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낮도깨비

소요유 : 2008. 9. 30. 20:59


내가 다니던 약수터에 이르니,
약수 떨어지는 곳에 무엇인가 곤죽이 되어 점점이 떨어져 있다.
늘 그러하듯이 고얀 인간들이 쓰레기를 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이번엔 너무 심하게 어지럽혀져 있어 흠칫 놀란다.
게다가 물줄기가 딱 끊겼다.

가을 가뭄이라지만 아직 물이 마를 지경은 아니다.
웬걸,
자세히 보니 물이 나오는 파이프에다 신문지를 잔뜩 꾸겨 넣어, 막혀 버린 것이다.
이게 물에 불어 빼낼 수도 없었다.

꼬챙이로 파낼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안으로 밀어 넣을 수도 없었다.
만약 안으로 밀어 넣게 되면 시멘트로 봉해진 수조 안으로 그것이 떨어질 터인 바,
이 또한 마땅한 방책이 아니다.
신문지 잉크는 발암물질이 그득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장비도 없는 처지인지라,
속수무책이다.

옛말에,
선행을 베푸는 것 중, 급수공덕(給水功德)이 으뜸이라고 했다.
목마른 이에게 물 한 바가지 떠 주는 공덕이 어련히 아름답지 않을손가?
반면, 우물을 부러 훼손하면 천벌을 받는다고 하였으니,
아무리 천하의 불한당 심술꾼이라한들,
감히 동네 우물엔 손을 대지 못했다.

생명을 기르는 물,
그 귀한 것에 차마 어찌 수작질을 할 수 있겠는가?
과연 그런가?
요즘,
우리는 어떤가?
병든 소도 수입하고,
멜라민 넣은 음식이 천하에 횡행하는 형편이 아닌가?
사정이 이러한데, 까짓 약수쯤이야 뭣이 그리 대수랴?

하릴없어,
그간 몇 년 째, 들리지 않은 인접 등산로를 타고 올랐다.
5분여 오르면 바가지로 떠 담는 약수터가 있다.
기왕에 온 것이 그리 가서 신세를 지기로 했다.
하지만, 수량이 충분치 않다.

나는 그 옆 또 다른 등산로를 개척한다.
이곳 역시 수년래 들리지 않았던 곳이다.
거기엔 역시 바가지로 떠 담는 약수터가 있다.
나는 바가지로 떠 담는 약수는 가급적 이용하지 않는다.
왠지 위생 상태가 염려스러워 피해간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주변을 시멘트로 보수하여 울을 쳐놓고는 접근을 금하고 있다.
오늘은 약수 긷는 일을 이쯤에서 멈춰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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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옆길을 따라 들어가면 미륵불이 계시다.
예전에 암자도 있었다고 하는데,
박정권 때 산림정화 차원에서 전부 없애버렸다고 한다.
미륵불은 용케 남아 자리를 지키시고 있다.
소소한 불상들은 그 후에 전부 헐어버려,
계곡에 버려져 있었던 것을 당시 본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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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불전, 거기 들려 눈인사를 드리고는,
곁길에 난 너른 공터에 앉아 책을 읽기로 하였다.
그 공터는 수년 전에 내가 가끔 쉬던 곳이다.
외부로부터 시선이 차단되고,
한적한 곳이라 쉬어가기 맞춤한 장소다.

당시에도 그곳 주변에 버려진 오물을 주웠던 곳인데,
오늘 보니 여전히 쓰레기가 버려져 있다.
참으로 재주도 좋다, 병을 그냥 버리지 않고 땅에 묻는 심사는 무엇일까?
제 딴에는 양심에 걸려 그리 숨긴 것일까?

큰 병 하나, 작은 병 하나를 땅 속에서 캐어냈다.
곁 벼랑에는 어김없이 쓰레기가 버려져 있다.
“앉아 쉴만한 곳은 어김없이 주변에 쓰레기가 버려져 있다.”
이것은 거의 틀림없는 철칙이다.

이악스러운 것일까, 아니면 미련스러운 것일까?
다음에는 오지 않겠다는 잇속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다만 지금 현재의 달콤한 안일(安逸)이 더 탐이 나기 때문인 것이리라.
아, 이 슬픈 미망(迷妄)들.

미륵불 가는 길,
그리고 그 근처에도 쓰레기가 미쳐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다.

설혹 종교가 다르다고 한들,
차마 그리 할 수 없을 터이며,
같다고 한들, 삼가는 마음이 없을 수 있음인가?
참으로 통탄스런 노릇이다.

최소한,
사람이라 할진대, 이리 삼가 사리는 마음도 없을 터인가?
차라리 지경(地境) 부근을 울로 쳐서 사람이 범접하지 못하게 하고 싶다.
아니 북한산 전체를 사람이라는 종자를 들이지 않았으면 싶을 때가 많다.

쓰레기에 능멸 당하는 약수를 볼 때마다,
울컷 치미는 심사에 나 역시 약수를 아예 폐쇄시켜버렸으면,
어떨까 싶을 때도 적지 않았음이니,
저리 약수에 헤살 짓을 한 작자도 행여 당시 이런 심사였을까나?

왜,
하필,
불상 옆에,
약수 옆에 쓰레기를 버리는가 말이다.

왜 아니 이들 뿐이겠는가?
북한산 역시 불상만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저 인간이란 종자를 산 근처도 감히 범접하지 못하게 하고 싶은 것이다.

“귀한 곳엔 모두 다 울타리를 치고 싶다.”
까마득히 저 멀리 인간이란 종자로부터 격리시키고 싶다.
이 참담한 현실이라니!

***

북한산 국립공원을 빠져 나오니,
입구 주차장에서 달처럼 둥근 원(圓)을 그리며 무리지어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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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평화탁발순례단.
저들이 필경 108배를 들일 작정인 게다.

조금 가까이 다가가니,
순례단 중 한 아가씨가 절하다 말고 반가운듯 다가와 팜플렛을 전해준다.
나는 저들을 방해하지 않도록,
저쪽 벼랑 밑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읽었다.

생명.
평화.
탁발.
순례.

도토리같은 말씨들이 또르르 가을 길을 구른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감히 아름답다고 이르기도 송구스러운 말씨들.

하지만,
아무도 저들을 쳐다보지 않는다.

그러하다면,
도대체, 저들의 탁발순례란 무엇인가?
2008.09.15~2008.12.13 100일간의 서울 순례길.

저들이 엎드려 홀로 피어 올리는 향불은 무엇이란 말인가?
저들이 밝힌 촛불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저 자리,
저들이야말로,
이 시대의 낮도깨비가 아닌가 말이다.

도깨비는 본시 음물(陰物)이라,
밤에 나타난다.
그런데, 이게 낮에 나타날 수 없음이니,
왜 인고 하니,
낮에 나타나면,
자신을 죽임이기 때문이다.

그러하니, 낮도깨비란 얼마나 허망한가 말이다.
낮달 역시 밤을 여위었기에 어줍지 않은 행색인 게다.
(※ 참고글 : ☞ 2008/04/29 - [소요유] - 낮달)

필경 하수상한 세상인 게다.
멀쩡한 약수 버려논 저 인간이 가엽다.
차라리 쓰레기 버린 인간들을 탓할 수는 있어도,
저 작자는 미워할 수 없음이다.

왜 그런가?
현재, 지금 (Here & Now)
당대를 사는 우리들의 실상이 이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마음보들의 한켠이 허물어져 저리 나타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하니,
저 작자가 미운 게 아니라,
정작은 우리들이 가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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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어진다는 말, 종이나 헝겊이 그럴 수는 있어도 나무가 그러할 수 있는가?
그 단단하던 나무가 그리 온 몸이 찢어진다면 얼마나 아플까?
약수물 헤살짓 한 이나, 나무나 모두 마음이 찢어질듯 아프기는 매한가지 아닐까?)

그러하다면,
생명평화순례단이,
도법스님이,
낮도깨비가 아니라,
정작은
우리가 기어이 낮도깨비가 아닌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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