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잉석(孕石)

소요유 : 2008. 12. 3. 16:29


늘 다니던 약수터가 훼손되어 부득이 새로운 약수터를 개척했다.
(※ 참고 글 : ☞ 2008/09/30 - [산] - 낮도깨비)
먼저보다 사뭇 집 가까이 있지만 나오는 물 양이 적어,
앞에 선래객(先來客)이라도 있기라도 하면 여간 시간을 내주어야 하는 게 아니다.

먼저보다 한참 먼 곳에 또 하나의 약수터도 있지만,
거기는 시간이 충분할 경우에 이용하기로 하고,
우선은 가까운 이곳을 당분간은 이용하기로 했다.

이곳은 외부인에게 가는 길이 알려져 있지 않기에,
몇몇 동네 사람들이 주로 이용할 뿐이다.
이곳을 본격 이용한지 미쳐 한 달도 되지 않았지만,
나는 댓 차례 버려진 쓰레기를 주어내었다.
아니 줍기도 하였지만, 캐내기까지 하였다.
비닐이 땅 속에 박힌 것을 보면 내가 절로 거북스럽다.
호미를 가지고 가서 캐냈다.
바로 약수터 앞에서만도 4군데 이상을 처리했다.
하나는 캐어 나가다 끝 자락이 큰 바윗돌 밑에 눌려 더이상 캐낼 수 없는 것도 있었다.
손가락이 긁혀 피까지 났었는데, 돌이 너무 무거워 혼자 힘으로는 들어낼 수 없다.
아쉽지만 도리없이 미제(未濟)의 일로 남겨둔다.
도대체가 비닐을 땅에 심는(?) 저들 불한당들의 행악(行惡)질이란 얼마나 흉한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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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부터 바위에 붙여 논 돌들이 눈에 부쩍 많이 띈다.
전면 터진 곳을 제외한 산지삼방(散之三方) 바위마다 업히어  
때로는 부적처럼 때로는 형해(形骸)처럼 창백하게 바르르 떨고 있다.

업혀진 아기 돌들.
잉석(孕石)!
잉(孕)이란 본디 아기를 배다란 뜻이지만,
저 모습을 업었다고 보건, 배었다고 생각하건 무슨 탈이 있으리.  
나는 잉선(孕線)을 본떠 속으로 나직이 이리 불러본다.
(※ 참고 글 : ☞ 2008/02/28 - [주식/봉도표] - 제 5장 반전형 봉도표(Ⅰ) - 12)

풀잎에만 이슬이 맺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가슴에 지피어진 소망들 역시 저리 바위 위에
간절한 염원이 되어 아기 바위솔처럼 돋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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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조그마한 조약돌들이 마침 새벽이슬처럼 안쓰럽다.
이슬은 한편 아름답기도 하지만,
해가 나기 시작하면서 허공중으로 산화(散華)하고 만다.
이 부셔지기 쉬운 아름다움이란 도대체 얼마나도 안타까운가 말이다.

내 눈엔 붙여 논 조약돌들이 가냘프게 떨고 있는 게 보인다.
불안하고 연약한 저들 소망의 실체들.
그래서 한편으론 가엽고, 측은하여 행여 떨어질세라 조심스레 쳐다보게 된다.

물론 개중에는 히히덕거리면서 놀이 삼아 재미로 붙이는 사람도 있겠지만,
붙이다보면 이내 진지해지며 정성을 모으지 않을 수 없으리라.
모심(恃)이란 끝내 섬김으로 나아가곤 한다.
그러하니 모심, 섬김, 믿음이란 본디 일체다.

성황당은 돌을 보탬으로서 나의 간구(懇求)가 더욱 절절해진다.
(※ 참고 글 : ☞ 2008/06/22 - [소요유] - 성황당(城隍堂))
마치 신에게 나의 갈구, 그 현존을 방부(房付)들이 듯, 
저 안뜰을 넘어 들어가며 계시온 곳 문고리를 잡아 흔들며 청하는 의식이라면,
바위에 돌 붙이기는 기왕에 있는 소망의 실재에 조그마한 나를 의탁함이다.
바위란 이미 기성의 권능이자 권위가 아니겠는가?
무소불위(無所不爲) 거기에 내가 업히어 그리 귀속 당하고자 하는 애달픈 몸짓이다.
전자는 엄정한 주객분리의식이 전제되고 있지만,
후자는 주객미분(主客未分)의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 싶은 소욕(所欲)이 내재되어 있다.

저 아랫 계곡으로부터, 바람이 우우 소리를 내지르며 올라온다.
바윗가를 스치울 때면, 저들 연약한 소망들이 행여 떨어지지나 않을까 염려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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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하필 저리 위태한 모습으로 소망의 연(鳶)을 띄우는 것일까?
예컨대 평평한 바위 위에 죽 늘여놓으면 영영 떨어지지도 않고 안전할 텐데도.

수능시험 볼 때,
교문 창살에다 엿을 붙이고, 찹쌀떡을 붙이는 것도 매한가지다.

소망이란 안전에 기대어 청할 수가 없는 것이다.
소망의 실체는 불안이다.


그렇다. 불안하기 때문에 소망이라 할 수 있는 것,
이미 성취된 것이 무엇이 불안하겠는가?
하니, 의식(儀式) 또는 제례(祭禮)를 지내려면, 불안이 극대화한 현장을 찾아내야 한다.
더욱 위험할수록 우리의 소망은 극적(劇的)으로 첨예화하고 간절해진다.
그러하기에 게가 미끄러운 교문 창살이 되고, 가파른 바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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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바람 부는 그 위태한 현장에 서서,
안간힘을 쏟으며 대극(對極)의 형식으로서의 안타까운 연출이 벌어지기에 더욱 절절(切切)하다.
떨어질 듯 떨어질 듯하면 붙여 논 기물(祈物)이 이 때라야,
더욱 간절한 소망의 정표(情表)라는 것이 확인되고,
게서 떨어지지 않고 버티면 버틸수록,
그들의 기도(祈禱)가 결코 헛되이 도로(徒勞)가 되지 않으리란
그 애절한 기대를 더욱 미더웁게 보장한다.

마주선 이 양자,
즉 위험한 무대 현장과 아슬아슬한 연출 사이의 팽팽한 긴장은
못내 우리를 아스란히 머나먼 유배지에 이르는 광야(曠野)로 이끈다.
왜?
우리는 나와 나 모두 피안(彼岸)을 꿈꾸는 차안(此岸)에 버려진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저 의식(儀式) 속에서 이를 새삼 깨우치게 된다.

(※ 격안관화(隔岸觀火)란 36計중 제9계다.
대안(對岸)의 불을 구경함이니, 적의 불행을 꽃놀이 하듯 한껏 즐기다 그 후(後)를 치는 병법이다.
만약 사람들 사이에 언덕이 있어 서로 나뉘어져 있다면,
양안(兩岸)의 상이한 소망은 갈등과 투쟁의 씨앗이 되고 만다.
하지만, 도피안(到彼岸)을 구하며 차안(此岸)에 함께 서 있는 게,
모든 중생의 숙명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잉석(孕石)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소망이자 바라밀다(波羅蜜多) 행(行)의 실증이어야 한다.)

애초 이런 의식(儀式)은 신에게 빌려고 기도(企圖)한 것이겠지만,
결국은 이런 양식적(樣式的) 행위를 통해 이 불안한 현실을 초극(超克)하고자 하는
현실 적응적 인간 자신의 몸부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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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신은 이미 소용없어진다.
실인즉 사람들은 자기위로, 위무(慰撫)가 필요했을 뿐이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서는 이게 도무지 차갑지만
때로는 진실에 가깝지 않은가 싶다.

왜?
나는 묻는다.
그리고 끝내는 인간을 회의(懷疑)한다.

저들 간절한 소망의 무게가
쓰레기 버리는 검은 마음을
어둑한 골짜기에서 건져 올릴 정도로 무거운 것인가?

소망이란 원래 정결(淨潔)한 것이 아닌가?
정결한 저 성역(聖域)을 지키지 못한다면,
도대체 우리들의 소망이란 얼마나 낯 뜨겁게 게걸스러운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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