 수 있다.


저것은 공간, 시간을 실체로 규정하고,

나누려는데 문제 해결의 어려움이 있다.

마치 몽당 빗자루를 두고 도깨비인 양 맞붙잡고 씨름하는 것과 비슷하다.

존재와 시간.

이게 실체라 여기는 한,

더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스님네들이,

수 십 차례 안거를 해도,

화두 하나 꿰뚫지 못하고,

젊음을 석가에게 헌납하고 스러져가고 만다.

거지반 모두.


개중 깨달았다는 이들도,

말 잘하고, 꾸미기 잘하고, 후려치기 잘하는 가승(假僧)이기 일쑤다.


대은(大隱), 중은(中隱), 소은(小隱)

어느 하나의 깃발을 두고 흔들며, 

선전하는 이들에 속을 일이 아니다.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

어디 하나에 점심(點心), 점을 찍으라 대드는 저 노파의 멱살을 잡아,

땅바닥에 후려칠 일이다.


모두는 그대 당신을 속이려 나타난,

요물들일 뿐인 것을.


그 요물을 스승으로 만드는 것은,

당신 자신이다.

스승이 내게 와서 빛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정작은 내가 저들에게 그 의자를 만들어 앉힐 뿐인 것을.


과연,

自有人

자유인이 되고자 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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