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주위상(走爲上) - 36계

소요유 : 2008. 12. 26. 16:30


“도망가는 게 최고야.”

36계를 몰라도 36계를 안다?
궁지에 몰려 뺑소니를 치면서,

“그래 이럴 때는 36계가 최고야.”

이런 말쯤은 골목길에서 장난치며 노는 아이도
한참 줄행랑을 치다 한 숨 돌리고서는,
으젓하니 씨부렁거리며 흉내를 낸다.

그렇지만, 막상 36계가 무엇이냐 하고 물으면,
다 큰 어른도 제대로 모르기 일쑤다.
이를 무술의 18기(十八技) 따위와 비교하여
그와 유사한 것으로서의 36기(三十六技)로 얼핏 견주는 이도 있고,
무엇인지 모르지만, 36계라 불리는 병법에 대한 특칭으로 오해를 하고 있기도 하다.

하기사,
36계(三十六計) 중 맨 마지막 차례에 주위상(走爲上)이란 계책(計策)이 있으니,
이를 36번째에 있는 계책이라는 뜻으로 그리 이른다면,  
이 또한 말인즉슨 그르지는 않다.
하지만, 그 뜻은 그저 단순히 ‘뺑소니’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말씀을 본격 풀어내기 전에,
거론할 가치도 없는 견해지만,
글을 이끌어내는 도움닫기용으로도 안성맞춤이고,
아울러 하도 재미있어 먼저 어떤 이야기 하나를 소개해본다.

“주위상이란 바로 앞의 35가지 계책을 모두 시도해 보고,
그러고도 승산이 없으면 최후의 수단으로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목숨을 보존하라는 뜻이지,
처음부터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치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런 어줍지 않은 풀이를 하는 사람이 있다.
주위상(走爲上)이 36계중 제일 마지막에 배치된 것을 두고,
엉터리 자작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다.

36계는
승전계(勝戰計), 적전계(敵戰計), 공전계(攻戰計),     
혼전계(混戰計), 병전계(幷戰計), 패전계(敗戰計)
등의 총 6투(六套)로 나누어져 있다.
(套는 요즘 식으로 하면 chapter 또는 '格式 종류' 정도로 보면 되겠다.)

각투(各套)마다 각기 6가지 계책(計策)이 들어 있으나,
분류상 그리 체계적인 관련성이 없는 것도 섞여 들어있다.
예컨대 제31계 미인계(美人計)만 하여도,
이게 꼭 패전계에 속할 까닭이 없다.
예컨대, 월나라 구천이 서시를 오나라 부차에게 바친 미인계도,
월나라가 비록 패전지국인 처지지만,
미인계 그 자체는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패전국이 아니라도 채용할 수 있는 공격책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적국 간첩을 역으로 이용하는 제33계 반간계(反間計)도 적극적인 활용 전술에 속한다.

그러하니, 36계는 그것이 꼭이나 어느 투(套)에 속하여 있다한들,
구태여 그 카테고리 뜻에 구속되어 해석을 제한할 필요는 없다 하겠다.
이 말은 36계 하나하나 어느 분류에 꼭 들어맞게 나누기 어렵기도 하고,
한편으론 36계 책 저자가 나름 고심을 했겠지만 완벽히 체계적인 분류를 하진 못했다고,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그리 하기 어려웠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어쨌든 나는 그리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위상(走爲上)이라는 것이 마침 맨 마지막에 배치되었다고 하여,
나머지 35가지 계책을 다 써보고도 여의치 않을 때 최후에 사용하는 계책이라고
억탁(臆度)의 소리를 하는 것은 참으로 사정을 모르는 소치라 하겠다.

이게 36계의 저작 편제상에서 오는 억측만이라면 그냥 애교로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내용상으로도 저런 따위의 해석은 심각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저런 식의 해석이라면, 자칫 주위상(走爲上) 본래의 뜻까지 저버리게 된다.

주위상(走爲上)이라는 것은 그저 단순히 “도망치는 게 최선”이라는 식의 소극적 계책이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계책인 것이다.
바로 이 점을 인식하지 못하면 주위상(走爲上)에 대한 바른 이해는 절대 성립되지 못한다.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이어지는 이야기를 함께 나눠보자.

원래 주위상(走爲上) 이 말의 출전은 남제서(南齊書) 왕경칙전(王敬則傳)의
“檀公三十六策,走爲上計”이라는 문귀이다.
사뭇 번거로워지니 왕경칙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하자.

 

사용자 삽입 이미지

(출처:mop.com)

36계 원문을 보자.
全師避敵。左次無咎,未失常。

 

“全師避敵”
이 말은 전군이 적을 피해 퇴각한다라는 뜻이다.

“左次無咎,未失常”
이 말은 주역의 지수사(地水師) 본괘육사(本卦六四)에 나오는 말로서,
풀이 하자면 이렇다.

“군대가 진격하기 어려운 줄 알고 물러나면, 허물이 없으리라.
군대 또는 병법의 상도(常道)를 벗어난다고 할 바 없다.”

주역의 지수사(地水師)에서 사(師)는 군대 또는 집단을 의미한다.
이 괘는 특히 군대에 대한 주제를 중심으로 괘가 엮여져 있다.
36계 저자는 이 계 말고도 다른 계 전체에 걸쳐서도,
주역은 물론 각종 고전을 두루 인용하여 적절히 안배, 정리, 평석(評釋)하였다.
그러한즉, 항간에서 가끔 빈정대듯 36계가 그저 잡탕으로 이것저것 긁어모았다기보다는,
정성을 기우린 충분히 훌륭한 작품이라고 보는 것이 예에 합당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敵勢全勝,我不能戰,則:必降, 必和, 必走。
降則全敗,和則半敗,走則未敗。未敗者,勝之轉機也。

적군의 세력이 막강하면, 아군은 전투를 벌일 수 없다.
이 때 세 가지 방책을 세울 수 있다.

“必降, 必和, 必走”

“항복, 강화, 도망”

만약 항복한다면 완전히 패하는 것이요,
강화를 하게 되면 이는 반은 이기고, 반은 진 것이다.
하지만 달아나면 아직 진 것은 아니다.
언젠가 기회를 노려 승기를 다시 잡을 수 있다.

손자병법을 보면, 전편을 통해 일관되게 이리 타이르고 있다.

"兵非所樂也,而勝非所利也。事備而後動。" - (孫臏編)

"무력이란 갖고 노는 것이 아니며,
승리는 탐내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조건이 갖춰졌을 때라야 비로소 동한다."라고 했다.

多算勝 小算不勝
다산승 소산불승

“승산이 많으면 이기고, 승산이 적으면 이기지 못한다.”

당연한 말인 듯싶지만,
표면상의 단순한 뜻을 넘어 보다 근원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자, 이 말의 본뜻은 이를 이리 뒤집어 새겨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즉,

“승산이 확실히 있으면 싸우고,
조금이라도 불확실한 구석이 있으면 싸우지 않는다.
싸워 꼭 이길만한 상황이 아니라면 아예 싸움을 하지 않는다.
왜? 본디 싸움이란 위험하고 흉한 것이니라.”

손자병법은 끊임없이 말하고 있다.
善戰者 勝於易 勝者也
"잘 싸우는 자는 이기기 쉬운 것에 이기는 자"

어렵게 이기는 것은 싸움을 잘하는 것이 아니다.
그럴 지경이면 아예 처음부터 싸움을 시작하지 않는다.
이게 손자병법의 기본 사상이다.

百戰百勝 非善之善也
"백번 싸워 백번 이긴다한들, 그것은 선지선이 아니다."

싸우지 않고 兵을 굴하게 하는 것이 선지선이다.  

그러하니,
적이 강할 때는 함부로 싸우지 않는다.
주위상(走爲上)이 득책인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그저 꽁무니 사리고 도망간다는 뜻이 아니다.
현재 적군이 강하고 아군이 약하니,
이 상태로 싸우면 지거나, 다치게 될 것이 뻔하다.
주(走)하여 다음을 기약하겠다라는
현실에 대한 철저한 분석에 기초한 유일무이(唯一無二)의 계책인 것이다.
주위상(走爲上)을 제외한 나머지 다른 계책들은 계책들간 경합(競合)이 가능하다.
상호간 선택, 교환이 가능한 대안지(代案支) 또는 중합(重合)의 관계이다.
하지만, 주위상(走爲上)만큼은 오직 하나만 택할 수 있는 유일지(唯一支)인 것이다.
이 뜻을 잘 헤아리지 못하면 주위상(走爲上)에 대한 이해는 실패하고 만다.

위에서 지적한,
앞의 35계책을 다 쓰고도 마땅한 방책이 없어,
도망간다는 따위의 구차스런 마지막 수단이 아닌 것이다.
내가 주체가 되어 적극적으로 택한 최선의 방책인 것이다.

可謂善走者矣!

가위 ‘도망’이란 것은 아름답구나!

본문에는 진문공(晋文公)의 초나라의 전투에서 삼사(三捨) 후퇴의 예가 나오나,
이 예는 그리 적당하지가 않다.
이는 진문공이 망명시절 초나라에 신세를 졌기에,
당시 예를 차리고자 한 약속이었고, 이제 그 약속을 지킨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는 대신 다른 사례를 들어본다.

한신(韓信)은 유방(劉邦)과 항우(項羽)가 천하를 두고 쟁패전을 벌일 때,
결정적인 순간 유방 측에 붙어 전세를 유방 측에게 유리하게 이끈
한(漢)나라 건국의 일등공신이다.

한신은 원래 회음(淮陰) 사람이다.
젊었을 때는 요즘 식 표현으로 하자면 건달이었다.
남창(南昌)의 정장(亭長) 집에서 식객 노릇을 할 때이다.
수개월 동안, 거기 기식하면서 눌러 앉아 있었으므로,
주인집 부인이 못마땅하여 자기들끼리만 방안에서 밥을 먹어버렸다.
한신이 밥을 먹으로 식탁에 가보니 저들은 밥을 차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거 완전히 찬밥 신세구나 하며 그곳을 떠났다.
그런 방황의 시절에 회음의 백정 한 사람이 한신을 보고 모욕하여 가로대,

“야, 신아 너는 덩치만 크고 칼을 차고 있지만,
사실은 겁쟁이지.
네놈이 죽으려면 날 찌르고,
죽기 싫으면 내 가랑이 밑을 기어가봐라.”
하며 놀려대었다.

한신은 그 자를 한참 쳐다보더니만,
이윽고 고개를 숙이고는,
그 자의 바지 밑으로 기어 나갔다.

저잣거리에 늘어선 이들이 모두 한신을 보고는 겁쟁이라고 웃는다.

이게 널리 알려진 과하지욕(胯下之辱)의 고사다.

史書中記載:淮隂屠中少年,有侮信者。曰,若雖長大,好帶刀劍,中情怯耳。衆辱之,曰,信能死,刺我;不能死,出我胯下。於是信熟視之,俯出褲下匐伏。一市人皆笑信,以爲怯。 這個故事婦孺皆知,就是漢朝開國功臣韓信的“胯下之辱”,韓信作爲名傳千古的一代軍事家,曾以“一飯千金”“能屈能伸”等給世人留下了很好的教育典範。但是在我們這一輩人辛苦的努力下,這些典範終于全部“變味”了。

진(秦)나라는 상앙(商鞅), 이사(李斯) 등 법가(法家)가 들어가 제일 먼저 부국강병의 나라가 되었다.
그 힘을 바탕으로 천하를 통일 한 것이다.
비록 지금 나라가 어지럽지만, 아직도 법률은 엄하다.

이런 상황 하에서 일시적 모욕을 참지 못하고,
칼부림을 하게 되면, 결과는 뻔하다.
엄법주의가 통하는 사회에선 바로 목숨이 위태로워진다.
자기 하나 어디 의탁할 곳 없는 신세가 아닌가?
꾹 참고 물러나 저들에게 더 이상 주의를 끌지 않아야 한다.
이런 하찮은 일에 엮여 장래를 망칠 수는 없다.
이런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승산이 없는 것이다.
이길 형편이 아니라면 물러서야 한다.

受得屈中屈

굴욕중의 굴욕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
이게 주위상(走爲上)에 숨어 있는 또 하나의 교훈이다.

후에, 유방의 논공행상에 따라 한신은 초(楚)나라 왕이 되었다.
그의 고향인 회음 역시 초나라 땅이다.
한신이 회음 땅에 이르러,
젊었을 때 자신에게 과하지욕(胯下之辱)의 치욕을 안겨준 그 백정을 찾아냈다.
그는 끌려 나오면서 벌벌 떨었다.
틀림없이 죽음이 따를 것으로 예상했으리라.

“너를 장교로 시켜주마.”

부하들을 휘 둘러보며,
한신은 이렇게 말했다.

“이 사나이는 용감한 사람이야.
나를 모욕했을 때, 내가 그를 베어버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꾹 참았다.
장래에 큰 뜻을 품은 인간은 그런 것이야.
보라, 나는 그 때문에 오늘이 있지 않은가?”

목숨을 돌려받은 저 작자,
그 날 밤, 제 목을 쓰다듬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을까?
아니면, 가랑이 밑을 기어가며 가슴 속으로 우겨넣었을  한신의 그 치욕보다 더한 고통을 느꼈을까?

***

또 한 가지 사례는 두말 할 것도 없이 “모택동(毛澤東)의 대장정(大長程)”이다.

추격하는 국민당 군대를 피하여 장장 9600km를 도망가는 대장정은
실로 주위상(走爲上)의 결정적인 현화(顯花)다.

강서성에서 섬서성(陝西省)까지 11개 성(省)을 통과하면서,
수없이 많은 험한 산, 강, 늪을 건너 도망갔다.
섬서성 북쪽 연안 황토지역에 도착한 그들은 게서 힘을 길렀다.
마침내 14년 후인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은
북경에서 공산혁명의 성공을 만방에 선포한다.

그런데,
이제 이쯤에서 그치고,
다시 놓치지 말고 음미해볼 것이 있다.

走則未敗。未敗者,勝之轉機也

주(走), 즉 달아난 것이 아직 패하지 않았다는 표현은
뒤집으면, 아직 이기지도 못했단 말이다.
주위상(走爲上)은 완전 만족(滿足) 해(解)는 아닌 것이다.
유보(留保)의 해(解), 상황 적응형 일시적인 해(解)인 것이다.
당시 그 현장에선 유일무이의 방책이지만, 통시적으로 완결된 솔루션은 아니다.
하니까, 달아난 것으로 근원적인 사태가 해결된 것이 아니다.
필연 다음의 준비가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그게 무엇인가?

'기다림'

단순한 기다림이 아니다,
그러하기에 원문에서는 ‘勝之轉機也’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승리의 전기(轉機)는 그저 시간만 가면 얻어지는 게 아닐 터.

잠룡물용(潛龍勿用)
절치부심(切齒腐心)
차권마장(搓拳摩掌)

하늘을 날던 용이 연못에 들어가 잠적한다, - 함부로 나서지 않는다.
이를 갈며 원한으로 속을 썩이다, - 투지를 북돋는다.
주먹을 비벼 단련하고 장(손바닥)을 연마한다. - 실력을 기른다.

나는 생각한다.
기다림 속에는 이런 삼단계의 과정이 필연 따라야 한다.

잠룡물용(潛龍勿用)이란 말은 주역 건위천(乾爲天) 초구(初九)에 나온다.
이를 보통은 ‘못에 숨은 용이니, 쓰지 말라.’라고 풀이 하는데,
여기서 '쓰지 말라'라는 본디 숨은 뜻은,
잠룡을 대상화하여 외부에서 그를 쓰지 말라는 게 아니라,
잠룡 그 주체가 세상 밖으로 나아가지 말라는 것이다.
지금은 연못에 숨어 힘을 길러야 할 때이니,
함부로 나와서 욕(辱)을 사지 말라는 뜻이며,
이는 곧 '차권마장'할 시기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용이 하늘을 날지 않고,
못에 들어 있는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당연 하늘을 날 기회를 엿보며 힘을 모으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역으로,
소인물용(小人勿用)이란 말은 주역의 지수사(地水師) 상육(上六)에 나오는 말이다.
이 뜻은 ‘소인을 쓰면 필히 나라가 어지럽다.’란 뜻이다.
일을 도모할 때는 소인과 함께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보통 사태가 어지로울 때,
소인이 나대며 우쭐거리게 된다.
이럴수록 혹하지 말고 이를 경계하여야 할지니,
이 때에 이르러 소인물용(小人勿用)을 기억해내야 한다.

물용(勿用)은 물용이되, 이 양자는 이리 다르다.
물용을 자칫 오역하여 소인물용의 물용으로 이해하면,
잠룡물용(潛龍勿用)은 패퇴로,
주위상(走爲上)은 그저 필부의 '뺑소니'로 전락하고 만다.
잠룡물용(潛龍勿用)은 조금 있다 아래에서 조금 더 살펴보고자 한다.

***

끝으로,
주위상(走爲上)을 다루면서, 소홀히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 주제가 하나 더 남아 있다.
다른 듯, 하지만 다르지 않은 이 말씀을 꼭 음미해보아야 한다.

飛鳥盡,良弓藏,
狡兔死,走狗烹,
敵國滅,謀臣忘

새가 잡히면 활은 더 이상 필요 없다.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
적국을 멸하면, 이젠 모신(謀臣)이 더 이상 필요 없어 내쳐진다.

이 이치를 알지 못하여,
끝내 죽임을 당한 이가 한신(韓信), 악비(岳飛) 등이요,
반대로, 장량(張良)、범려(範蠡) 등은 공을 이룬 후,
슬그머니 몸을 빼서 명을 보전했다.

노자도덕경(老子 道德經 第九章)의 가르침도 매한가지다.

持而盈之,不如其己。
揣而銳之,不可長保。

金玉滿堂,莫之能守。


富貴而驕,自遺其咎。

功遂身退,天之道。



"지니고 있으면서 채우려고 함은 그침만 못하며,
불려서 날카롭게 한들 오래 보존할 수 없다.
금과 옥이 집안을 가득 채워도,
능히 지킬 수 없다.
부귀하여 교만함은 스스로 허물을 남기는 것이라.
공을 이루고 나면 물러남이 하늘의 도니라."

공수신퇴(功遂身退)!

이 말이 주위상(走爲上)과 외양 다른 양 싶지만,
실(實)을 들여다보면 그 내막이 크게 다를 바 없음을 깨닫게 된다.
신하가 공을 이루고 나면, 상(賞)이 나린다.
하지만, 상(賞)은 왕의 재물을 나누는 것이라,
종국엔 왕과 공신(功臣)의 관계가 갈등과 긴장관계로 발전하게 되는 예는 허다하다.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는 욕심과 조금이라도 덜 주려는 인색함의 충돌.
왕의 세력이 강하다면, 신하가 왕과 다툴 수 있겠는가?
다툴 수 없다면, 명(命) 보존을 위해서라도 뒤로 물러나야 한다.
저 안짝에 숨겨진 역학 구조가 주위상(走爲上)의 상황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시소 양쪽에 나뉘어 앉은 이들과는 사뭇 위격이 다른 인물이 하나 있다.
진(晉)나라 개자추(介子推)는 공신(功臣)이면서도 몸을 스스로 빼서 물러났다한들,
저 장량이나 범려처럼 한 몫 챙기지도 않은 상황에서,
즉 논공행상이 아직 행해지지도 않았는데, 그 현장을 떠났다.
공수신퇴(功遂身退)란 거울에 비추일 때,
실로, 이 개자추의 행장(行狀)은 홀로 묘하다.
자세한 것은 '참고 글'을 볼 것.
(※ 참고 글 : ☞ 2008/03/13 - [소요유] - 개자추(介子推)를 생각한다.)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한 장면 중,
전당포 실내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걸려 있었다.

財寶滿室
富貴吉祥
一刻千金
金玉滿堂

전당포에 걸맞게 모두 재물에 관련된 것이다.
순간 내 눈이 '金玉滿堂'이란 글귀에 머무른다.

바로 노자의
'金玉滿堂,莫之能守' 이 글귀가 생각난 것이다.

저 전당포 주인은 금옥만당(金玉滿堂)은 알아도
막지능수(莫之能守)는 몰랐음일까?
아니면 알면서도 애써 외면한 것일까?

영화에서는 전당포 주인은 재물을 지키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고 만다.

전당포에 걸린 저 글귀 다음에 짝을 맞춰 잇따라야 할 말들은 어디에 간 것인가?
늘 그러하듯이 곡진한 삶의 진실은 저 안쪽에 숨겨져 있다.
가을 낙엽은 끝내 우우 소리를 내며 계곡 안쪽으로 몰려 들어가 자취를 감춘다.
낙엽귀근(落葉歸根).
곡신(谷神).
안쪽에 숨겨진 진실.
뿌리에 가닿지 않는 저 전당포의 반편(半偏) 조각 잎새들은,
영화이지만 종내 주인의 죽음을 목격하고 만다.

보(步)는 그저 걷는 것이지만,
추(趨)는 종종걸음으로 급하게 가는 것이요,
주(走)는 급하게 달린다는 의미이다.
(물론 현대 중국어에서는 주(走)가 그냥 ‘가다’ 정도의 뜻으로 사용되긴 한다.)
그러하니, 주위상(走爲上)은 급박히 몸을 거두는 것이 상책이라는 글자 상의 뜻을 갖고 있다.
한가해서는 아니 된다는 점을 특히 새겨 들어야 한다.

주위상(走爲上)이란 계책,
이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 35계는 거지반 공격적인 책략이다.
주(走)는 적군 쪽이 아닌 거꾸로 내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아군의 진지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내밀한 자기 본래의 성품으로 깊숙이 침잠(沈潛)한다고 새기면 아니 될까?
이 지점에서도 이내, 잠룡(潛龍)처럼 연못 깊숙이 숨는 모습이 연상되는 것이다.
주역 건위천(乾爲天) 초구(初九)에 나오는,

潛龍 勿用

이 말은 앞에서 보았듯이 “물에 숨은 용이니 쓰지 말라”란 의미로 가끔 새겨지지만,
흔히 다음과 같은 문왕의 고사를 배경에 두고 풀어지고 있다.
은(殷)의 폭군 주왕(紂王)은 후에 나라를 이어 받을 주(周)의 문왕(文王)을
7년 동안 유리(羑里)의 옥에 가두었다.
주(紂)는 문왕의 아들 백읍고(伯邑考)를 죽여
그 살로 고기떡(肉餅)을 만들어 문왕에게 보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출처:http://greatchinese.com)

만약 문왕이 성인이라면 자식의 살인 것을 알고 먹지 않을 터이니,
그럴 경우 문왕을 죽여 버리고,
반대로 먹는다면 그저 그런 범인에 불과할 것이니,
별로 두려워할 인물이 아니니 살려주자는 방침이었다.
문왕은 자식의 살 인줄 알면서도 후일을 기약하면,
눈물을 머금고 자식의 고기를 먹었다.

이리하여, 후에 풀려난 문왕은 강태공을 얻고 국력을 길렀고,
아들인 주무왕(周武王)에 이르러 은(殷)나라를 쳐서 무너뜨린다.

하지만, 저게 어찌 문왕의 전유 괘상이겠는가?
주역을 마주하는 문복자는 모두 낱낱이 저 괘상을 만날 때,
그 주체로서 거기 서있는 것일 뿐이다.
이를 놓치고, 저 괘상을 남의 것으로 미뤄두는 한,
저 괘상을 바로 맞이 할 수 없다.

可謂善走者矣!

가위(可謂) ‘走’란 것은 아름답구나!

풍풍우우(風風雨雨) 이 누천년 역사에
허다한 영웅호걸이 많다만,
是進是退,是留是走
나아가고 물러서며, 머무르고 달아남을
제대로 알고, 알지 못함에, 일신의 존망이 달렸음이라.

走得巧走得妙!

다만,
천천만만(千千萬萬) 개개마다 다른 형세를 살펴 어찌 대응할 것인가?

계란으로 바위를 칠 것인가?
적보다 열세이면서 강다짐으로 부딪히면 죽음이요,

청산이 있는데, 땔나무를 걱정하련가?
먼저 생을 구하고, 후에 다시 회복할 것을 기약하면,
이것이야말로 상지상(上之上) 득책(得策)이라.

이제 그만 마무리를 하여야 하는데,
미처 못한 말 터럭 하나가 자꾸 꼬물꼬물 키보드 위에 뒹굴며 보챈다.
이야기가 늘어져 팽팽한 긴장감이 없어지는 폐단이 있지만,
오늘 한가하니, 이리 주저리주저리 마저 부려내고 만다.

저 앞에서 말한 토사구팽(兎死狗烹)의 고사는 사기(史記)를 비롯한
여기저기에서 산견(散見)되는 유명한 말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말이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가 있다.
장면 정권 때는 민주당 국회의원, 박정권 때는 공화당 원내 총무, 유정회 의원,
이어 전.노 정권 때도 승승장구하여 국회의장까지 한 사람이 있다.
김재순이라는 사람이다.
김영삼과 30년 친구사이라는 그는 김영삼의 대통령 당선을 위해,
당시 불철주야 힘을 보탰다.
그러나, 당선 후, 재산공개의 덫에 걸려 끝내 그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그 때 김재순이 내뱉은 말이 바로 ‘토사구팽’이다.

이후로 이 말이 널리 항간에 퍼져,
쓴 소주잔을 기우리며 신세를 한탄하는 일개 필부도 스스럼없이 사용하는 말이 되었다.

토사구팽은 공을 이룬 자기편 사람들에게,
재물을, 또는 자리를 나눌 때 일어난다.
한정된 것을 분배하려니 무리가 따르고,
끝내 아측(我側) 인사를 내치면서까지 서운한 짓거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김대중 정권 때라면 어떨까?
수십 년간 상대측이 누리던 그 공간을 이쪽으로 돌려 접수하는데,
무슨 부족함이 있겠는가?
신천지가 널리고 널렸다.
어려움이 없었을 터.
자측(自側) 인사들을 내치면서 박하게 할 여지가 그만큼 적었다 하리라.

하지만 가령 지금의 이명박 정권이라면 어떨까?
저들이 늘 노래해 마지않는 잃어버린 10년이다.
그 이전 근 50년 동안 독차지하다시피 한 처지였으니,
오히려 상대적 박탈감이 더 심했을까나?
지상(紙上)엔 연일 前10년간의 상실했던 자리를 찾아오는데
혈안이 되고 있다는 기사가 차고 넘친다.

토사구팽이 아니라,
적군의 자리를 헐어 아측을 챙겨주고 있는 저들의 처사는
오히려 의리가 넘치고 배려가 절절하니 아름답게 여겨야 할까나?

정작, 그들은 이재오파, 친박파, 친이파 등으로 갈려 내부적인 세력다툼에 영일(寧日)이 없다.
이 와중에 상대파 인사를 토사구팽 하였다니, 아니라는 둥 하며, 싸움질에 바쁘다.
김영삼 정권 때 김재순, 박준규 등을 토사구팽할 때는,
그래도 국민들을 향해 체면을 차리려고 했다는 명분이라도 있었다.
당시엔 그래도 한 줌 점잖은 구석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작금의 한나라당에서 떠들고 있는 ‘토사구팽’론은
내부 세력들 간의 다툼에 불과하다.
저들은 국민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있다.
참으로 뻔뻔하다.
저 오죽한 김영삼 정권보다 더 염치가 없다 하겠다.

하기사,
원래 토사구팽은 본질적으로 외부용이 아니라, 내부용인 게 맞긴 하다.
그러하니, 저들을 새삼 나무람이 무슨 소용이랴.

그것은 그러하다 치부하고,
기왕에 쉬어가는 길,
말고삐를 채잡아 하나 더 떨구며 마무리 짓자.

토사구팽은 이게 자신의 현실이 되는 순간,
뒤늦게 세상을 향해 원망을 토로할 때, 비로소 원한의 말로서 동원된다.
그러하니, 이 말을 쓰는 그 현장은 언제나 비장한 통한과 핏물로 흥건해진다.

한(漢)나라 건국의 일등공신인 한신도 이 말을 토해내는 그 현장에선,
이미 모반죄로 체포되었을 때이다.

그런데 범례의 경우는 아주 다르다.
월왕 구천(句踐)을 도와 숙적 오나라를 패망시킨 일등 공신 범려는
월나라를 등지고 스스로 제나라로 은거해버린다.
그리고는 월나라에 아직 남아 있는 대부 문종(文種)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 편지의 내용은, 
토사구팽의 이치를 들어, 그도 월나라를 떠날 것을 권하는 것이었으니,
범려는 토사구팽의 말을 하되, 이를 들어 남을 경계하는 데 사용한 것이다.
자신이 말을 하고도 그 말의 당사자가 되지 않은 범려야말로
보통 현인(賢人)이 아닌 것이다.
그야말로 명철보신(明哲保身)의 권화(權化)이다.
후에 문종은 구천이 보낸 칼을 맞이한다.
고대에 신하에게 칼을 보내는 것은 곧 죽으라는 말과 동격이다.
(※ 참고 글 : ☞ 2008/02/11 - [소요유/묵은 글] - 범려(范蠡))

 

사용자 삽입 이미지

     (범려, 출처 : 三十六計經典故事)

흔히 중국인을 현실적이라고 한다.
범려는 현대의 중국인에게도 가장 추앙받는 인물의 제일 첫째 자리에 놓여 있다.
이게 실은 범려의 현명함, 아낌없는 자비희사 정신을 본받고자 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거만의 재산을 일구었기 때문이라 짐작이 되긴 하지만.

 

***

그런데 말이다.
말을 그치려는 여기 이 현장,
마지막 질문이 어두운 골목길 한 모퉁이에 서서 음흉스럽게 기다리고 있다.

한신처럼 남의 가랑이 밑을 기어 들어가면, 과연 후일을 기약할 수 있을까?
아마, 상대가 더욱 기가 승하여 요놈 별 것 아니네 하며,
더욱 몰아붙여 이젠 멱을 따자고 대들지 않을까?

모택동처럼 천리만리 도망가는 자를 상대가 그냥 놔둘까?
잡초는 뿌리째 뽑아야 근절할 수 있는 것,
차제에 끝까지 쫓아 도륙해버리고자 하는 모진 적군은 없을 텐가?

예컨대, 북한이 미국의 위협에 굴복하고 꽁무니를 사렸으면,
지금처럼 핵을 만들 수 있었으며,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을까?

가령, 제5계 진화타겁(趁火打劫)은 무엇인가?
적에게 불이 난 것을 빌미로 오히려 쳐서 겁탈하라는 것이다.
만약 모진 자라면, 이런 도망가는 자의 등을 향해 창을 날리지나 않을까?

이게 염려스러워,
구천은 부차의 똥까지 자진해서 맛보았다.
주(走)라면 이 정도까지 철저히 해야 한다.

이런 주제와는 약간 다르지만,
나는 더불어 참고할 만한 뜻을 다른 글에서 새겨둔 적이 있다.
☞ 2008/03/12 - [소요유] - 격언의 배리(背理)

주위상(走爲上)
이 말을 껍데기만 취하여, 곧이곧대로 옳다구나 하고 채용하면 능사일까?
과연 안전을 이 글이 보장하기라도 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각자 찾아야 한다.
이 글을 검증된 고전이 제공하는 완결된 가치, 진리로 여기는 한,
당신은 대책 없이 그저 한가로운 사람이 된다.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자문(自問)해야 한다.
지금 당신은 ... 누구인가?


'소요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물(膳物)  (0) 2008.12.29
유공즉출(有孔卽出)  (6) 2008.12.27
하트(愛的心)  (0) 2008.12.27
삼십육계(三十六計)  (0) 2008.12.23
청수(淸水)와 탁수(濁水)  (2) 2008.12.23
두려움  (0) 2008.12.22
Bongta LicenseBongta Stock License bottomtop
이 저작물은 봉타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3.0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행위에 제한을 받습니다.
소요유 : 2008. 12. 26. 16:30 :