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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疏通)과 죽통(竹筒)

소요유 : 2020. 10. 23. 11:41


소통(疏通)과 죽통(竹筒)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면, 특히 그 가운데 정치 카페가 심한데,

소통 운운하는 이들을 적지 아니 만나게 된다.

여기서 서로 소통을 하는 게 미덕이라는 식의 주장을 펴는 경우를 많이 목도하게 된다.


자자, 그럼 소통이 무엇인가 먼저 알아보자.


소통(疏通)에서 疏나 通이나 모두 통한다는 뜻이다.

통하려면 비어야 한다.

허나, 과문소견(寡聞少見) 즉 들은 게 적고, 견식이 적은 자는,

비어있지 않고 외려 꽉 차있기 일쑤다.

선입관, 고집, 맹목적 신념으로 말이다.

대개 어리석을수록 비어있는 것을 견디어내지 못하는 법이다.


어린아이가 어미 치맛자락을 부여잡고 매달리는 것은 무엇인가?

곁에 의짓거리가 없으면 불안이 엄습하기 때문이다.

헌즉 어미가 없으면, 누나를, 누나가 없으면, 

부엌에 있는 부지깽이나, 뒷간 벽에 세워둔 몽당 빗자루라도 빌어,

그에 의지하여야 한다.

하기에, 어린아이에겐 장난감을 주어, 이 불안을 달래주는 것이다.

다 커서도 장난감에 의지하는 이가 있겠음인가?


하기사, 장난감에서, 술, 여인, 돈, 골프 ...

따위로 옮겨가기 일쑤인긴 하다만.


(출처 : utube)


각설(却說)


비워있는 것 하면 대나무가 쉬이 떠오른다.

대나무는 속이 비어있다.

하지만 마냥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줄기 가운데 마디가 있어 중간중간 막혀 있다.

마디가 있음으로 하여, 

마냥 비어 나가던 대나무는 문득 멈추어 서서,

자신의 역사를 기록하여 봉(封)한다.

아아, 

竹約이라, 

대나무는,

바람부는 어느 날,

이리 홀연히 맺어, 

자신의 이야기를 묶어 낸다.


그런데 아시는가?

대나무의 마디는 죽순 때 이미 다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미 다 갖춰진 40여 개의 마디 마디 생장점에서,

거의 동시에 생육을 시작한다.

하기에 대나무는 그리 빨리 자라는 것이다.

우후죽순(雨後竹筍)이라는 말이 있듯이,

하룻 사이에 60cm~100cm까지 자란다. 


이제도 대나무를 보고 그 누가 있어 속이 비었다 하겠는가?

대나무는 실로 태생적으로 제 이야기를,

마디마디 봉할 태세가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저것은 시간의 can 통조림인 바라,

굽이굽이 곡절마다 물소리, 바람소리를 담아내고 있음이라,

그 누가 있어 아직도 비었다 하노뇨?


계절 역시 마찬가지다.

그저 일월은 장구히 무심하니 천구(天球)를 운행할 뿐이로되,

사람들은 춘하추동으로 칼금을 긋고는,

절기를 두어, 시간의 척도를 만들어두지 않던가?


사람들은 대나무를 잘라,

마디를 뚫어내어 긴 통(筒)을 만들어낸다.

이리 위 아래가 맞창이 나면,

그야말로 소통(疏通) 상태가 되고 마니,

사람들은 마냥 좋아라 한다.


헌데, 잠시 잠깐, 마저 더 이야기해두자.

밀통(密通)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소통은 막히지 않고 트여있는 상태를 이르되,

밀통은 통은 통이되, 꽉 차있는 통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외부로부터 차단된, 안이 봉(封, 縫)해진 상태하에서,

끼리만 통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하여 끼리 비밀통신(祕密通信)을 하게 된다.

불륜의 남녀가, 몰래 숨어, 사랑을 나누는 것을,

하여 밀통이라 한다.

또는 사통(私通)이라 하는 바,

이 역시 외부와는 차단된 상태다.


소통이나 밀통이나 通은 매한가지나,

이게 외부에 노출되어 있는가 아닌가의 차이가 있다.

소밀(疏密)

세상은 이리 疏-密-疏-密 ...

물무늬인듯 소리 가락이 되어 흘러간다.


대나무는 비어있는 게 아니다.

마디마다 밀통(密通)의 사연이 밀봉(密封)되어 있다.

이 사연을 알고 있는 이라면,

내 곁을 내주고,

따스한 볕이 내리는 언덕빼기에,

나란히 앉아,

청산을 바라보며,

술잔을 나누리라.


竹里館 (王維)


獨坐幽篁裡,彈琴复長嘯。

深林人不知,明月來相照。


깊은 대숲 속에, 홀로 앉아,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부르노니.

깊은 숲에 내가 있음을 사람들은 모른다.

다만, 달님만이 비추이는 것을.


그런데, 이제 이쯤에서 의문을 제기한다.

도대체 사람 사이에 소통이 가능한가?

밀통이라도 마찬가지로,

이 물음을 사양하지 않겠노라.


앞에서 정치 카페 이야기를 했는데,

녀석들은 툭하면 소통하자고 말한다.

그런데 실인즉 소통이 아니라, 

제 주장에 동조하라는 이야기가 거지반이다. 


게다가 찌질이들은 우리 편에 섞이며, 

같이 놀아나지 않는다고 상대를 탓하면서, 

그 때 꺼내든 것이, ‘왜 소통하지 않는가?’라는 말이다.

소통을 빙자하여 강압과 억지를 부리기 일쑤다.

제 주견(主見)조차 제대로 갖춘 것이 없는 쭉쟁인 주제에.


소통은커녕 밀통도 되지 못한 채,

저들은 그저 폐색(閉塞), 응체(凝滯)의 무리들일 뿐이다.

흔히 말하는 빠돌이들이 이의 전형을 이룬다.

설혹,

어쩌다 나와 뜻이 같을 때도 있고,

지향이 비슷할 경우가 있을지라도,

나는 저런 이들을 염오(厭惡)한다.


정치판을 보라.

표를 구할 때는 시민과 소통하겠다며,

기름집 됫박처럼 반지르한 말을 뱉어낸다.

하지만, 표를 다 얻고 나서는 일방적 선언만 있을 뿐이다.

때론 선언을 넘어, 선동과 술책이 동원되고, 강제력이 작동된다.


대나무 속마디를 뚫어버리고는

긴 대롱을 얻었으니 이제 만사형통이냐?

어림없는 소리다.


이제 피리를 만든다 하자.

대통에 구멍을 뚫어 다시 마디를 재현하지 않는가 말이다.

구멍을 막고 열어 운지(運指)할 때마다,

파장(wave length)이 다른 소리가 대통 속에서 흘러나온다.


태황무임중(汰潢潕淋㳞),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 ♪♬


이 음계가 저 빈 대롱 속에서 흘러나오게 하는 비밀은,

실로 구멍(音穴) 즉 마디에 있다.

진공묘유(眞空妙有)라,

空은 텅 빈 無가 아니다.

저 피리의 빈 구멍으로 가락이 흘러나오듯,

기기묘묘한 제 각각 만상(萬象), 만음(萬音)이 나온다.


헌데, 기실, 피리는 구멍이 있는 한, 아직은 외로운 늑대일 뿐이다.

야삼경 달을 향해 우는 늑대에 불과하다.

진짜배기 피리는 구멍이 없다.

이 사연은 나의 묵은 글을 참고할 일이다.

(※ 참고 글 : ☞ 공진(共振), 곡신(谷神), 투기(投機) ①)


소통은 무장해제가 아니다.

소통은 너와 내가 같아지는 게 아니다.

소통은 내 편, 네 편 이리 편가름 속에,

어느 하나에 끼이는 것이 아니다.


그러함이니, 세상에서 소통을 부르짖는 자들을 경계하여야 한다.

저들을 시랑(豺狼, 승냥이와 이리), 사갈(蛇蝎, 뱀과 전갈) 보듯 대하여야 한다.

욕심꾸러기, 고집쟁이에 불과한 이들이 소통을 빙자하여,

상대가 아닌, 종국엔 제 사욕을 채우고자 할 뿐이다.


나는 소통하지 않는다.

소통을 꾀하지 않고, 권하지도 않는다.

이런 부질없는 짓거리엔 관심이 없다.


逍遙於天地之間而心意自得


다만 천지간을 소요유(逍遙遊)할 뿐이다.

그저 한가로이 노닐 뿐,

밖으로 구하는 바 없다.


今人誠能砥礪其材,自誠其神明,睹物之應,通道之要,觀始卒之端,覽無外之境,逍遙乎無方之內,彷徉乎塵埃之外,卓然獨立,超然絕世,此上聖之所遊神也。

(說苑)


번역 생략한다.

맹자의 말씀인데,

다음에 이어지는 그의 말씀은,

내겐 그리 마음에 담아둘 것이 아닌 바,

요 부분만 이리 절취하여 그쳐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 마지막 문장 此上聖之所遊神也。

이것은 신선의 경지를 노래하고 있다.


신선이란 무엇인가?


신선은 신은 신이로되 하늘로 돌아가길 유보한 존재다.

그는 결코 천상을 꿈꾸지 않는다.

산에도 깃들고, 저잣거리 시정(市井)도 마음껏 돌아 다닌다.

때론 연못에 도끼를 잃은 나무꾼을 상대로,

금도끼를 나눠주기도 한다.

이리 그는 거침없이 안팎을 넘나들며, 

세상의 즐거움을 만끽할 뿐이다.


이게 바로,

覽無外之境,逍遙乎無方之內,彷徉乎塵埃之外,卓然獨立,超然絕世

이런 경지이다.


이 때,

우리는 유마힐(維摩詰)이,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면서,

저들 병이 모두 나을 때까지 부처의 位를 마다한 것에 견주게 된다.


유마힐을 대하면,

그저 눈물이 난다.

그러면서 환희심이 솟고 만다.

그야말로 진짜배기 신선이라 하리라.


나는 신선도 아니고, 

유마힐도 아니다.

나는 다만 나일 뿐인 것을.

(※ 참고 글 : ☞ 나는 나)


다만 천지간을 소요유(逍遙遊)할 뿐이다.

그저 울고, 웃으며 노닐 뿐,

밖으로 구하는 바 없다.


소통씩이나?

그대들이나 욕심껏 많이 즐기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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