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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其是,非其非

소요유 : 2020. 11. 25. 10:51


是是 非非 是其是 非其非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


(출처 : 網上圖片)


하지만, 是其非,非其是라,

즉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그른 것을 옳다 할 때,

짭짤한 국물이 떨어질 때가 있다.

아니 때론, 국물이 아니라,

판 자체를 뒤집고,

객이 주인이 되어,

안방 자리를 차지하고,

건더기마저 취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是其非,非其是라 할 때,

是는 非를 의식하고, 非는 是를 경계하며,

바짝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 아주 성가신 일이다.


처음부터 是非를 고려치 않고,

아예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을 만들어버리면,

성가신 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 참고 글 : ☞ 대안농업)


대안적 사실은 실제는 거짓(非)이지만,

유포자 집단은 그것을 진실(是)이라 우기고,

이를 기꺼이 공유한다.


기실, 대안적 사실의 세계에선, 시비(是非), 진위(眞僞)는 문제가 아니 된다.

다만, 노리는 기대 효과만 확보되면 그 뿐이다.


모니터 위에 영상이 나타난다.

실제 이는 그래픽카드로부터의 송출 신호에 따라,

이에 응하여, 모니터의 각 위치 단위 요소가 빛을 명멸(明滅)하기에,

그럴싸한 영상이 그려지게 되는 것이다.


가령 움직이는 벌레가 묘출(描出)되고 있다 해보자.

모니터 상, 각 화소(畵素, pixel)에 배치된 RGB 광 발현 기능 요소는 

주사(走査, scanning) 신호에 따라, 즉응하여 빛을 내거나, 지운다.

주사율(scanning rate)을 높일수록, 영상의 질은 더 좋아지고, 현실감은 높아진다.


이 때 실감나게 벌레는 움직인다.

만약, 이를 보고 있는 이가,

이게 실제라 여기게 된다면 어찌 되겠는가?

또한 모니터를 조작하고 있는 이가 있어,

그에게 이는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라 강변하면 또한 어찌 되겠는가?


분명 모니터 위에서 전개되는 세계는 허위다.

하지만, 이를 보고 있는 이나, 모니터를 조작하고 있는 이나 모두,

저것이 벌레라 여기고, 그에 따른 2차, 3차 행동을 이어간다면 어찌 되겠는가?

만약 이 양자가, 진위엔 관심이 없고,

다만 벌레라 규정할 때의 작용효과만을 소비 목표로 삼는다면,

저들은 그로써 기대하는 성과를 획득해낼 수 있다.


인도의 인식논리학엔 인과효력(artha-kriyā)이란 개념이 있다.

이것은 어떤 유효한 결과를 나타내는 능력, 효력을 뜻한다.


부처는 세상 모든 존재의 실체, 항상성을 부정하였다.

후기 불교학자들은 이를 찰나멸(刹那滅) 이론(kṣaṇika-vāda)으로 발전시켰다.

이 이론에 따르면, 

사물의 존재 증명은,

그것의 유효한 인과 효과(artha-kriyā)를 산출하는 능력으로 가늠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法稱(Dharmakirti 약600~660)의 찰나멸 논증은 탁월하다.

이 이론에 따르면, 존재는 찰나멸할 수밖에 없다.

왜 그런가?

가령 사물이 찰나멸하지 않고, 그 이상 지속된다고 주장하려면,

존재하는 각 찰나 과정 내내 인과효력을 낼 수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존재는 오직 찰나멸한다 하지 않을 수 없다.


counter demonstration의 하나인 귀류법(歸謬法, prasanga)을 통해,

다르마끼르띠는 이제까지의 논쟁을 뛰어넘었다.

하지만, 이 귀류법은 상대를 부정하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자신의 독립적 논증을 구하지는 못하고 있다고,

여전히 문제를 제기하는 측을 만족시키지는 못하였다.


이 논증은 후대까지 이어져, 

라뜨나끼르띠(Ratnakirti), 목샤까라굽따(Moksakaragupta) 등을 통해,

더욱 정련되며 완성된다.


인식 차원에선, 인과효력 발생 여부로 존재가 증명된다.

하니까, 대안적 사실이 분명 허위인 것은 맞지만,

진위 여부에 집착하지 않고,

다만, 그것이 기대하는 목적 효과를 낸다면,

저것은 유효 존재가 된다.

이것이 대안적 사실을 세상에 유포하며,

지지자를 획득하고, 결속하며, 

반대자를 억압하고, 강요하며,

저들만의 가상 세계를 새롭게 창조해내는 과정인 것이다.


물론 이는 찰나멸 논증을 내가 짐짓 꾸어다, 

대안적 사실 세계에 비추어 본 것이지만, 

과연 저것의 인과효력이 모든 이에게 반석 같은 믿음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인가?


온 지성이 타락하여 자빠져 잠을 자지 않는 이상,

저들의 기도는 역사의 저울대 시험을 이겨내지 못하게 되리란 소박한 기대가 있다.

이게 바로 앞글인 ‘바둑기사 치팅’에서,

언급한 有權衡之稱者。不可以欺輕重。의 소망 내용이다.


문제는 대안적 사실의 인과효력이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가령 어둠 속에 휘두른 물체가 칼로서 존재 증명이 되려면,

그 칼로써 물체가 잘리고, 피가 나는 등의 인과효력이 나타나야 한다.


하지만, 대안적 사실은 오로지 지지 집단 내에서만 유통된다.

집단 밖을 향해선, 일방적인 선전, 선동을 통해 강제된다.


칼의 존재 증명은 그 인과효력으로 피아를 가리지 않고, 인정된다.

하지만 대안적 사실의 세계는 유통의 한계와 믿음의 분리가 일어나기에,

존재 증명인 인과효력의 유효성은 불완전하다.

대안적 사실 유포자는 유통과 믿음의 불완전성내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만족이 확보된다면, 

그 행위를 자발적으로 유보하려 결코 의욕하지 않는다.


기실 저 무리들은 가치를 믿거나, 정의를 신봉하는 게 아니라,

다만 효력만을 구하고 있을 뿐이다.  


허위에 기초하여 조작되고, 유도된 인과효력에 불과하지만,

무의식에 잠복한 욕망을 겨냥해 뿌려지는 대안적 사실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소위 빠돌이, 대깨문 등 열등 대중에 의해 열심히 소비된다.

저들은 그것이 제 판단력을 흐려놓고, 일상을 위협하는지 모르고,

불로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자신의 삶을 기꺼이 해체해버리고 만다.


한편 대안적 사실을 대중이 마냥 수동적으로 소비만 하는 것도 아니다.

외려, 젖먹이가 젖을 달라 투정하듯 적극적으로 요구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들은 진실을 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며,

문제 해석, 해결을 앞에 두고 심각한 고민과 과도한 비용을,

부담하는 것을 견딜 만한 수용체도 아니 된다.

그런즉, 잘 다듬어져, 외부로부터 제공되어진, 

그리하여 수용하는데 별반 수고가 따르지 않는 것이면,

진위 불문 쉽게 접근하여, 덜컥 받아먹고 만다.

죽처럼.

이미 남이 한참 씹고 뱉어낸 것을 받아먹을 뿐.

저작(咀嚼) 능력이 갖춰지지 않은 저 어린 위장(胃臟)들이라니.


저들을 잘 지켜보라.

쉽고, 빠르고, 재미있는 것만을 원한다.

복잡하고, 느리고, 어려운 것은 외면하고,

나아가 곧잘 화를 낸다.

그러면서 외친다.

쉽지 않고, 재미없는 것을 마주치면, 

소통을 하려 하지 않는다며,

불의하다고 분개한다.

진리는 쉽고 간단한 것이라야 한다고 외친다.


과연 그런가?

양자역학을 3분 만에 이해할 수 있는가?

양자역학은커녕 미적분, 인수분해조차 쩔쩔매는 수준들이.


생명 현상을 3분 만에 설명할 수 있는가?

저들은 진리, 사실도 인스턴트식품처럼,

간단히 물만 붓고 먹을 수 있길 원한다.


길 잃고 들판을 헤매는 아이처럼, 마냥 훌쩍이며,

소통도 따기만 하면 바로 먹을 수 있는 통조림 깡통이어야 한다고 우긴다.


저들이 소통을 원한다지만,

기실 그것은 강 건너 대안(對岸)에서 보자면,

그들이 획득한 소통이란,

대개 교묘히 꾸며진 대중 선동술에 의해 장악된 결과에 불과하기 일쑤다.


이들은 제 자신의 불편함을 그저 잠시라도 참아낼 수 없는 존재들일 뿐이다.

이 자리에, 공공의식이라든가, 정의 관념은 한 톨도 찾아볼 수 없다.

물 부른 방죽에 올라 턱을 불룩거리며 우는 물두꺼비처럼,

저들은 욕구불만으로 매양 울어재끼며, 온밤을 하얗게 태운다.


저들은 장난감 내놓으라 마냥 보채며, 

땡깡 피우는 어린아이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제 탐욕이 아무런 수고 없이 제 손에 바로 쥐어져 채워지는,

그런 세상을 원하고 있다.


현실의 세계에 다수 존재하고 있는 이런 대중과, 

이들의 특성을 제 입맛에 맞게 조리할 수 있는 실력 세력은,

상호 만족을 얻으며, 함께 대안 세계를 구축한다.


‘노무현을 망치는 것은 노빠요,

문재인을 허물어뜨리는 세력은 대깨문이다.’

여기 노무현, 문재인 자리에,

대신 박근혜, 이명박을 바꿔 넣어도 하나도 그릇되지 않는다.


하지만,

역으로,

빠돌이, 대깨문, 팬덤을,

정치권력이 이용하고 있다는 게 더 진실에 가까울 수도 있다.


진실로 빠돌이 등속을 사랑하고 있다면,

저들을 적절히 통제하고, 바른 길로 인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경험하듯이,

그런 징후조차 찾아보기 어렵지 않은가 말이다.


끝으로,

是其是,非其非

이를 앞에 두면,

조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그와 관련된 글 링크를 남겨둔다.


☞ 독사에게 손가락을 물리면, 장사가 팔을 절단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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