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멱라수(汨羅水)에 잠긴 달 그림자

소요유/묵은 글 : 2008. 12. 17. 23:59


※ 참고
 
이하의 글은 모 사이트에서 분란이 일어난즉,
일시 한 분이 종적을 감추셨다.
내가 당시 그 분을 존경하던 처지인즉,
글을 올려 소회(所懷)를 편 내용이다.

바로 앞 글에서 거론한 바 있기에,
(※ 참고 글 : ☞ 2008/12/17 - [소요유] - 독성(獨醒))
여기 이리 되살려 둔다.

***
 
- 글 호흡이 거친 채 미쳐 다듬지 못하고 그냥 내놓은즉,
필경은 온말로 차리지 못하고 반토막질로 그냥 흘려내놓게 되었사오니,
행여 그릇 오해 마시고, 너그러이 양해바랍니다. -

“창랑(滄浪)의 물결이 맑을 때라면 이 내 갓끈 씻을 수 있고,
창랑의 물결이 흐릴 때라면 이 내 발이나 씻어보리라.”

초사(楚辭) 문학의 시조(始祖)인 굴원, 어부사(漁父辭)에 등장하는 창랑가(滄浪歌)란 노래다.
춘추시대 초나라의 굴원이 양자강 이남의 소택지로 유배를 당하여 있을 때다.
양자강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가 굴원을 향해 위 노래를 부른다.

정적으로부터 쫓겨나, 강가를 초췌하니 서성거리는 굴원을 비웃고 있음이니,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흐리면 발을 씻으라는 어부의 충고는 곧,
세태의 청탁(淸濁)을 가려 처신하라는 뜻이리라.

공자는 어느 날 아이들이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 노래를 들어 보아라. 갓끈을 씻건, 발을 씻건 그것은 모두 물이 스스로 저지른 일이다.”
아, 공자의 이 절절한 아픔이여, 꿋꿋한 어짐이여.

“물이 맑으면 고기가 살지 못한다”는 속담이 있다.
참으로 그런가 ?
생존 자체에 사무쳐 방점을 찍는 이들은 물이 탁함을 제 삶의 불가피한 조건으로 여김이니,
이 속담을 빌어, 맑은 이를 비웃고, 자신의 비루함을 정당화하곤 한다.

허나, 일급수에 산다는 열목어는 물이 차고 맑지 않으면 살지 못한다.
그러하니, 모든 물고기가 탁함에 의탁하는 것만은 아니다.
다만, 열목어는 탁함을 꺼려, 맑음을 사모한즉 물이 흐려 수온이 오르면 이내 죽어 절개를 지킨다.
굴원 역시 종내 멱라수(汨羅水)에 투신하고 만다.

옛말에 “삼밭에서 자란 쑥대는 저절로 곧다”라고 하나,
불연인즉, 쑥대밭에 떨어진 삼씨일지언정 어찌 그 곧은 성품을 잃었다 함부로 말할 수 있을런가.
jb야말로 삼씨(麻子仁)이니 쑥대밭에서 홀로 올올(兀兀)하니 외롭고뇨.

[숫타니파타]에서 부처는 이리 이르고 있다.
“이 세상 것은 모두 변하고 없어지는 것으로 알고, 집에 머물러 있지 말아라.
사람이`이것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물건, 그것은 그 사람의 죽음으로 잃게 된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현명하게 이 이치를 깨닫고, 내 것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히지 말아라.
눈을 뜬 사람은 꿈속에서 만난 사람을 다시 볼 수 없듯이,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 이 세상을 떠나면 다시는 만날 수 없다.
누구누구라고 하던 사람들도 한번 죽은 후에는 그 이름만이 남을 뿐이다.”

jb, 그 이름 자취 사라진 곳을 찾을 길 없으니,
봉타 망창(茫蒼)히 서서 석양 놀을 헤아릴 뿐이다.
여기 문예방을 떠나 어디메 멱라(汨羅)에 jb님은 그림자조차 사려 숨으신 겐가 ?
행여 굴원을 사모하여, 짐짓 멱수에 투신한 양, 중인(衆人)을
잠깐 나무라 농(譏弄)하시고자 자맥질하심인가 ?

떠나간 기러기 흔적도 없이, 멱수(汨水)에 달 그림자만 처연하다.
백아가 거문고 줄을 끊고 비탄에 잠겼다는 심정이 찰진히 여실코뇨.
봉타가 바로 앞글에서 백아절현(伯牙絶絃)의 고사를 인용하였음이니,
어폐(語弊)가 참(讖)을 지어 오늘을 예비하였단 말인가 ?
실로 말밭에 씨앗 심어 내일을 맺음인가 ?
허공을 달려 사라진 말이 이리 신령하니 정녕 놀라 두려울진저.
말이든 글이든 삼가고 삼가야 할 도리가 무릇 이러하니
소소응감(昭昭應感)하지 않을 수 없음이다.
백인(伯仁)이 유아이사(由我而死)라, 누구를 한(恨)하며 누구를 원(怨)하리.

공자가 비록 “모두 물이 스스로 저지른 일이다.”라며 한탄하였다 한들,
황노(黃老), 사문(沙門)의 길에 들어서듯 그대 아예 물가를 등질손가 ?
봉타, 이에 소연(蕭然)한 마음결 가지런히 다듬어, 공자의 다음 이야기를 이끌어 본다.

밭갈이 하는 은사(隱士)인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에게 자로가 나루터 가는 길을 물으매,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것이 세상인데 누가 이를 바꿔 놓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자네도 사람을 피해 천하를 두루 돌고 있는 공구를 따라 다니는 것보다는,
세상을 피해 조용히 살고 있는 우리를 따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하고는 뿌린 씨앗을 덮기에 바빴다.

돌아와 자로가 공자에게 전하니, 공자는 처연한 표정으로 이리 말한다.

 "새, 짐승과는 함께 무리를 같이할 수 없다.
내가 이 사람의 무리와 함께 하지 않고 누구를 함께 하겠는가.
천하에 도가 있다면 내가 바로 잡을 필요도 없지 않겠는가."

조수불가여동군(鳥獸不可與同群)의 고사가 이러하다.

뿐인가, 대신심, 대용맹, 대의단으로 발심하여 “물가”를 등진 사문(沙門)일지언정,
반본환원코 종국엔 입전수수(入纏垂手)하여 재투성이 흙투성이 얼굴로
저자거리로 돌아와, 미소지으며 문득 마른 나무 위에 꽃을 피워내는 바이니,

실로 군자의 가고 옴이 이리 매인 바 없음이라.
다 시절인연 따라 맺고 풀리는 것이니,
삼세(三世) 반연(絆緣)지어 얽힘이 북두갈고리 혹 등갈(藤葛)인들 어찌 대수랴.

한편,
갈숲 우거진 늪속에 빠져 허우적 대는 봉타인즉, 어찌 소회가 없으리.

권태는 속빈 순대임이니, 스스로를 창자 깊숙이 꽉 채워야 만족한다.
비져 터져나가도, 어둠을 밟아 두려운 양, 떨며 자신의 뱃구레를 가득 채워야 한다.
이게 순대의 본 성품인 것.
바늘귀만한 목 속에 쳐넣고, 쳐넣어도 허갈져,
생살 찢긴 아픔으로 거듭 되살아나는 아귀(餓鬼)의 허기진 슬픔.

이상(李箱) 역시 동명의 수필에서,

“아무것도 없다. 다만 어디까지 가야 끝이 날지 모르는 내일,
그것이 또 창 밖에 등대하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이다.”

이리 노래하며, 권태란 차꼬 차고 내일의 항쇄(項鎖)에 갇혀 있는 수인(囚人)임을 차탄(嗟歎)했다. 

jb님이 '김승연, 노무현이 저렇게 날뛰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권태를 두려워 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면 그야말로 어절씨구 여간 잘 표현한 게 아닌가 싶다.
나이 꽉 찼다한들 이내 곧 耳順, 從心인가 ?
실인즉, 그들은 진짜배기 사광(思狂)일 뿐이다.
jb님이 '노무현만 들먹이면 두드러기를 일으키는 맹목적 노무현 빠돌이들 운운'이라 하였다면,
이야말로 일세의 국창, 절창이로구나.
봉타, 깍지다리 단정히, 북채들고, 장구치며 추임새를 넣어본다.

얼씨구, 절씨구.
조오타,
얼쑤.

왜 아니 그런가 ?
그들(김,노)이 권태를 두려워하며, 사음(邪淫)에 미쳐 날뛰는 사광(思狂)이라면,
이런 글 보고 두드러기를 일으키는 족속들이야말로 사광답다.
人生百年이 드물다.
육신은 百年도 못가 이내 흙과 바람으로 돌아간다.
거머진 것도, 남긴 바도 없이 허공으로 흩어질 뿐인 것,
김승연도, 노무현도, 그대도, 나도 깨끗이 無로 돌아간다.
김승연, 노무현이라 불렀던 그 이름이야말로 허공중에 핀 헛꽃, 허공화(虛空華)요,
아침 이슬이요, 간 밤에 한껏 놀았던 몽당 비짜루 귀신인 것이 아닌가 ?
그러하니 삼세시방이 모두 환(幻), 마야(Maya)의 꽃잎으로 장엄된 만화경(萬華鏡)인 것이리라.
부처만, 절집만 금박, 단청으로 장엄하란 법있는가 ?

길다란 거울 3개를 붙여 삼각기둥을 만들고, 한쪽 구멍을 트레이싱지 같은 반투명 종이로 막는다.
그 안에 작은 색종이 조각들을 넣은 뒤 다른 한쪽 구멍에 눈을 대고 들여다 보면
화려한 육면 대칭무늬가 슬픔처럼 아스라이 꽃무리져 나타난다.
소시적 만들어 놀던, 만화경이다.
이게 곧 티벳 만다라(曼陀羅)가 아닌가 ?
봉타는 만다라 그림을 보면 소시적 놀던 만화경이 오버랩된다.
소꼽장난하던 그 시절이야말로 빛살 내리치는 윤원구족(輪圓具足)의 세계가 아니었던가 ?

이에, 한 때 Kaleider란 프로그램으로 즐기던 만화경(kaleidoscope)
그 그림을 여기 끌어놓아본다.
만다라를 방불(彷彿)하고 있지 않은가 ?
 

사용자 삽입 이미지
 (* designed by Kaleider v4.2)

성프랜체스코가 어느 농장을 가다가 물 긷는 여인을 보았다.
여인이 물동이에 물을 가득 길어 놓고 그것을 메기 전에
그 물동이에 손바닥만한 작은 나무 조각을 넣는 것이었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그 여인은 성프랜체스코를 오히려 의아히 여기면 이리 대답한다.

 “왜라뇨? 물이 흔들리고 요동할 때 물이 넘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지요.”

그때 그 일로 인하여 성프랜체스코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마음이 흔들립니까? 마음에 십자가를 넣으시오 마음이 안정되지 않습니까?
마음에 십자가를 넣으시오, 마음의 안정을 얻게 될 것입니다.”

노무현이라는 물동이에 jb가 지적한 “권태의 실상”이란 십자가 조각을 띄어볼 용기라야
비로서 까마득한 하늘이 열리고 비둘기가 날아들지나 않을까 ?

해탈을 구하며, 법(法)을 찾는 이 살부살조(殺佛殺祖)하듯,
연이나 노무현을 기리고자 한다면 정작 그를 버려야 할 노릇이 아니겠는가 ?

봉타가 언젠가 예를 든 단하천연(丹霞天然)은 木佛像을 도끼로 패서 추위로부터 보했다.
만약 그대가 사광이라면 그대 역시 키리시탄(切支丹)의 후예인 것.
아직도 납득이 아니 되시면 다음 글을 읽어보면 어떠할까 ?
노파심에서 덧붙인다면, 키리시탄을 폄하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세상엔 가는 길이 하나가 아님을 말씀드리고 싶을 뿐.

도올 김용옥 - 벽암록 강화
http://kr.blog.yahoo.com/everithyng/777

혹자는 jb님의 잠적을 두고, 의관열파(衣冠裂破) 옷을 찢고 갓을 부수며 야단이시다.
그러한가 ?
봉타는 그의 목에 걸린 묵언(默言) 조각을 본다.
가느다란 묵 패.
인추자자(引錐自刺),
송곳 곧추세워 스스로를 찌르며 언어도단(言語道斷) 선로(禪路)에 드신게다.
“분리의식”이란 백천만번 파들어가도 어차피 말씀의 자리인 것.
解體의 광맥 갱저(坑底)에 문득 되돌아 호롱 하나를 들었음이 아닌가 ?
아무리 어둠이 깊다한들, 어둠을 파내어서 쫓을 수 없는 것,
그저 부싯불 석화(石火) 한 점으로 이내 우주를 종달음쳐 빛은 전해지는 것.

부처도 팔만장광설을 쏟아내었지만 종국엔 일자무설이라 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이제 폐관(閉關)코, 잃은 소 찾으로 나서신 게다.
용사행장(用捨行藏) 자재커니 행리 챙겨 길 떠나신 것이 아니겠는가 ?
봉타 본시 마음 주머니가 작고, 두레박줄이 짧은즉,
쟁기 보습 재껴질 때마다 들어나는 벌레 쪼아먹는 새새끼마냥,
jb님의 곡괭이질 따라, 켜로 벗기어지는 “분리의식”을 쉬이 주어 낙락하였음이라,
이제 그 즐거움을 잃었음이니, 갓끈 떨어진 체통이 사뭇 처량하니,
귓가에 배따라기 이별의 노래가 구슬피 들리난닷 싶다.

欲知解脫道 해탈의 도를 알려 하는가
根境不相到 감각과 대상이 만나지 않아야 하네
眼耳絶見聞 눈과 귀가 보고 들음 끊고 나면
聲色鬧浩浩 소리와 빛깔 제들끼리 요란할 뿐이네
(眞覺)

能對, 所對가 부도(不到)이니, 바깥만 까막까치 떼처럼 소란스러울 뿐.
jb님이 늘 말씀하시던,
주객분리, 전도망상(顚倒妄想)의 요체를 뒷덜미 잡아채 나선겐가 싶은 소이가 이러하다.

萬法歸一이라면,
도대체 하나는 어디메로 돌아드는가 ? 一歸何處 ?
jb는 지금 대사일번(大死一番)을 들어
하나마저 죽이고 있은즉, 이는 곧
김이든 노든 그들을 차례로 죽이고 있음이 아닌가 말이다.
그로서 一法歸萬하고 있음이다.
살부살조(殺佛殺祖), 살남살녀(殺男殺女), 살노살소(殺老殺少)
모든 화택(火宅)을 불사르려, 입전수수(入纏垂手)하니 은혜가 깨알같이 좌르르 쏟아진다.

예수 또한 이리 말하지 않았던가.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노라 나는 사람이 제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이 어머니와 맞서게 하고
자기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

봉타, 본디 黨지어 무리짓는 것을 꺼리나,
jb님 역시나 무리 짓고, 제 앙가슴 덮히느라 분주한 이들
정수리에 야반 삼경 자정수(子正水), 길어온 찬우물물을 한껏 들이 붓고 있으니,
곧, 권태, 사광의 물세례로 세상을 벽력(霹靂) 경계하고 있는 것임이리라.

그렇다면,
jb님은 실인즉 시아귀회(施餓鬼會)를 베풀어 이들을 호궤하고자 함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불화의 불칼로 평화와 구원을 전하고 있음이 아닌가 말이다.
헌데, 이 상다리 부러지게 잘 차려진, 곡진한 자비를 냅다 발길질로 차 엎는구나.
감아쥔 손가락 펴, 떨구어 주어도 못 먹는가 ?
일모도원(日暮途遠), 갈 길이 아득묘연하다.
칠규불통(七竅不通)이니 죽음이 사뭇 가깝지 않은가 말이다.
실로 병이 고황에 든 대환(大患)들이 아닌가 ?
아, 화택(火宅) 속에 갇힌 미망이여.

온 사람의 길도 모르고, 간 사람의 길도 모른다.
jb란 이름으로 지어진 글들이 없어졌다 하나,
새삼 때늦게 찾은들 무엇하리, 두어라.
실인즉 이 역시 허공화(虛空華)가 아닐런가 ?

봉타 역시 허공화로 오늘 건들바람이 되고자 함이라.
삼가.

즐겨 외는 시를 jb님을 위해 읊조리며,
봉타 역시 다시 돌려 비추어(回光返照) 함께 상감(賞鑑)코자 한다.

처세간여허공(處世間如虛空)
여연화불착수(如蓮華不着水)

세상 살이를 허공과 같이 하라.
저 연꽃이 물 속에 피어나
그에 염착(染着-물들지)되지 않음과 같이...

夜靜水寒魚不食
滿船空載月明歸

밤은 고요하고 물은 찬데 고기는 물지 않으니.
배에 가득 허공만 싣고 달빛속에 돌아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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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묵은 글 : 2008. 12. 17. 23:5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