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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극필반(物極必返)과 정은경

소요유 : 2020. 10. 22. 10:44


물극필반(物極必返)과 정은경

 

한국은 코로나19에 대한 방역이 대체로 성과를 낸 것으로 평가된다.

그 중심에 사령탑을 맡은 정은경이 있다.

그 공으로 정은경은 새로 신설된 질병관리청장이 되었다.

 

그 사이, 방역에 성공하였다는 자찬의 말들이 지면을 도배하고,

곧바로 선진국에 진입, 아니 이미 도달하였음을 뒤늦게 깨달았다는 등,

뽕 맞은 애국주의자들이 거리를 술에 취한 듯 횡행하였다.

 

물극필반(物極必返)

 

나는 물극필반에 대하여 여러 차례 글을 쓴 적이 있다.

(※ 참고 글 : ☞ 천풍구(天風姤)와 슈퍼퍼지션(superposition))

(※ 참고 글 : ☞ 물극필반과 암호화폐)

 

물극필반은 그저 간단히 새기자면,

사물은 극에 이르면 반대로 돌아온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말에 속박되면 자칫 그릇된 이해를 하게 될 위험이 있다.

 

소문(素問)엔 이런 말이 있다.

 

하늘엔 氣가 있고, 땅에선 形이 이뤄져 있다.

이 양자인 形과 氣가 감응하여 만물이 생성, 변화된다.

物이 생기는 것을 化라 하고,

물이 極하는 것을 變이라 한다.

 

物生謂之化,物極謂之變

 

하니까, 극한에 도달하여야 거꾸로 변한다든가,

극한에 이르기 전까진 아직 괜찮다는 식으로 이해를 하면 곤란하다.

이러면, 아주 위험한 얼치기 해석이 돼버리고 만다.

이를 두고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차라리 글자를 몰랐으면, 6조 해능(慧能)처럼,

방아찧으면서 일약 깨달음에 이를 수도 있는 법.

 

마지막에 되어야 비로소 확 바뀌는 것이 아니다.

매 순간 返의 작용 동인(動因)은 배태(胚胎)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이런 생각도 틀렸다.

 

사물이 생기고, 마지막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합하여 變化라 이르는 바,

사물은 매 순간, 찰나간 자리가 천이(遷移)되고, 상태가 변화하는 것이다.

자신을 죽이고, 새로 태어난다.

 

외려 눈에 띄게 바뀌는 그 마지막 순간을,

뒤늦게 깨닫고 返이라 규정하고 있는 것이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極에 이르러야 返한다는 말도 틀렸다.

매 순간, 返함이니, 가고 오는 것은 찰나간 일어난다 하여야 맞다.

 

정은경이 功이 없다 할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청장이 되었으되,

독감백신을 접종하고 죽어나가는 사람이 속출하고 있어,

시민들의 걱정을 사고 있다.

사망한 이들이 7 - 9 - 10명에 이르다가,

오늘 아침 뉴스를 보니 11명이 되었다 한다.

아니 글을 다 쓰고 나니, 다시 13명으로 늘어나 있다.

 

질병관리청은, 이를 두고,

기저질환이 있기에 그리 되었다든가,

아나필락시스(anaphylaxis)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현실을 방어하기에 급급하다.

그러면서도, 접종을 독려하고 있다.

시민들이 실험실의 몰모트인가?

 

정은경 질병청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2009년부터 2019년까지 백신 접종 이후 이상반응으로 사망했다는 의심 사례 보고는 모두 25건이었다"며 “2017~2019년 최근 3년은 각각 2건씩 신고가 있었다”고 했다.

~

2009~2019년 사이에 들어온 신고 25건 중 실제로 독감 백신 부작용이 사망과 연관성이 있다고 밝혀진 것은 2009년 10월 백신을 접종하고 넉 달 뒤인 2010년 2월 사망한 65세 여성 사례 한 건 뿐이다.

(출처 : chosun.com)

 

이 자료와 비교하면,

올해 사망 사고는 평년 대비 4.5배 가까이 높은 수치다.

이는 분명 이례적인 일이라 하겠다.

 

환자가 하나 있다.

자신은 분명 아픈데, 병원에 가면 의사는 원인을 밝히지 못할 경우가 있다.

이 때, 신경성질환이라든가 체질이라 말하면,

의사는 면책이 되며, 환자는 고개를 떨구고 집으로 돌아갈 뿐,

뾰족한 대책이 없다.

 

그럼 이제 환자의 책임으로 돌리면 그 뿐인가?

아니면 아직도 병명을 밝히고, 치료할 수단을 찾아내지 못한,

의사들의 한계인가?

 

만약 이 둘이 책임소재를 두고 다툰다면,

그 결론은 쉬이 내려지기 어렵다.

내가 인과율을 반드시 믿는 것은 아니지만,

이처럼 협소한 의학 국면을 두고 말한다면,

저 병의 원인은 있되, 

다만 아직은 의학계가 능력 부재로,

이에 대처를 못하고 있다 할 밖에 없다.

 

헌즉, 변명을 늘어놓기에 급급할 일이 아니라,

물극필반의 이치를 잊고 어제(의 성과)를 오늘에 소비하던,

자신을 반성했어야 한다.

 

독감 백신 접종 사망 사고를 두고,

나는 문득 물극필반을 떠올리고 있음이다.

 

정은경은 그 동안 넘치는 찬사를 받았고,

벼슬자리도 최고의 위에 올랐다.

시민들은 뽕 맞고 한껏 어깨를 으쓱거렸다.

 

헌데, 이제, 배태되어온 허상들이 하나 둘 작용을 하며,

그 기초를 허물고 있었음이 확연하다.

그게 급기야 오늘의 사태를 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이제 수명이 늘어 백세를 구가(謳歌)할 정도이다.

사람이 백세가 되어 죽었다 할 때,

그의 죽음은 백세에 완성이 되었다 하겠음이나,

실제 죽음은 그의 살아생전 매 순간 진행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찰나 간, 사람은 아니 모든 사물은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찰나간 새로 살아나기도 한다.

 

사람의 장기는 수개월 내 모두 바뀌고,

몸뚱아리 전체는 고작 7개월이 지나면 모든 세포가 다 바뀌어 버리고 만다.

세포는 찰나멸(刹那滅), 찰나생(刹那生)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불교는 無我인즉, 그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찰나멸, 찰나생하는 자기 동일성(identity)은 없다고 본다.

 

실은 이를 불교인식논리학에선,

철저한 논리로서 증명하였기도 하다.

신앙심이나 교리가 아닌, 순수 논리로 말이다.

다르마키르티(Dharmakīrti, 法稱)가 그 증명의 중심인물이다.

그를 단순히 불교란 종교에 구속된 학자로 볼 것이 아니라,

인식론, 논리학에 탁월한 철학자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중관학파는 실체를 해체하여 空을 집중적으로 탐색하지만,

법칭은 무아를 순간적 소멸/생성으로 파악한다.

찰나멸/찰나생 한다면,

존재는 자발적으로 소멸하는 것이다.

자기 동일성을 거부하고, 자기 회귀를 적극 배반한다.

이는 단순히 허무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순간을 맞아 자유로 도약한다.

 

코로나19로 우리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하지만, 이를 뽕에 취해 자기화하고, 

애국을 노래하며, 세계 시민을 비하하는데 소비하였다.

좁아터진 자의식은 민족주의, 주체의 강화에 추레하게 고착되었을 뿐이다.

불행한 일이다.

 

정은경 역시 스스로의 성과에 취해,

새로운 적을 향해 날을 갈아야 할 칼을 만들지 않고,

지난 영광의 칼을 비단 칼집에 넣어두고 아꼈던 것이 아닌가?

 

회광반조(廻光反照)

 

영광의 순간, 빛을 되돌려, 전락(轉落)을 비추고,

죽음의 순간, 빛을 되돌려, 생을 되비출 수 있다면,

자기동일성이란 덫을 벗어재끼고,

매 순간, 자유로 비상(飛翔)할 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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