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안개 이야기

소요유/묵은 글 : 2008. 10. 31. 10:48


다음 글은 '서프라이즈'란 사이트의
① 3203 부처와 데카르트 - jaybird
② 3204 서푼 머리와 세치 혀끝들의 노리개 - ^!^
두 글을 읽고 내쳐 써내린 저의 감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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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라는 말을 나는 거의 쓰지 않는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의식적으로 외면하고 “진리”라는 말을 지우고자 노력하였다.
이게 가만히 생각해보니, 당시가 실은 제일 진리에 목말라 하였던 시절이었으리라.

소시적 남도 여행시, 안개 자욱한 새벽 길을 헤집고 두 사람을 어둠으로부터 탈출시킨 적이 있다.
그 새벽 탈출路 길변에 나무들은 물안개에 젖은 채 의연히 제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주위는 제법 큰 소나무가 지켜 서 있었고, 길은 구불구불했다.
뿜은 물같은 안개 사이를 라이트를 켠 택시가 물방개처럼 미끌어지며 길을 열었었다.  
어린 마음에 적지 아니 흥분도 되고, 한편 의로운 내 모습에 우쭐되며,
값싼 내 감정에 젖어들기도 하였으나, 이내 이는 부끄러움의 송곳이 되어 나를 찔렀다.
진리니, 정의니 하는 것도 이런 위선의 선로를 빌어 굴릴 수는 없음이다.
그 나무들의 초연함은 늘 내게 부끄러움의 원천이자, 좌절의 증인이 되었었다.
무중탈출(霧中脫出)의 장면은 이렇듯 늘 내 마음에 빚이 되어 나를 경책했다.

아마도 그즈음이 되지 않았을까 ?
이후로 나는 감히 진리, 정의를 내세우지 않았다.
다만, 길을 찾아 묵묵히 걷고 걸었고, 지금도 폐립초혜(敝笠草鞋)로 걷고 있을 따름이다.

오리무중(五里霧中)
장해(張楷)란 사람이 있었다.
후한 사람인데, 명리에 초연하여, 조정의 부름도 마다하며 제 절개를 지키고 살았다.
이 장해는 오리무(五里霧)를 잘 만들었다 한다.
후한시대의 1리는 약 415미터라 하였으니, 오리라면 대략 2km 정도다.
중국에서 연기라 함은, 특히 시문(詩文)의 세계에선 연무(煙霧)나 안개나 거의 같이 취급되고 있다.
그런데, 동시대에 배우(裵優)란 사람이 삼리무를 만들고 있었다.
장해의 오리무에 비해서 못 미치니, 장해를 찾아와 가르침을 청한다.
그러나 상대가 비인(非人)임을 간파한 장해는 가르침은 커녕 만나 주지도 않았다.
비인부전(非人不傳)이니 천기를 어찌 함부로 전하리.

도대체, 이 인터넷이란 광장엔 옥석이 혼효(混淆)하니
선인, 비인, 광인이 마당에 엎지른 곡식처럼 섞이어 있다.
그러하니, 집단지성이니 하며, 뭇 중인을 동원하여, 쭉쟁이들 똥구멍 간질이며
그들 주머니를 헐어내는 음흉한 도적들이 가끔 목격되고 있다.
쥐뿔이나, 집단지성 ?
지성은 올올히 혼자뿐이다.
어중이 떠중이가 모여 지성씩이나 ?
내 날아 다니는 쥐새끼 씹은 가끔 보았지만, 떼거리 지성은 보지 못했다.
다시 말하지만, 지성은 혈혈단신 혼자다.
더우기 진리를 과녁으로 활을 날리는 마당에 ?
떼씹은 있지만 떼지성은 없다.
만약 떼로 득효(得效)하였다면,
혹여 집단效가 있을지언정, 그게 곧 그대의 전리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전리품이란 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치욕이며, 치욕이어야 한다.
그대 듣는가 ?
진리를 겨냥하는 한, 떼에 편승하지 마라.

폐일언하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아니나 다를까 ?
배우(裵優)가 삼리무를 써서 도둑질을 하다 붙잡혔다.
오리무의 기술을 가르쳐주지 않은 것에 앙심을 품은 배우는
포청 관리에게 이르길 삼리무의 기술은 장해가 가르쳐 주었다고 거짓 진술한다.
때문에 장해도 연루되어 투옥된다.
오리무를 펴서 탈출하면 될 터인데, 그런가 ?
장해는 무연히 견딘다.
2년후 무혐의가 밝혀져 석방되었는데, 장해는 옥중에서 유유히 붓을 들어
상서주(尙書注)란 책을 저술해낸다.
70세 죽기전에도 조정에서 부름이 있었으나, 장해는 병을 핑계코 거절한다.
그런데, 이때의 칭병사절(稱病辭絶)은 거짓이 아니었다.

ref)
① 부처와 데카르트 -jaybird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uid=3203&table=forum4&issue1=&issue2=&field_gubun=&level_gubun=&mode=&field=&s_que=&start=&month_intval=
② 서푼 머리와 세치 혀끝들의 노리개 -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uid=3204&table=forum4&issue1=&issue2=&field_gubun=&level_gubun=&mode=&field=&s_que=&start=&month_intval=

위 링크 jaybird님의 글에 이어 ^!^님의 글을 읽다 불현듯
머릿속을 스쳐가는 상념들의 행진들이 나를 성가시게 한다.

 오리무, 장해, 좌복, 벽돌, 마조.....
 툭하면 중인(衆人)들이 값 싸게 뱉어내는 진리, 정의, 개혁...
 ②의 오해처럼 ①② 이게 진리의 문제이기나 한가 ?...

그래 이를 가셔내야 개운할 것같다.
그냥 bongta 혼자 삭혀도 무관한 노릇이나,
광풍이 분 뒷끝이라 왠지 지저분한 그 거리,
나도 저질러 아예 더렵혀버리고 싶은 충동이 든걸까 ?
아니면, 분분한 그 추레함에 욕지기가 인 것일까 ?
삼리무가 구축(驅逐)한 오리무는 지금도 옥에 갇혀 있다.

①은 지금 일이관지(一以貫之)
“분리의식”이란 곡괭이로 금광을 착굴(鑿掘)하여 나아가고 있음이니,
그가 흘린 선홍빛 토혈(吐血)에 가까이 가다간 자칫 공부자리를 어지럽힐까 저어된다.
난 그가 더 많이, 어서 피를 토하길 바란다.
그리하여, 갱저(坑底)에 다다라 밑구멍을 터내길, 지켜보고 싶다.
그의 발걸음 따라 흘린 흥건한 핏덩이에 난 두손 모아 경건한 기도를 드리곤 한다.
명대국 토혈지국(吐血之局)인들 이리 성실할 수 있을까 ?
그로부터 일대의 한소식 전해지길 소망한다.

②는 ①에 대한 댓글로 출발하여 이내 본글로 나툰 재미있는 글이다.
이에 이르러, bongta는 그 글을 감히 사고 싶었다.
글의 얼이야 글주인의 것이겠으니, 사고 싶다고 살 수는 없는 노릇,
bongta가 사고 싶은 것은 글의 구조, 형상인 게다.
인터넷이 좋은 것이 공중에 올려진 이상 그것은 이미 만인의 것이 된다.
사정이 그러한데, 이리 사겠다고 운을 뗀 것은 무엇인가 ?
이는 두가지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그 글을 차용하겠다는 고지이니 즉, 글주인에 대한 염치를 차린 것이요.
둘은 그 글을 내 맘대로 칼질을 하여 조리(調理)하고자 하니,
혹여 이를 보고 맘을 상하지 않았으면 하는 단속의 의도가 있었음이다.
특히 이 두번째의 말씀으로서 앞으로 기술할 내용들의 모든 의미공간은
전적으로 bongta의 전속권역에 속하는 바, 본글 주인은 나서지 말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제 그 글은 내것인즉 그리 양해를 바란다.
실인즉, 내가 사는 세계에선 이런 말씀을 하지도 않거니와,
하는즉 말하는 이는 바로 몽둥이 짐찔, 멍석말이를 당하고 말 노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구질스런 췌언(贅言)을 떨구지 않을 수 없는
이곳 형편이니 그리 헤아려 주시길 바란다.

그 글을 보자.

“무심코 1원이 열 개 어쩌구 하는 예를 들었다가 '십겁'했습니다.
1원짜리를 본 적이 없는 아이 왈,
1원이 있어? 어데?
글쎄, 어디 있겠지 아마....
그럼 가져 와 봐 봐, 보여 줘 봐 봐”
“다섯 살 꼬마에게 1원짜리 동전의 실체 없이
10원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우리 아이, 학교 들어가더니
1원짜리 안 보고도 10진법 이해 다 하고 산수 100점 맞았습니다.
다섯 살 때 이해 못하던 이치를 여덟 살이 되니 절로 하게 되더라는....”

이 글(이하 文으로 처리)을 대하고는 즉각 머릿 속에서 생각의 파편들이
잠자리떼처럼 쏟아져 나왔다.

다섯 살 때 이해 못하고 여덟에 깨우칠 아이라면,
나라면 아예 낳지도 않았을 터이며,
낳았다면 좌복으로 쓰거나 이내 내다 버렸을 것이다.

그렇치 않은가 말이다.
만약 여덟에 깨우치지 못한다면 어쩔텐가 ?
열을 스물을, 마흔을, 백을... 채울텐가 ?
이 얼마나 나태한 태도인가 ?
이 얼마나 미련한 노릇인가 ?
게다가 文에서 진리 운운하고 있을진대.
진리가 똥구멍 자리에 붙여놓아, 나이만 쳐먹고 있으면 다가오는가 ?

그 文은 이어 이리 말한다.

“진리'란 서푼 머리와 세치 혀끝들의 노리개일 뿐입니다.”

도대체 이 무슨 넋 나간 짓거리인가 ?
文은 애시당초 지향하는 뜻조차 없었음이다.

文은 이어 이리 이어지고 있다.
“온것을 송두리째 던져 성심으로 사십시다.”

십진법을 목표로 ?
10원을 목표로 ?
바로 앞에선 노리개라고 하더니만, 느닷없이 십진법을 온몸 던져 성심으로 모시잔다
도대체 전후가 일각도 지나지 않아 거꾸로이니, 지금 文은 제정신인가 ?

진리가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다.
그는 여덟 살 아해의 아버지로서 정작은 다섯 살 어린 아해인 것이다.
그는 지금 여덟 살을 미끄럼질 지쳐가고 있다.
그의 말대로 온 몸을 던져 성심을 다하여.
강태공의 곧은 낚시질을 흉내내 서백창 문왕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

육조 혜능 - 남악회양 - 마조로 이어지는 계보.
여기 그 진부한 남악과 마조의 이야기를 다시 끌어내본다.

마조라는 수좌가 하도 좌선을 많이 하여 마치 죽은 사람이나 나무등걸 같았다.
그 때 회양선사는 마조의 공부에 진전이 없음을 알고 마조에게 물었다.
“무엇을 하고 있는가?”
“좌선합니다.”
“무엇 때문에 좌선을 하는가?”
“부처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어느 날 회양선사가 벽돌을 갈고 있었다. 마조가 그 소리를 듣고 찾아가 물었다.
“벽돌은 갈아서 무엇에 쓰려고요?”
“거울을 만들려고 하네.”
“어떻게 벽돌로 거울을 만들 수 있습니까 ?”
“그러면 좌복 위에 앉아 있다고 부처가 되겠는가?
“그러면 어찌해야 합니까?”
“수레가 가지 않을 때는 소를 때려야 하나 수레를 때려야 하나?”
이 말끝에 마조는 확연히 깨달았다고 한다.

온 천하를 말발굽으로 밟아 죽이리란 예언의 그 당사자인 마조.
“出一馬駒 踏殺天下人”
그 마조가 나무등걸이 되고,
앉은 자리 좌복 일곱이 구멍이 나도록 좌선을 했어도
깨우치지 못하였던 그것을 다섯에서 여덟이 되니 자연 깨우치게 된단 말인가 ?
참으로 참람됨이 밑터진 계집을 방불(彷彿)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가관인 것은 이어지는 댓글에
“세치 벌레에도 오푼의 결기가 있다.. 고 합니다.”
“글의 내용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이리 엎어져 꾸벅 나자빠지는 작자가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지난 가을 지나, 헛간에 버려진 허재비인들 이리 덩달아 우쭐될 수 있을까 ?
그저 아는 사이라면, 마구 때려주고 싶다. 어디인가 분질러 주고 말았으리.
그것이 내 이웃 세계의 은혜를 베푸는 법도임이니.

이어질 마지막 글에 앞서 미리 사족을 단다.
혹자는
“그거 책에 다 있다.”
“침소봉대하시는 듯한 인상을 bongta님의 글을 읽으며 받은 적이 사실은 여러번 있었으니까요. 그것은 대다수의 우리가 진리가 정말 무엇인지 모르는 점을 이용한 것이 될수도 있습니다.”
이런 지적을 하신는 분들이 계시다.
다 맞는 지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bongta 같으면 이런 의심에 앞서 먼저 이리 스스로 물었을 것이다.
책에 다 있다면, 나는 왜 여기를 기웃거릴까 ?
차라리 낮잠이나 자면 될 일 아닌가 ?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지 않으면 어찌 제 목에 걸 수 있으리.
사람이 일은 도모하지 않고 제것도 아닌 남의 집 책 많다고 뽐낸다.
실로 부끄러운 노릇이다.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 五車書)
장부인즉 모름지기 다섯수레 책을 읽어야 한다고 하였음이다.

또한 “우리가 진리가 정말 무엇인지 모르는 점을 이용한 것이 될수도..”
이리 걱정하기 앞서 bongta를 무찔러 버리지 못함을 한탄하는 게
대장부의 당당한 태도가 아닐까 ?

성철 스님은 돌아가시면서 이리 노래했다.

열반송 - 성철스님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지라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生平欺狂男女群(생평기광남녀군) 
彌天罪業過須彌(미천죄업과수미)
活陷阿鼻恨萬端(활함아비한만단)
一輪吐紅掛碧山(일륜토홍괘벽산) 

한편, 무문관 무문의 評唱을 들어보자.

如奪得關將軍大刀入手 逢佛殺佛 逢祖殺祖 於生死竿頭 得大自在
向六道四生中 遊戱三昧
관우의 대도를 뺏어 손에 들고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 생사간두에 대자재를 얻어 육도사생 중 유희삼매하리라 

아는가 그대는 ?
중생을 속이기 위해 성철 스님은 오신게다.
부처도 죽이고, 죽여 보갚음을 하지 않고 언제까지 의심 덩어리로 근심을 지고 다닐 것인가 ?
그리 의심이 깊으면 그대가 나서 bongta를 깝대기 벗겨야 한다.
그때까진 bongta는 그대를 즐겨 속여 먹으리.


이제 되돌아와 마지막을 맺는다.
여기 한가지 예를 들어 회향(廻向)한다.
이를 들음은 실로 또다시 노파심에서 이니,
법의 거래가 이러함을 드러내, 혹여 노여워하지 않으실 것을 바라는 뜻임이라.
참으로 구차스럽다.
삼가.

江西의 어느 절, 비탈길, 어느 젊은 스님(隱峰)이 손수레를 끌고 있었다.
그 비좁은 비탈길 아래켠에 거대한 체구의 노장 조실스님(馬祖)이 다리를 뻗고 오수를 즐기고 있었다.

젊은 스님은 수레를 몰고 가면서 황망히 외쳤다.

『스님! 스님! 수레가 내려갑니다. 비키세요! 뻗은 다리를 오므리시라구요!』
(請師收足.)

조실스님이 눈을 번뜩 뜨면서 말했다.

『야 이놈아! 한번 뻗은 다리는 안 오므려!』(已展不縮.)

그러자 젊은 스님이 외쳤다.

『한번 구른 수레는 빠꾸가 없습니다!』(已進不退.)

아뿔싸! 굴러가는 수레바퀴는 조실스님의 발목을 깔아뭉개고 말았다.
딱 부러진 발목을 질질 끌고 법당에 들어간 조실스님, 거대한 황소 같은 체구에
호랑이 같은 눈을 부라리며, 씩씩대며 나오는 손엔 날카로운 날이 번뜩이는
큰 도끼가 쥐여 있었다.
바라가 울리고 대웅전 앞 뜨락엔 대소스님들이 총집결, 엄숙히 대열을 정돈했다.

『아까 어떤 놈인가? 이 노승의 다리 위로 수레를 굴려 발목을 부러뜨린 놈이! 나와!』
(執斧子曰: 「適夾孵損老僧脚底出來.」)

이 때 젊은 스님, 조금도 기개를 굽히지 않고 늠름하게 뚜벅뚜벅 걸어나와
조실스님 앞에 무릎꿇고 가사를 젖히더니 목을 푸른 도낏날 앞에 쑤욱 내밀었다.(師便出, 於祖前引頸.)

그러자 그 긴장이 감도는 순간,
노승의 얼굴엔 인자한 화색이 만면, 도끼를 내려놓았다.(祖乃置斧.)

- 위 번역문은 도올『碧巖錄』인용.

- 宗鑑法林

隱峰推車次。馬祖展足在路上坐。師曰請師收足。
祖曰已展不縮。師曰已進不退。乃推過。損祖足。
祖歸執斧立法堂曰。適來輾損老僧腳底出來。
師便引頸於祖前。祖乃置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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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프냐 2008.10.31 15:40 PERM. MOD/DEL REPLY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몰려다니는...쯔 각지불이,수신제가 그리고 소요유 ㅎ 산다는건 참 모르겠습니다.그보다 내 그릇이 못미침이 아닐까? 합니다.

  2. 강곳서생 2008.10.31 16:26 PERM. MOD/DEL REPLY

    어제 '독전(毒箭)'을 찾으려고 사이트를 뒤지다 우연히 봉타님의 방으로 인도되었습니다.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드는군요. 저는 나이가 차서 이제 40 여 년의 공직을 마무리해야 할 사람이올시다. 봉타님의 훨훨나는 글을 보니 입이 다무려지질 않고 나의 왜소가 새삼느껴지는군요. 이제까지 나난 무얼했는고..
    취미없이, 특기없이 무미건조하게 청장년을 보내고 공직을 마무리하는 마당에 막상 집에서 무얼하며 세월보내나 했는데 봉타님 글을 보니 조금 위안이 됩니다요. 자주 들르겠습니다요. 건필하십시오.

  3. 사용자 bongta 2008.10.31 22:58 신고 PERM. MOD/DEL REPLY

    강곳서생 님/

    안녕하십니까?

    여기 누추한 곳을 찾아 주시니 반갑습니다.
    저는 요즘 흔히 말하는 주말농사를 짓습니다.
    감히 농부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기껏 2년차 농부입니다.
    하지만, 농부라는 말이 너무 자랑스러워,
    기꺼이 그리 부르길 즐겨합니다.

    아무도 뜻을 두지 않은지 이미 오래된 농사.
    하지만, 바로 이것이 요즘 제 마음 밭을
    마치 수수밭을 지나는 가을 바람처럼 우우 소리를 내며 지납니다.

    거기 잊혀진 이야기들이 묻어 들리기도 하고,
    사금파리에 반짝이는 햇빛처럼 아름다운 소식들이 찰랑거리기도 합니다.
    저는 저희 밭 언덕에 서서 그 소리에 마냥 취하곤 합니다.

    늦가을이 되면, 기러기들이 지나기도 합니다.
    제가 앞의 글에서 쓴 글을 다시 인용하면,

    “제가 주말마다 들르는 밭, 저편 아래가 한탄강입니다.
    저는 부러 그리 내려가 하늘가 나는 기러기를 치어다봅니다.
    가지런한 v字 행렬을 보면 마음이 공연히 처연(凄然)해집니다.
    달빛을 가르고 삿대 저어 나아가는 저 끝은 어떠한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런가 ?
    수천리를 지쳐 나아갈 올배기들의 덜 여문 날갯죽지들은 찢어질 듯 얼마나 아플까 ?
    게다가 짝 잃은 외기러기들은 오죽이나 서러울 텐가 ?”
    (※ 참고 : 노숙초침 http://bongta.com/131 )

    그러자니, 마침 기러기 노래가 떠오릅니다.
    노래는 못하지만,
    생각이 난 김에 여기 그 노래를 새겨둡니다.

    이별의 노래(박목월 詩 / 김성태 曲)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에 사랑도 저물었네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

    선생님께서도 공직을 마무리하시게 되면,
    저처럼 꼭이나 농사가 아니더라도,
    그 동안 잊었던 기억들을 다시 만나는
    고은 시간을 갖게 되시길 빕니다.

    "도대체 그 은빛 기억들은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것이란 말인가?
    당체 어줍지도 않은 핑계를 들어, 그것을 소홀히 하지나 않았는가?"

    저는 이런 물음을 가만히 스스로에게 툭 던지곤 합니다.
    호젓한 숲속 길, 도토리같이 떼구르르 구르는 그런 물음 말입니다.

  4. 사용자 bongta 2008.11.01 17:36 신고 PERM. MOD/DEL REPLY

    아프냐 님/

    제가 소요유란 말을 처음 대한 것은 고등학교 시절입니다.
    노자를 우연히 접하고는 그 인연 지음에 따라 이내 장자를 알게 되었습니다.
    소요유란 장자에 나오는 하나의 챕터이기도 하지만, 첫 장이기도 합니다.
    블로그 표제어 ‘逍遙遊 - 漫步’
    이리 걸어두기도 한 소이연(所以然)이 그러하기도 합니다.

    저는 여기에 만보(漫步)를 덧붙여 보았지요.
    이게 보통은 한가로이 어슬렁어슬렁 걷는 걸음으로 새겨지지만,
    본시 만(漫)이라는 글자가 질펀하다, 끝없다, 가득하다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한즉, 만보(漫步)라는 것은 이런 뜻이어야 한다고 혼자 생각해 본 것입니다.
    즉, 만(漫)에서 ‘끝없이→제한 없이→자유롭게’란 어의가 취해지고,
    보(步)에선 선재동자의 만행(萬行)처럼 두루 걸림 없이 세상을 거닐며,
    구도(求道) 또는 두타(頭陀) 행을 함을 뜻한 것이지요.
    소요유의 경지는 도를 구함도, 지혜를 구함도 이미 여읜 단계지만,
    (아니, 여의고 아니고 하는 의론의 차원을 넘은 경계겠지요.)
    미욱하기 짝이 없는 저로서는 아직도 만보를 해야 하는 처지이기에,
    소요유 곁에 이리 만보란 말을 곁두리로 붙여두어 겸양을 보인 것입니다.
    하지만, 실인즉 저로서는 구도행으로서 만보를 하겠다는 뜻을 구하기보다는,
    차라리 만유(漫遊)이니, 그저 자유롭게 세상을 휘저으며
    구하는 바 없이, 그저 빈 삿대(篙) 저어 나아가길 기대합니다.

    이러하니, 실인즉 소요유(逍遙遊)나 제가 말하는 만보(漫步)나 그다지 다를 것도 없습니다.
    소요(逍遙) ↔ 만(漫), 유(遊) ↔ 보(步)
    이런 구조이니, 결국 중언부언(重言復言)한 꼬락서니가 되고 말았군요.

    굳이 차이를 꼬집는다면,
    사람이 길을 걷는다(步)하면, 신선은 세상을 유(遊)한다고나할까,
    아마도 장자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신선쯤이나 되고도 남았음인가?
    ....
    그 외도 별 잡스런 생각이 꼬리를 무나,
    역시나 이쯤에서 그침으로서,
    바로 그 자리로 돌아가 소요유하고자 합니다.

    ***

    그런데, 지난 수요일 밭에 갔다가 거기서 이웃 농부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 분하고 대작(對酌)하다가 서로 주고받은 대화 한 토막 소개합니다.
    마침 이미 지기가 된 또 다른 농부 분께서
    저를 빌어 ‘소요유’란 주제를 술자리에 툭 던져 놓으셨습니다.
    해서 술자리에 때 아닌 이 말이 껴들게 됩니다.

    제가 소요유란 이런 게 아닐까요 하고 한 마디 했습니다.

    “보름달이 떠오른 날.
    산길을 지나는 과객이 있었습니다.
    휘영청 밝은 달빛이 이내 나그네 정수리에서 은빛으로 부서집니다.
    길을 걷다가 마침 돌부리에 걸려 나동구라지고 맙니다.
    벌렁 자빠지는 통에 괴춤에 차고 있던 호리병이 깨져버리고 맙니다.
    아뿔싸, 곡차가 다 엎질러지고 말았습니다.
    아까와 할 사이도 없이,
    잠깐새 하늘을 치어다보니,
    한 아름 달빛이 가슴팍으로 쏟아집니다.
    바로 이 순간 곡차도, 갈 길도 다 잊고,
    그저 달빛에 잠깁니다.
    구할 바 없이 다 놔버린 이 장면,
    달빛과 함께 젖어드는 이 순간이 바로 소요유의 경지가 아닐까요?”

    제가 취기어린 기분에,
    갈지자로 휘저으며 되는대로 말을 이리 부려놓았습니다.

    하자, 그 농부님이 대(對)하여 가로대,

    “그 달도 없이 바로 그저 소요유다.”

    말인즉슨, 저처럼 달을 굳이 끌어 씀 - 인용(引用) 없이,
    땅에 넘어진 그 상태 그대로 느끼는 그 망각(忘却)의 경지이면 족하지,
    뭣 하러 달을 끌어들이느냐 하는 반문이지요.

    여기서 만약 제가 반론을 더하려 들면 얼마든지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컨대, 달을 부러 끌어들인 게 아니라 그저 눈에 비추인 달을 말하였을 뿐인 것을,
    오히려 그 달을 애써 제각(除却)하려는 것이야말로 사뭇 도에 어긋나는 바이다 ...
    달빛이 내 가슴팍에 들어온 이상,
    이미 달과 나는 구별 될 바도 없는 이치이거늘
    새삼 나누고 더할 연유가 어디에 있는가?

    하지만, 한발 더 나아가면 작품을 버립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음 단계를 향해
    시시비비를 가리며 질주하게 될 것이 뻔하지요.
    바로 이 시시비비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면,
    이미 달이 내 가슴에 와 있는 것이 아니라,
    구만리 격(隔)한 장천(長天) 하늘가로 되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그러한즉,
    제가 주저하지 않고 바로 말합니다.

    “맞습니다.”

    저는 그 때 바로 달맞이를 하고 맙니다.
    거기 전곡 시내 어느 술자리 방 안에서.

    그 분 역시 달을 보셨을런가요?
    아니, 이미 필요치 않으셨을까요?

    아프냐 선생님의 격려 늘 고맙습니다.

  5. 김정민 2008.11.04 21:46 PERM. MOD/DEL REPLY

    참 불쌍해요.어띠안다츠셨어요.다치지마세요.

  6. 김정민 2008.11.04 21:46 PERM. MOD/DEL REPLY

    참 불쌍해요.어띠안다츠셨어요.다치지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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