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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학 소요(逍遙)

상학(相學) : 2020. 10. 21. 18:52


관상학 소요(逍遙)


눈알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막을 의학적으로는 공막(鞏膜, sclera)이라 부른다.

여기 공(鞏)을 흔히 굳고 단단하다는 뜻으로 새기는데,

이는 너무 일반적으로 알려진 글자 뜻에 구속된 이해라 하겠다.

鞏은 본디 가죽 테를 의미한다.

그러함이니, 이로써 물건을 묶는 역할을 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단단히 결속(結束)되어 탄탄해진다.

따라서 鞏을 두고 단순히 굳다고 새기는데 그치지 말고,

가죽 테를 연상하는 것이 그 뜻을 보다 옳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여담이지만, ‘공고(鞏固)히 하다’의 경우에도,

그저 단단하다는 뜻 정도로만 이해한다면, 좀 섭섭한 일이다.

바로 심상 가운데 가죽 테를 떠올리면,

이 뜻을 보다 입체적으로 새겨낼 수 있게 된다.

그러면 가령 군이 하나 있어 진지를 공고히 구축한다 할 때,

그 마음가짐은 물론이거니와, 

실제 진지도 가죽 테처럼 신축적이면서도 단단하니 지어낼 수 있을 것이다.


문자란 그저 거죽 뜻만 알면 족한 것이 아니라,

실로 이로써 마음속에 집을 짓는 것임이라.

하이데거는 이리 말했다.

“인간은 예술과 시 속에 존재의 집을 마련해야 한다. 언어는 곧 존재의 집이다.” 

이로써, 그가 가진 언어를 통한 인간 이해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각설(却說),

우리가 흔히 칭하는 눈알 중 동공(瞳孔)과 홍채(虹彩) 부분을 제외한,

소위 흰자위 부분을 두고도 공막이라고 부르곤 한다.

아래 사진을 보아서는 나는 이게 눈 전체를 둘러싼,

공막의 연장이기에 그러한 것으로 짐작된다.



(출처 : health24)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흰자위 부분을 두고 진행되는 바,

그 용어를 좀 더 알아보고 시작하련다.

흰자위, 흰동자를 한자어로는 白眼珠, 白眼球라 한다.


그런데, 은해정미(銀海精微)라 불리는 흥미로운 책이 있다.

여기선 흰동자를 두고 천곽(天廓)이라 부른다.

아, 이 말을 처음 대하자,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는다.

고인들은 어찌 이리도 사람을 놀라게 하는가?

하얗다 하여 흰자위, 까맣다고 까만 눈동자,

소경을 면하고 앞을 보는 이라면,

기껏 이 정도는 누구나 말할 수 있다.

헌데, 거기 느닷없이 하늘이 나오고, 곽이 나오니,

내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음인가?

고인들은 과시 좁은 인식을 넘어,

온 우주를 구름 타고,

자유자재로 노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五輪八廓 : 눈과 그 외부 조직을 나눈 방법론으로,

가령 八廓엔 天廓, 地廓, 風廓, 雷廓, 澤廓, 山廓, 火廓, 水廓이 있다.)


(출처 : 中의학백과)


이 책은 당(唐)의 손사막(孫思邈)이 지은 것으로,

눈에 대하여 논한 의서(醫書)이다.

참고로 은해정미(銀海精微)란 책 이름 중 은해(銀海)는 눈을 가리킨다.


아, 은해(銀海)란 또 얼마나 시적 감수성이 넘치는 표현인가?

연인의 눈을 두고 호수 운운하지 않던가?

은빛으로 빛나는 바다란 얼마나 우리 가슴을 흔드는가?

거기 그냥, 그 영원 속으로 퐁당 자맥질이라도 하고 싶지 않은가?

기실 은해란 도가(道家)에서 눈(眼睛)을 가리키는 말이다.

손사막은 본디 도가 출신인즉, 이리 눈을 지칭한 것이다.


손사막은 천금요방(千金要方), 천금익방(千金翼方)으로 유명한데,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성동(聖童)이라 불릴 정도였다.
노자, 장주를 논하기 즐겨했고, 음양, 술수에도 밝았다.

의술도 뛰어나 후대엔 그를 두고 손약왕(孫藥王)이라 부른다.

게다가 인품도 뛰어나, 의학도는 그를 지금도 존경하고 따른다.


나는 천금요방은 소싯적 읽은 적이 있지만,

오늘 글을 쓰기 위해, 은해정미란 책을 먼저 공부하여,

눈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자 노력하였다.


***


( 출처 : http://www.masterso.com)


(四白眼, 출처 : http://www.masterso.com)


사백안(四白眼)은 눈의 흰동자가 상하좌우 모두 밖으로 보이는 눈을 가리키는,

관상학 용어이다.

이런 눈은 기실 현실에선 쉽게 볼 수 없다.

사백안이라도, 눈을 크게 뜬다든가 할 때, 언뜻 나타나지, 

대개는 넷 중 세 부분이 보이는 삼백안이 훨씬 많다.

이에 대하여는 내가 몇 차에 이르도록 간간히 글을 쓴 적이 있다.

(※ 참고 글 : ☞ 신탈구개자사(神脫口開者死))


사백안을 지닌 이는,

전통적으로 심안(心眼)이 작고, 보복심(報復心)은 커서,

죄를 짓기 쉽다 하였다.

여자라면 소위 극부(克夫)라 하여 남편을 망치는 상이라 하였다.

相由心生라는 말이 있듯,

이런 상을 가진 이라면,

마음을 곱게 쓸 도리를 찾아, 

열심히 마음을 닦아야 한다고 이르고 있다.


전통적 관상학은 물론,

오늘날의 술사나 상학가들은,

사백안내지는 삼백안을 흉상(凶相)으로 단정하고 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한 치도 바뀌지 않고,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나는 상서나 상학가들이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았을 뿐이지만,

이 말을 들으면 삼백안이나 사백안 사람들은 펄쩍 뛸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오늘날 연예계 사람들을 보라.

거긴 삼백안, 사백안 인물들을 어디서 모아다 놓았는지,

도라꾸로 이들이 방송국 마당에 덤핑되어 있다.

그 뿐인가,

짝귀, 반이(反耳), 칼귀 등,

역시나 악상(惡相)이라는 관상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아니 등장하고 있다.

(※ 참고 글 : ☞ 칼귀)

요즘 아이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연예인이나 아이돌이 되기를 오매불망(寤寐不忘) 바란다.


저들은 현대에 들어와,

외려 사회적 신망을 얻고,

재물도 많이 모으고 있음이니,

과히 세상이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되었다 하겠다.


다시 여담이지만,

앞에서 은해(銀海)가 도가에서 눈을 가리키는 말이라 했다.

헌데, 참으로 기이하게도 연예계를 속칭 은해(銀海)라 부른다.

과연 거기 은해엔 삼백안, 사백안의 사람들이 오가며,

흰동자를 희끗희끗 날리며, 뭇사람들의 시선을 앗아가지 않던가?

오늘날 은막(銀幕)이란 말이 더 많이 쓰인다.

참고로 은막은 영사막(映寫幕), 즉 스크린을 지칭한다.


생각해보라.

가자미 눈을 하고 있으면,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모를 터인데,

어찌 뭇 관객들의 마음을 흔들 수 있겠음인가?


인종차별주의자들은 동양인의 눈을 두고 chinky eyes라 놀리지 않던가?

요즘엔 중국인들이 한국 사람을 두고 눈이 작다고 놀리고 있다.

마치 가자미가 넙치보고 눈이 작다 하는 꼴이다.


하여간 연예인이나 화류계에서 명성을 날리려면,

눈이 크고, 사백안은 아니 되어도 삼백안은 되어야 하리라.


현대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만이 큰 흰동자(공막)를 가지고 있다 한다.

백색 공막의 돌연변이는 인간에겐 보편적이지만,

유인원에게서는 가끔 나타날 뿐이다.

(출처 : american scientist)


이 공막을 통해 의사소통을 하고,

이는 상호 협동하는데 유리한 결과를 낳는다 한다.

개와의 관계에서도, 개가 인간의 시선을 잘 읽어낼 수 있다면,

더욱 사냥 파트너로서 유용했을 것이라 했다.


(출처 : american scientist)


연예인들이 삼백안이 많은 것도,

이로써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는데 유리하기 때문이리라.

사람은 의사소통을 할 때, 사람의 얼굴에 집중한다.

얼굴 중에서도 하얀 부분이 노출되면 주목도가 높아진다.

웃을 때, 하얀 치아가 드러나든가,

눈자위가 희번득 거리면,

당연 사람의 시선이 그리로 몰리게 된다.


관상학에선, 노광(露光)이라 하여 안광(眼光)이 바깥으로 새는 것을 꺼린다.

그리 되면 안을 감출 수 없게 되고, 내심을 들키게 된다.

심중의 마음을 철석처럼 굳게 빗장 질러 닫아 걸고서야,

중요한 일을 비밀리 도모할 수 있다.

이게 헤프고서야 어찌 큰일을 할 수 있으랴?


안광(眼光)은 안신(眼神)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눈이 정신 작용의 외표(外表)로 작동하는 것을 이르는 표현이다.


眼光浮露定貪淫

(神相鐵關刀)


“눈빛이 浮露하면 음란하다.”


눈빛이 노출이 된다함은,

거꾸로 말하자면,

무엇인가 갈구하는 바,

꾀어내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연예인들은 연기(演技)를 함으로써,

자신의 작업을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어필하여야 한다.

하기에 갖은 분단장을 다하고,

소품을 갖추며 자신을 꾸민다.

삼백안은 천생으로 갖춘 것인즉,

이보다 더 유리한 채비 조건은 없다 하겠다.


게다가 앞서 글을 적었듯이,

정치가나 언론인들 중에도 이러한 이들이 부지기수다.

과연 관상학은 틀린 것인가?

도대체 이런 현상은 어이하여 일어나는 것인가?


내 과문한지 몰라도,

역학계나, 관상가들 가운데, 

이를 시원하게 설명하는 자를 보지도 듣지도 못하였다.


여기서 잠깐,

인간 문물, 학문의 역사적 발전 단계를 살펴보자.


무릇 오행설의 역사적 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초기 서주(西周) 말(末) 사백(史伯)은 오행이 서로 섞여 만물이 생성된다는,

오행상잡설(五行相雜說)을 폈다.

그러다, 춘추 시대 말, 진(晉)의 사묵(史墨)은 오행이 서로 이긴다는 

오행상승설(五行相勝說)을 펴기에 이른다.

가령 水勝火라 전쟁에 이긴다는 예단을 펴는 식이다.

후대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더욱 오행이 체계화되어 유행하기 시작한다.


한편, 춘추 말 손자, 묵자 등은 오행무상승설(五行無相勝說)을 폈는데,

이는 이제까지의 상승설에 대한 반성적 성찰로서,

오행은 서로 마냥 이기는 것만은 아니다라는 설을 편 것이다.

전국시대 초기에 이르러, 관자(管子)는 오행상생설(五行相生說)을 펴는데,

이는 오행은 서로 상생한다는 설이다.

그러다 전국 시대 말에 이르러서는,

역학계에 널리 알려진 추연(鄒衍)이 등장하여,

오행상생상승설(五行相生相勝說)을 펴면서,

오행설이 점차적으로 이론적 완성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그 뿐인가,

우리는 학교 다닐 때, 다 배워 안다.

무엇을?

이론, 학설들이 곧잘 바뀐다는 사실을 말이다.


데모크리토스는 빛을 두고 입자라 하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파동이라 하였다.

다시 뉴튼은 입자라 하였는데,

당시 뉴튼의 권위로 인해 이를 반박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다, 토마스 영, 맥스웰 등이 등장하여,

빛은 파동이자, 전자기파임이 입증되었다.

그 후, 아인슈타인의 광양자(光量子)설이 발표되고,

드브로이의 물질파 개념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오늘날엔 빛의 이중성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현실이 되었고,

고전역학으로는 쉽게 해석할 수 없는 물리현상을 두고,

양자역학이 등장하여 세상을, 세계 물질 구조를 해석하는데 이르고 있다.


세상은 그대로일 터인데,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새로운 실험 결과로 기존의 학설과 이론을 뒤집고 있다.


기존의 관상학 이론이,

현실에서 제대로 맞지 않음은 무엇 때문인가?


세상이 변한 것인가?

아니면 진리가 바뀐 것인가?

아니면 현상을 설명하는 해석 기준이 뒤집힌 것인가?


진리가 바뀐 것이라면,

바뀌는 것도 과연 진리라 여길 수 있음인가?


양자역학만 하여도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현재는 코펜하겐 해석이 주류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숨은 변수 이론이나, 앙상블 해석 등이 있다.


만약 진리가 하나라면,

다만, 해석만이 이를 대행할 뿐이 아닌가?

시대에 따라, 실험 결과에 따라, 현실 해석 능력에 따라,

기존의 주류 해석이 位를 잃고 사라지고,

새로운 해석이 등장하곤 한다.


(※ 노파심에서 말하거니와,

양자역학이 나타났다 하여, 

뉴튼 역학이 전혀 쓸모없는 것이 돼버렸는가?

그것은 아니다.

관상학도 설혹 새로운 이론과 해석이 나타난다한들,

기존의 이론이 모두 틀렸다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실제 내가 여럿을 관찰한 바로는,

관상학은 아주 허무맹랑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걱정인 것은 이에 얽혀 스스로의 입지를 좁히고,

구속되고 마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고정된 틀이 과연 있는가?

이런 의문을 일으키고,

각자는 보다 진취적이고, 창조적인 해석 공간을 창출하길 빈다.) 


물리학의 변전(變轉) 역사처럼,

관상학에서도 다양한 시도, 해석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이 업계에 계신 분들의 분발을 촉구하고 싶다.

기발하며, 창조적이며 해석가가 등장하면,

인간의 문물은 이로 인해, 윤택해지고,

역사는 새로운 걸음을 내딛게 될 것이다.

가히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생각이 갓 잡은 물고기 은비늘에 비추는 빛살처럼,

마구 어지럽게 튕겨 떠올라,

분주히, 거둬 적느라고,

글이 가지러하지 않고,

뒤숭숭하다.


결론은,

삼백안이 왜 현대에 들어와서는,

상서(相書)에 가르침대로 통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을 먼저 제기했고,

그것은 물리학의 변전태처럼,

기술(記述)이나 해석(解釋)의 

역사 발전 단계 방식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다만, 관상학은 전통을 벗어난,

새로운 시도나 해석이 나타나지 않고 정체되어 있다.

관상계의 분발을 기대한다.


혹, 자신의 얼굴 관상 때문에 걱정이 많은 이가 있다면,

기왕의 내 글을 소개한다.

(※ 참고 글 : ☞ 상유심생(相由心生))

(※ 참고 글 : ☞ 면상불여심상(面相不如心相))

   

하지만, 여기서 언급한 心相은,

그저 上之下에 불과하다.

기왓장 열심히 숫돌에 간다고 면경(面鏡)이 될 수 있겠음인가?


上之上에 대하여는,

글이 한참 늘어져버렸은즉,

오늘은 말을 아끼련다.

다만, 나의 다른 글이 혹간 참고가 된다면 다행이겠다.

(※ 참고 글 : ☞ 백장야호(百丈野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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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학(相學) : 2020. 10. 21. 18:5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