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不思善不思惡

소요유 : 2021. 1. 30. 13:25


不思善不思惡

동영상 하나를 보고 생각을 일으켰다.

救人一命,勝造七級浮屠라 하여,
사람 하나의 목숨을 구하는 것은 7층 불탑을 조성하는 것보다 낫다 하는 말이 있다.
하지만, 저 동영상의 경우,
자연 다큐멘터리 촬영 원칙상, 
인간이 개입하면, 작업의 목표내지는 목적에 어긋날 수 있다.

헌데, 만약 그 대상이 펭귄이 아니고 사람이라면,
더 이상의 논란은 쉬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아, 인간 사회에 형성된 문화 속에선,
사람과 동물 사이엔 이토록 엄청난 협곡이 가로놓여 있다.

孟子.公孫丑上
孟子曰:『人皆有不忍人之心。先王有不忍人之心,斯有不忍人之政矣。以不忍人之心,行不忍人之政,治天下可運之掌上。所以謂人皆有不忍人之心者,今人乍見孺子將入於井,皆有怵惕惻隱之心;非所以內交於孺子之父母也,非所以要譽於鄉黨朋友也,非惡其聲而然也。由是觀之,無惻隱之心非人也,無羞惡之心非人也,無辭讓之心非人也,無是非之心非人也。惻隱之心,仁之端也;羞惡之心,義之端也;辭讓之心,禮之端也;是非之心,智之端也。人之有是四端也,猶其有四體也。有是四端而自謂不能者,自賊者也;謂其君不能者,賊其君者也。凡有四端於我者,知皆擴而充之矣,若火之始然、泉之始達。茍能充之,足以保四海;茍不充之,不足以事父母。』

“ ...
어린아이가 막 우물에 빠지려고 할 때, 누구나 두려워 측은한 마음을 일으킨다.
이는 어린아이의 부모와 교분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요,
무리 친구들에게 칭찬을 받고자 하는 것도 아니며,
그 어린아이가 지르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도 아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측은지심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
수오지심이 없다면 인간이 아니다. .....”


맹자의 不忍人之心이라는 것도,
사람을 상대하여서만 일어나는 것인가?
不能算是人이라,
측은지심이 없는 이를 계산할 수 있는 그 축에도 넣지 않는다 하였으나,
과연 그의 생각이 사람을 넘어 동물에게까지 미치겠는가?

유가(儒家)에겐 더 이상의 명확한 답을 구하는 것은 어렵다.
다만, 맹자 흔종(釁鐘)의 예에서 보듯,
약간의 문제의식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정도에 그친다.

소위 착한 사마리아인법이라 하여,
위험에 처한 이를 구하지 않는 경우 처벌하는 법이 있다.
다른 나라의 경우 이 법이 정해져 있으나, 우리나라는 명문 규정이 없다.

헌데, 호의를 보여, 어린아이를 구하려 하였으나,
예기치 않게 외려 아이를 도리어 죽음에 빠뜨릴 수도 있다.

지나다 심장마비에 쓰러진 자를 본 행인이 하나 있다 하자.
쓰러진 자에게 심장 마사지를 하였는데,
그 처치가 과하여 갈비뼈를 부러뜨리게 되고,
이로 인해 그 뼈가 폐를 찔러 도리어 죽게 되었다면 어찌 할 것인가?

내 생각은 우리나라도 착한 사마리안 법 제정을 제정하고 아니고를 떠나,
호의를 보이다 외려 곤란한 지경에 빠진 자를 구하는 법만큼은 만들어 두었으면 한다.
더 나아가, 그 피해를 공적 기금에서 해결하는 장치도 마련해둔다면,
일종의 공적 부조, 보험과 같이 기능하여,
호의를 부담 없이 행할 수 있는 사회적 풍토를 진작시킬 수 있다 생각해본다.

이야기가 약간 옆으로 새었다.
정작 내가 이야기 하려는 것은,
과연 見死不救라 남의 죽음을 수수방관하고 놔두는 것이 옳은 것인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바른 것인가?
하는 물음을 제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昔洪州廉使問馬祖。喫酒肉即是。不喫即是。祖曰。喫是中丞祿。不喫是中丞福。徑山國一禪師。人問。傳舍有二使。郵吏為刲一羊。二使聞之。一人救。一人不救。罪福異之乎。國一曰。救者慈悲。不救者解脫。
(※ 郵吏 : 驛戰管郵遞的小官
   서양식으로 말한다면 postman쯤 된다할까?
   공문서 수발 담당 관리를 일컫는다.
   郵館 : 設在驛站的旅店
   郵驛 : 古時辦理傳送公務信件的地方)

지난 날, 홍주 염사(안찰사)가 마조 스님께 여쭙다.

‘술을 먹는 게 옳습니까?
아니 먹는 게 옳습니까?‘

마조 조사께서 이르신다.

‘먹으면 승상의 재록이요.
아니 먹으면 승상의 복이니라.‘

경산에 국일 선사가 계시다.
어떤 사람이 스님께 여쭙다.

‘역참에 관리가 둘이 있었습니다.
우리(郵吏)가 양 하나를 막 잡으려(죽이려) 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는 하나는 구하려 하고,
하나는 구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죄와 복이 어찌 다른지요?

국일 선사가 이르다.

‘구한 자는 자비,
아니 구한 자는 해탈!’


맹자는 명확히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이로써 답을 구하는 이들에게 친절한 지침을 제시한다. 

하지만, 스님들은 선택지에 대한 답을 내려주지 않는다.
아니 물음 자체가 가당치도 않은즉, 답 역시 그러할 수밖에.
아무리 이러저러한 말을 툭 댓돌 아래로 던져준다 한들,
결정은 여전히 구법(求法)하는 이에게 남겨져 있다.

동산양개 스님의 말씀을 마저 들은들,
마조나 국일 선사 밖의 별다른 소식은 아니다.

僧問。蛇吞蝦蟆。救則是。不救則是。師云。救則雙目不睹。不救則形影不彰。 
(瑞州洞山良价禪師語錄)

중 하나가 있어 스님께 여쭙다.
뱀이 개구리를 삼키고 있는데, 
구하는 게 옳은지 아니면, 구하지 않는 게 옳은지요? 
스님이 이르다. 

구하는 즉, 두 눈이 멀 것이요. 
구하지 않은 즉, 형체도 그림자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예전에 온라인 상 한 인간을 겪은 적이 있다.
그이가 말하길 자기는 위험에 처한 동물을 보고는 그냥 못 본 척 지나친다고 한다.
스스로 그 까닭을 이리 이야기 하였다.
‘어차피 저들의 삶이란 저러한 것,
저들을 일일이 다 참견하다가는 한도 없다.
헌즉 저들 일은 저들에게 맡겨 둘 수밖에 없다.’
이 자는 자칭 깨달음을 얻었다 스스로 이야기하는 위인이었다.
도사 한 분 게서 뵙다.
당시 나는 이 얼치기를 혜능의 주장자를 빼앗아 흠씬 패주었었지.

또 다른 이도 있다.

자기는 불쌍한 동물들을 보면, 참을 수 없어 이들을 돌본다 한다.
이리 열심히 일을 하는 양 싶지만,
그의 면모를 지켜보자면,
자신의 선행을 연신 선전하는 일에도 게으르지 않더라.

救者慈悲。不救者解脫。

국일 선사의 이 말씀에 기대면,
전자는 해탈한 이고,
후자는 자비행을 하는 이가 되는가?

자비행 계열의 사람 중에,
동물 돌보는 일을 하다 감당치 못할 처지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이에 대하여는 나의 다음 글을 참고할 일이다.
(※ 참고 글 : ☞ 애니멀 호더(animal hoarder))

舉梁武帝問達磨大師說這不唧𠺕漢如何是聖諦第一義是甚繫驢橛磨云。廓然無聖將謂多少奇特。箭過新羅。可殺明白帝曰。對朕者誰滿面慚惶。強惺惺果然。摸索不着磨云。不識咄。再來不直半文錢帝不契可惜許。却較些子達磨遂渡江至魏這野狐精。不免一場懡㦬。從西過東。從東過西帝後舉問志公貧兒思舊債。傍人有眼志公云。陛下還識此人否和志公趕出國始得。好與三十棒。達磨來也帝云。不識却是武帝承當得達磨公案志公云。此是觀音大士。傳佛心印胡亂指注。臂膊不向外曲帝悔。遂遣使去請果然把不住。向道不唧𠺕志公云。莫道陛下發使去取東家人死。西家人助哀。也好一時趕出國闔國人去。他亦不回志公也好與三十棒。不知脚跟下放大光明。
(佛果圜悟禪師碧巖錄)

달마가 양무제를 만났는데, 불사를 많이 한 양무제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양무제가 '성스러운 진리란 무엇이냐?' 묻자 달마는 이리 답한다.

'廓然無聖'
텅 비었는데 무슨 성스럽기나?

그러자 양무제는 성에 차지 않아 다시 묻는다.
'도대체, 짐을 대하고 있는 그대는 누구인가?
달마가 말한다.

'不識'
몰라.


달마는 시절인연이 무르익지 않은 것을 알고,
숭산에 들어가 면벽 9년을 한다.

니기미, 탑을 아무리 세계 최대로 짓고, 불심이 깊다 남들이 칭찬을 한다 한들,
애니멀 호더와 무성이 다른가?

廓然無聖
이 말귀도 못 알아 듣고 자빠졌으니,
잘못 찾아온 것이다.
달마는 마치 강태공처럼 시절인연이 도래하길 기다릴 밖에.

나는 이 廓然無聖이란 말 앞에 이르면, 니기미 이 욕이 절로 나오고 만다.
니미 뽕이다 성스러운 게 개뿔이나!
니가 아무리 불탑을 조성했다 한들,
하나도 성스럽지 않다.
이 달마의 외침이 들리는가?
그대들.

육조(六祖) 혜능(慧能)은 오조 홍인(弘忍)으로부터 의발을 전수받고는,
시기하는 자를 따돌리고자 남쪽으로 피신한다.
이 때 한 무리가 추적하여 따라붙었는데,
대유령(大庾嶺)에 이르러 추적자 혜명(慧明)이 가까이 온 것을 발견하였다.

六祖因明上座。趁至大庾嶺。祖見明至。即擲衣鉢於石上云。此衣表信。可力爭耶。任君將去。明遂舉之如山不動。踟蹰悚慄。明曰。我來求法。非為衣也。願行者開示。祖云。不思善不思惡。正與麼時那箇是明上座。本來面目。明當下大悟。遍體汗流。泣淚作禮問曰。上來密語密意外。還更有意旨否。祖曰。我今為汝說者。即非密也。汝若返照自己面目。密却在汝邊。明云。某甲雖在黃梅隨眾。實未省自己面目。今蒙指授入處。如人飲水冷暖自知。今行者即是某甲師也。祖云。汝若如是。則吾與汝同師黃梅。善自護持。
(無門關)

이에, 혜능은 의발을 바위 위에 두고 숨었다.
혜명은 이를 거두려 하였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에 깜짝 놀란 혜명은 이리 외친다.

‘저는 법을 구하려 할 뿐이지, 의발을 노린 것이 아닙니다.
저에게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그러자 혜명이 이리 말씀하셨다.

‘不思善不思惡。’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그런데, 여기서, 혜명이 처한 상황 조건을 기초로 좀 추리해보면,
不思善不思惡。이란 말의 뜻을 조금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이제껏 혜명을 쫓아와 의발 즉 法의 증표를 빼앗으려 하였지 않았는가?
혜명은 그것을,
不思惡으로, 
그리고 깜짝 놀라 구법하려 왔다는 말을 앞에 두고는,
不思善 하라 교시하고 계신 것이다.

왜 그런가?

열반경엔 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 하였다.
선악에 매어, 헷갈릴 일이 아니다.
선, 악 어디에도 마음이 가닿아 있지 않고,
자취, 흔적을 남기지 않으면,
본래 진면목을 볼 수 있게 된다는 말씀인 것이다.

하니까, 병통은 내가 착한 일을 하고 있다,
악한 짓을 하고 있구나 하는 태도에 있다.
저 말씀은 이 선악 경계를 떠난 경지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自淨其意

지음(행동)에 흔적을 남기지 않을 때,
그 뜻이 절로 밝혀지는 것일 뿐인 것을.

기실 이 경지는, 七佛通戒偈

諸惡莫作,諸善奉行,自淨其意,是諸佛教。。

제악을 짓지 말고, 제선을 행하면,
그 뜻이 절로 밝혀지리니 ...

여기에 가닿는다 하겠다.

***

물 뿌리고, 빗자루질을 하여 땅을 깨끗이 하고, 단을 새로 세웠다.

저 동영상을 보고 감동을 하고 있는 그대,
혹은 싫어요 버튼을 꾹 누르고 있는 당신.

國一曰。救者慈悲。不救者解脫。

국일 말씀에 기대면,
전자는 자비를, 후자는 해탈을 얻었다 하겠음인가?
아니면,
전자는 해탈을, 후자는 자비를 잃었다 하겠음인가?

***

물 뿌리고, 빗자루질을 하여 땅을 깨끗이 하고, 단을 새로 세웠다.

저 동영상을 보고 감동을 하고 있는 그대,
혹은 싫어요 버튼을 꾹 누르고 있는 당신.

혜능은, 
不思善不思惡。

이 말씀을 혜명에게 나린다.

네가 의발을 빼앗으려 한 마음을 두고 - 不思惡
생각을 고쳐 돌려, 구법하려 하였음이라 하는 마음 - 不思善
이리 不思善不思惡이라고 하자,
혜명은 일거에 깨우치게 된다 하였다.

제작팀은 오르막 계단만 펭귄에게 만들어 준 것이니까,
다큐멘터리 불문율을 어긴 것이 아니니 괜찮고,
또 손을 직접 내밀어 구조한 것이 아니니 착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인가?
이들이 제 나라로 돌아오자, 천 사람 모두 입을 모아,
당신들 착한 일 했어 이리 칭찬해주니,
정말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인가?

헌데, 어떤 이가 나서 이리 말을 하고 있다.

'계단을 만들어 주었으니, 제작 불문율을 어긴 것이다.
또한 구조 시설을 만들어 저들을 살려내었은즉,
대자연의 질서를 흐트러뜨린 것이다.
그대들은 나쁜 짓을 하였다.
여기에 열광하고 있는 객들,
당신들 역시 그 일에 동조하고 있으니,
착한 이들이라 불러 줄 수 없다.'

그렇다면, 
저 동영상을 보고 감동을 하고 있는 그대,
혹은 싫어요 버튼을 꾹 누르고 있는 당신.

전자는 思善이라, 나 착한 사람이야 라고 스스로를 여기지는 않겠는가?
후자는 思惡이라, 나 나쁜 사람이야 라고 스스로를 규정하고 있지나 않을까?

혜능은 不思善不思惡
선도 악도 생각하지 말라 이르고 계시다.

도대체가, 한껏 감격하여, 착한 사람씩이나 되고 마는 그대.
하지만, 저 남극에 사는 펭귄과 그대 사이엔,
여전히 천길 만길 떨어진 간격이 있다.
당신들은 언제까지나 감격만 하고 살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콩나물 장사에게 10원을 깎아 달라고 조르지나 않을까?
도파민을 잔뜩 끌어올려, 감동을 소비만 하고 있을 뿐,
정작 보시, 지계엔 인색하기 만 그대 당신.
당신은 정녕 착한 사람이라 생각하는가?

不思善不思惡

혜능은 활활 타오르는 불화산 옆에,
아무르강(黑龍江), 남극에서 톱으로 켜온 얼음 덩어리를 함께 두고,
한껏 의식의 흐름을 불처럼 끌어올리는 한편,
얼음장처럼 차분히 가라앉은 평정심의 경지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不思善不思惡

여기 不이란 글자에 빠져,
마냥 부정적 정신 상태를 그려내고 있다면,
그대는 천년 저 얼음 구덩이에 갇힌 펭귄 신세일 뿐인 것을.
여기 不자는 실로 의식의 차꼬, 항쇄(項鎖)일 뿐,
심술궂은 혜능은 이 장치 설비로 그대들을 마음껏 희롱하고 있음이라.

저 동영상을 보고 눈물 질질 짜며 한껏 감동씩이나 하고 있다면,
단 일각도 못되는, 한 때, 불화산의 흥분 상태에 놓여 있을 뿐인 것을.
허나, 한껏 길어 올렸던 앙분(昻奮) 상태는 미처 일각도 못 버틴 채,
조루(早漏)하고들 말 뿐이 아니던가?

不思善不思惡 
여기 不자는 바로 조루를 꽉 조여 막는 링이다.
혜능은 조루 환자를 위해,
기꺼이 붉은 등 켜고 야밤 성기구 판매업자로 나투신 것이다.

헌데, 소문에 의하면,
공연히 잔뜩 달아오른 녀석은,
손칼로 불을 알뿌리 채 싹둑 잘라,
지나는 길 강아지에게 내준다고 한다지 아마.

(출처 : 網上圖片)

身臨枷鎖,恩赦放歸。

칼, 족쇄를 벗겨,
죄를 이리 깎아 놓아주시니,
아아, 은혜도 깊어라.

나무마하보살 혜능.

손곧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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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 : 2021. 1. 30. 13: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